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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열 수묵화展 <수무상형(水無常形) - 물은 형상이 없다>
    김대열 수묵화展 <수무상형(水無常形) - 물은 형상이 없다>
    분야
    문의
    02-3673-3426
    기간
    2014.03.19~2014.03.26
    시간
    11:00-18:00
    관람료
    무료
    조회수
    4319
    장소
    갤러리 한옥/ Gallery HANOK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30-10번지)
    등록일
    2014.03.14
    URL
    http://galleryhanok.blog.me
김대열 수묵화展 &lt;수무상형(水無常形) - 물은 형상이 없다&gt; 이미지
[전시안내문] <br />
<br />
물은 형상이 없다(水無常形) <br />
<br />
물은 굽은 곳이나 곧은 곳을 흘러도 너와 나의 구별이 없으며 <br />
구름은 스스로 모였다가 흩어져도 친하거나 소원함이 없네 <br />
만물은 본래 한가로워 나는 푸르다 누르다 말하지 않는데 <br />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이것이 좋다 추하다 갖다 붙이네. <br />
<br />
고려 말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1374)선사의 선시이다. <br />
여기서 우리에게 분별심의 경계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대하게되면 선악(善惡), 시비(是非), 혹은 미추(美醜) 등으로 구분하여 사고하고 판단하려하지만 그것들은 그렇게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br />
자연과 인간의 구분도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백운선사의 시에서 그는 자연과 나를 구분하려하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과의 합일이 ‘선(禪)’이며 ‘예술’이라 하지 않았던가? <br />
나는 자연 속에 있으며 자연은 나 속에 있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 부분적으로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서로의 근저에 있어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br />
그러기 때문에 산은 산, 물은 물로서 내 눈앞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산을 산이라고 보고 물을 물이라고 보는 것은 내가 산이며 물이며, 산이 나며 물이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속에 있고 그가 내 속에 있다. 선의 경지, 예술의 경지에서라야만 산은 산이며, 나는 산을 이와 같이 보고 산은 또 나를 이와 같이 보게 된다. 내가 산을 보는 것이 그대로 산이 나를 보는 것이다. <br />
“만물은 본래 한가로워” 즉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대로 이라 “나는 푸르다 누르다 말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푸르다’, ‘누르다’, ‘아름답다’, ‘추하다’ 자꾸 분별하려 한다. <br />
육조 혜능(慧能)선사는 ‘마음(心)’은 공(空)하여 한 물건도 없으며(무일물 無一物; ) 그래서 본래부터 깨끗하다(상청정; 常淸淨)고 하면서 이 ‘무일물’은 바로 ‘선도 생각하지 않고(불사선不思善;), 악도 생각하지 않는(불사악 不思惡), 즉 이분법적 분별을 초월한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父母未生前時)’의 ‘본래면목’, ‘본래무일물’ 이며, 여기에는 선(善)과 악(惡), 시(是)와 비(非), 미(迷)와 오(悟), 청정(淸淨)과 불청정(不淸淨), 등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어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고 하였다. <br />
선의 경지나 예술의 심미 경계는 잠시 자아를 망각하고 의지의 속박 즉 이분법적 분별의식을 뛰어넘어 이미지의 세계로 이동한다. 그래서 선에서 추구하는 선경이나 예술에서의 심미 추구는 서로 통한다. <br />
선과 예술은 추론이나 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헛된 공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썼다 해도 결국에는 그렇게 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은 철학적 방법을 쓰지 않으며 또 철학적 사고로 유도하는 일체의 것도 배제한다. 선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인간이 철학적 논리적 사고를 좋아하고 그것을 궁구해 간다 하더라도 궁극에 이르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데 있다. <br />
선의 방법은 이처럼 독특한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 주와 객 등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바로 ‘불이(不二)’의 경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불이’야 말로 일체존재, 일체 현상의 시초 없는 시초가 된다. 시간과 비시간이 교차하는 점,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순간 파악된 것이다. 이 교차의 순간이 무념의 순간 무상의 순간으로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이다. <br />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전달해야 했다. 그래서 선시가 나오고 선화가 그려진 것 아닌가? <br />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 이며‘ ’무심히 흐르는 물(流水無心)‘ ’형상이 없는 물(水無常形)‘을 형상이 있는 시각언어로 표현하려 하였다. 이를 얼마나 드러내어 전달하고 있는지? 송대 설두(雪竇) 선사의 시를 빌어 그 답을 대신하기로 해야겠다. <br />
<br />
춘산은 끝없이 겹겹으로 녹수에 덮여 벽층층(碧層層)이루고 <br />
산 아래 춘수(春水)는 깊고 깊어 벽산(碧山)의 그림자 비치네. <br />
천지 사이 이 무인(無人)의 경계에 나 홀로 서있구나 <br />
이 풍광의 끝이 다한 곳을 아는 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랴. <br />
<br />
<br />
2014년 3월 <br />
是得齋 墨禪室에서 김대열 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