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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발전소 13기 입주작가 성과전
- 분야
- 시각예술
- 문의
- 053-430-1225
- 기간
- 2023.11.03~2023.11.30
- 시간
- 10:00-18:00
- 관람료
- 무료
- 조회수
- 312
- 장소
- 대구예술발전소 1,2전시실 및 로비
- 등록일
- 2023.10.28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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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daeguartfactory.kr
- 전시제목 : 대구예술발전소 13기 입주작가 성과전
- 전시기간 : 2023. 11. 3.(금) - 11. 30.(목)
- 전시장소 : 대구예술발전소 1,2전시실 및 로비
- 참여작가 : 김민제, 김소라, 미소, 박두리, 박지수, 신선우, 원선금, 이혁, 이혜진, 임도, 장하윤, 정은아, 지알원, 홍보미
"당신의 Digging은 [무엇] 인가요?"
지극히 사적인 취향에 근거한 만족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선호하는 컨텐츠를 한없이 파고드는 Digging은 팬클럽, 덕후, 수집가와 같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문화가 다양해지고 취향이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미술관도 그런 디깅의 대상, 컨텐츠로 바뀌고 있다. 누구나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아트 컬렉터들이 미술관을 디깅 모멘텀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작가들의 작업 과정 또한 이러한 Digging과 굉장히 맞닿아 있다. 작가들은 주제, 혹은 형상, 오브제 등 다양한 픽셀로 나뉘어진 카테고리에 대한 Digging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다. 이러한 작업 과정들을 수차례 거치며 본인만의 작업을 다양한 범주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을 우리는 Digging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내포는 디자인에도 반영했다. 작은 픽셀들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단어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형상을 추구한 컨셉 디자인은 이번 전시명과 같이 작가들의 Digging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
展은 관람객들이 단지 Digging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가이드만을 갖고 전시를 관람하면서 작가들의 정서적 Digging에 다양한 관점에서 공감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 작품 설명의 도움을 받으며 관객 각자는 자신의 감정, 관점에 근거해서 작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작품의 수동적 관객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즐기는 능동적인 참여자, 작가가 고대하는 당신 혹은 ‘연인’이다.
대구예술발전소 13기 입주 작가들이 1년여 간의 Digging을 통한 작업의 결과물들을 선보이는 이번 성과전을 통해 우리는 작가들의 예술적 Digging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대구예술발전소만의 디깅 모멘텀(Digging Momentum)을 기대해본다.
[작가노트]
김민제
사물의 가치를 통해 우리 일상에서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10년 이상 취미로 해오던 신발 수집에 관한 여러 시각들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신발을 단순히 신는 용도가 아니라, 재테크에 활용되는 현상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는 '신지 못하는 신발'을 제작한다.
또한, 이 작품은 '리셀 문화'의 핵심인 신발 상자를 활용한다.
신발 상자는 정품과 가품을 구분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박스의 존재 여부와 상태에 따라 가치가 변화한다.
종이 박스와는 달리 철, 나무, FRP 등의 소재로 만들어진 박스는 구김이나 손상이 적어 가치 변동을 최소화한다.
하지만 작품에 적혀있는 'ALL BOGUS(things)'는 즉, 모두 가짜라고 외친다.
신발을 형상화한 작품이지만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신발과 제품 박스의 형상을 띄지만
물건을 담을 수 없는 박스를 통해 원래 목적과 용도는 모두 배제시켜 작품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탐색한다.
김소라
나는 가장자리로 밀려나게 된 풍경들에 관심을 가진다.
그곳에는 다양한 표면과 기호, 색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과거에는 소외된 풍경들을 포착하고 회화로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했다면,
요즘은 빛바랜 색과 다양한 표면들을 하나의 화면 안에 구성하는 작업을 한다.
멀리서 봤을 때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다양한 표면들을 발견하게 되고,
본인이 소외된 풍경 속에서 느낀 시각적 즐거움이 작업 안에 담고자 한다.
미소
몇 번의 죽음을 목격하며 사랑하는 대상을 잃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을 잃는 것은 그 대상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함께 했던 모든 것을 잃어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상실은 단발적이지 않다.
