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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시간과 거리를 잊었다. 몽골에서…

  • 조회수 5829
  • 등록일 201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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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거리를 잊었다. 몽골에서…
글 : 성용희(몽골 노마딕 기획, 페스티벌봄 사무국장)

“단 한 번의 발걸음이 지구 상의 길을 낼 수 없듯이, 단 하나의 생각 또한 마음속의 길을 만들지 못한다. 깊이 있는 실질적인 길을 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걷고, 또 걸어야 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몇 번을 지나갔을까? 몽골에는 포장된 길이 많지 않다. 아니 포장된 길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포장은커녕 길 같지도 않는 길을 거의 매일 5시간 정도 우리는 이동을 했다. 우리가 지나간 그 길들은 이렇듯 ‘숱한 이동’으로 인해 사막과 초원 그리고 숲 속에 생겨난 흔적이다. 이동은 자연에 흔적을 남긴다. 이번 노마딕 레지던시 프로그램 역시 참여한 기획자와 아티스트들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으면 한다.  


‘몽골 노마딕 레지던스 프로그램 - Time and Space’ 는 예술가의 이동성 촉진을 통해 창작 역량을 강화하고 양국 간 문화 이해를 촉진하고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몽골에서 길지 않았던 체류와 경험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제목 ‘Time and Space’는 어쩐지 역설적이었던 같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했던 ‘다른 시간’과 ‘이질적 공간’이 개념적이고 초월적이지만, 동시에 의외로 실재적이었기 때문이다. 몽골 초원에서의 시간은 매우 단순했다. 딱히 시계가 필요 없던 시간이었다. 해가 뜨자마자 바로 시작하는 낮과 해가 지면서 순식간에 시작하는 어둠, 이렇게 극명하게 구분되는 두 개의 시간만이 존재했었다. 물론 그 사이로 식사 시간이 있긴 했지만 늘 한결같이 늘어진 낮과 길어진 밤 안에 우리는 날짜와 시간을 잊게 되었다. 거리감 역시 비슷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속도를 체감하고 시간과 거리를 수치상으로 느껴 왔었다. 하지만 몽골에서 이 속도감과 거리감은 재편되었다. 속도는 거리와 시간의 관계로, 거리를 시간으로 나누면 속도가 된다. 우리를 태운 밴은 5~6시간 동안 매우 열심히 달리면서 상당한 속도감을 제공하지만 사실 이동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정표도 마을도 없는 이 여정에서 우리는 얼마만큼의 거리를 갔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후에 지도를 펴놓고 추적을 해보니 5시간에 100킬로미터 정도 갔던 것 같다. 체감되는 겉보기 속도에 우린 거리를 오인했었다. 무엇보다도 너무나도 평면적인 풍경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체화된 시간과 거리 관념은 무너져 내리게 된다. 독특한 ‘Time and Space’, 애써 말을 붙인다면 거세된 시간과 맹한 공간 정도쯤을 우리는 경험하고 돌아왔다. 


▲ 2012 몽골 노마딕 프로그램 현지 전시 모습

본 레지던스 프로그램 제목인 ‘투스갈’(tusgal)은 몽골 샤먼들이 제의 의식에 착용하고 사용했던 구리거울의 ‘반사’를 의미하는 말로, 이 프로젝트는 흔히들 거울로 대변되는 ‘유리거울’과 다르게 작동하는 이 구리거울(toli) 그리고 그 구리거울의 반사(tusgal)와 특유의 섬광(gerel)을 다루고자 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리거울은 유목 문화 특유의 사유방식과 보는 방식을 드러내는 감각적 개념이었다. 물론 ‘유목의 삶’과 ‘샤먼’을 경험하기 전까지, 우리들은 ‘톨리’를 은유적으로만 사유했고 지식으로만 접해 왔었으며 ‘외국의 샤먼’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유목의 삶, 노마딕 레지던시가 ‘톨리’를 실체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유목의 삶은 새로운 거울-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우린 늘 뚜렷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보기 위해 노력해 왔다.
매일 자신의 모습을 유리거울에 비추어 보고 셀카를 찍기도 하면서 뚜렷한 이미지 구현과 가능한 사실적인 재현을 당연시 여겼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몽골의 오지에 나가 있는 동안 우리는 거울 없이 잘 지냈다. 거의 씻지 않고서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어느덧 내 얼굴은 내가 볼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얼굴의 피부는 매끄럽지 않게 되었다. 마치 오래된 구리거울의 표면 마냥.


도로도 표지판도 심지어 GPS도 없이 운전하는 현지 운전수를 믿었다. 함께 초원에서 야영하는 몽골 아티스트를 믿었다. 그리고 말이 통할 수 없는 소수민족의 샤먼을 믿었다. 물론 이 믿음은 ‘믿겠다’라는 내적인 암시와 더불어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 이 둘 모두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를 운전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린 어느 곳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고 우린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내 위치를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상태, 이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위치를 자기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의 불가능함, 즉 자기-반영성(self-reflexivity)의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일까? 서구 모더니즘의 결정적 조건은 몽골 초원 위에서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일까? 또한 샤먼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에 대한 나 자신의 질문을 타자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샤먼이 우리에게 해 준 대답은 샤먼에 의해 이미 말해지지만(already) 우리에겐 아직 오지 않을 미래(yet)이기도하다. 현대예술에서 ‘현대’(contemporary)라는 그 시간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한다고 하는데 샤먼의 대답에서 이 시간성을 찾는다는 것은 억지일까?


현재 한국에는 다원예술이 중요한 예술 흐름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다원예술은 ‘한 작가의 사유 방식이 커지고 넓어지면서 외부의 영역을 흡수하고 작가 자신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오지에 가서 체류한다는 것, 전혀 다른 문화의 아티스트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기회이다. 노마딕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아티스트가 개별적으로 여행할 수 없는 곳으로 아티스트를 보내 주는 것뿐만 아니라 혹독한 자연에 직접 대면해야 하는 일종의 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풀어 내리고 이 문화와 자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부터 ‘자기’라는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티스트의 감각은 다시금 민감해진다.
 
마샬 맥루한은 자신의 책 <미디어의 이해> 서문에 다음의 글을 남겼다. 그 글을 인용하면서 짧은 경험에 대한 개인적인 에세이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예술가를 ‘인류의 촉각(antenna)’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예술은 일종의 레이더로서 기능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회 목표와 정신 목표를 발견할 수 있게 하고 시일이 경과한 뒤에는 그것에 대처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일종의 ‘조기경보(警報) 체계’로 작용한다. 예술을 이와 같이 예언적이라고 보는 개념은 이를 단순한 자기표현이라고 보는 통속적 개념과는 대비를 이룬다.”

 



자료담당자[기준일(2012.10.5)] : 국제교류부 유병은 02-760-4743
게시기간 : 12.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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