이따금 할머니는 나를 불러다 놓고 옛날얘기를 해주신다.
장이 서던 날 놀러갔던 일, 자신의 긴 댕기머리를 보고 놀랐던 친구의 아버지, 겨울에 땅속에 무를 묻어 칭찬받았던 것,
빨갱이는 빨갛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걸었던 길. 종국에는 낡은 사진을 보여주며 얘도 죽었고, 얘도 죽었고... 모두가 떠나고 나만 남았다 하신다.
나는 부분적으로 들은 이야기들로 할머니의 시간과 공간을 상상한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없었고, 그 사람들을 모른다. 그 삭막한 그리움을 나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날들을 알고 있는 이가 나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 장소마저 모두 사라지고 내 기억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화단에 있던 커다란 나무가 감나무인지도 기억나질 않고,
마당을 채운 꽃이 국화인지도 몰랐을 때.
그렇게 모든 것이 자꾸 옅어져만 가니 나는 나의 모든 상실을, 나를 무겁게 하는 모든 것들을 애도하기로 하였다.
박두리
불통은 감정과 상상을 유기체로 성장시킨다.
상상의 유기체는 회화를 실현하고, 감정과 상상은 모체에서 뻗어나가 파생, 확장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성장하면서 몸짓을 키운다.
불통으로 커진 상상의 유기체는 백일몽으로 떠올라 회화로 남겨진다.
그 과정에서 언어의 한계성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언어로 완전히 전달하지 못한 것들을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남겨진 회화는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불통을 소통으로 변환시키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낸다.
박지수
음악적인 형식은 수없이 많이 사용된 과거의 것들을 기반으로 현재의 사운드 재료들을 버무리는 과정은 항상 새로운 자극과 경험을 선사한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물인 본 작가의 Neo Concerto 시리즈 작품으로 2관 구성의 오케스트라를 기본 구성으로 하되
조금 더 사실적인 사운드와 미래적인 전자음향과 신디사이저를 활용하여 앞으로 음악의 비전을 제시한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주를 시간예술로 불리는 음악으로 재정립해보는 시도를 하였다.
신선우
파타버스(Pataverse)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와 유니버스(universe)를 합친 말로,
현실 세계처럼 사회, 경제, 문화활동이 이뤄지는 가상의 3차원 공간인 메타버스(metaverse)에 착안하여 가져온 용어이다.
파타피직스는 형이상학을 지칭하는 메타피직스(metaphysics)를 패러디한 것으로, 부조리와 모순이 가득한 사이비 과학, 지식 등을 다룬다.
현재 우리는 이성적인 논리와 진실보다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탈진실(Post-truth)에 매료되고
그것에 더욱 기대며 결국엔 진실의 가치를 하락시키며 여러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탈진실은 도널드 트럼프 대선 이래 국제적으로 주요한 키워드로 떠올랐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아주 깊게 적용되고 있다.
신선우의 작업은 다양한 나라의 문화 요소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대량으로 쏟아지는 정보화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관, 주체 의식 등이 모호해지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계 구분이 희석되는 이 사회를 과포화된 시각정보 및 공간성으로 작업에 드러내고자 한다.
원선금
‘일회용’과 ‘재생’이라는 키워드로 다양한 형태의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두 키워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소비사회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소비재 중 하나이며, 이것을 오브제로써 활용 가능한 것에 질문하고 싶었다.
소비를 즐기며 욕구를 채워왔던 나로서는 소비와 생산을 몸소 실천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환경문제에 일조하고 있음을 알았다.
시각예술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재생’이라는 베이스에서 일회용이 아닌 하나의 오브제로서 보여 줄 수 있는 재료의 미적특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작품을 통해 일회용의 폐기물이 아닌 투명하고 예쁜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 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혁
나는 이주민으로서 경험하는 이중 정체성의 내면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염원을 회화로 드러내고자 한다
산수화 속 공간은 자본과 이념이 개입할 수 없는 이상향이며 그리운 이와 만날 수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이다
이혜진
수창동에 머무는 동안 장소에 새겨진 시간의 겹을 찾아 기록하였다.
반복적으로 바라본 풍경을 드로잉하고, 다니던 길과 건축물의 표면을 떠내거나, 수집한 오브제를 엮어보았다.
그 수집과 기록에는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거쳐간 그 무엇의 흔적이 스며 있다.
중첩된 시간을 배회하며 사라져가는 흔적을 기록하는 것은 장소를 가까이 들여다보고, 장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임도
소소하고 존재감이 없는 대상을 탐색하고, 대상에 단순반복행위를 더하여 주체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본인은 단순반복행위를 작업의 주된 표현수단으로 한다.
이는 수행(遂行)과 수행(修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한 번의 행위는 하나의 작은 단위를 만들어낸다.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보다 큰 단위가 된다. 대상은 군집을 이루며 존재감을 갖고, 주체로 전환된다.
장하윤
일을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 만난 풍경이다.
하루를 선택한 일과 사람들과 오갔던 대화 사이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며 감정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저 멀리에 시선을 두며 생각한다.
어떤 날 새벽공기를 마시며 돌아가는 길 위에서 어렴 풋 빛 하나가 번졌고,
그 시간- 아무도 없는 길목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점과 같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빛들은 동일한 선 위에 놓여 각자의 삶의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의 고단함이 무게로 깊어질 때, 낯익은 창의 빛이 번진 풍경은 위로를 건넨다.
정은아
지알원
나는 거리예술인 그래피티(graffiti)로 예술 커리어를 시작한 후, 정치, 문화, 사회 등 다양한 관계의 교차점에서 갈등과 충돌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 상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과 부산물에 주목하며, 거리예술의 다양한 문법을 활용하여 회화, 영상, 입체 예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 작업 는 국내외에서 대두되는 사회적 문제인 '이주'에 대한 사회, 문화적 충돌을 다루고자 제작되었다.
작업은 경북지역에서 생활하는 10명의 이주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43분 분량의 영상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주 노동자들, 특히 미얀마 출신의 10명의 남성은 한국 사회에서는 보통,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이주민들이 어떻게 미얀마의 정치적 변화와 한국의 사회 현실 사이에서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각 개인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통해 복잡한 사회적 구조 문제와 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정치적 상황과의 관계를 드러내며, 연결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단순한 통계나 데이터 상의 숫자로서의 존재가 아닌, 이주민 한 개인의 사연과 감정을 통해,
그들의 삶을 더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장치로서 작업이 역할하길 기대한다.
를 통해 이주민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사회 구조의 복잡성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관객에게 연결성과 공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홍보미
집에서 출발해 걸어간 미술관에는 작품이 없었다. 미술관이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걸어오면서 보았던 수 많은 시각 세계가 공사 중인 미술관을 배경삼아 진상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미술(작품)을 경험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미술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러한 의구심을 해소하고자 미술관 미화원으로 취직하여 약 1년 2개월 동안 미술관을 청소하였다.
미술관에서 경험되는 미술과 가장 멀리 떨어진 행위이지만, 동시에 미술관에 가장 먼저 도착해 미술관 구석구성을 거침없이 누비는 몸의 경험 자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관 미화원은 미술관을 만지는 거의 유일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만지는 것이 미술관을 알아가는 접촉의 방식으로 작동하길 기대하였다.
막상 경험한 미술관을 만진다는 행위는 청소 여사님들과 노동 공동체가 되는 것이자 사소하고 별거 없는 곳에서 시선을 박는 시간이었다.
별일 없는 청소부들의 이야기_내일이면 잊혀질 소소한 일상에 불과하면서도,
눈 혹은 시야가 있다면 누구나 될 수 있는 '시각인'들과 나눈 코앞의 작품 그리고 미술과 세상의 층위에 대한 땀의 대화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슈를 담기엔 한두 개의 이미지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만화의 형식을 빌렸고, 아이패드 드로잉으로 편집의 자유로움을 더했다.
어쩌면 말과 이미지를 선으로 냅다 쏟아내고, 디지털 편집을 전제로 작품 속 시공간의 제약을 제작 시작부터 풀어 놔버린 방식 자체가
첫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일 지도 모르겠다.
미술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 수 없어서, 그저 계속 드로잉 할 수 밖에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