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회화로-배민영의 회화 감각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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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민영의 회화에서 무엇보다 주목할(된) 것은 반복일 것이다. 반복은 앤디 워홀이 그랬듯, 여러 의미층을 만든다. 반복은 우선 대량생산(물)의 시지각이다. 이미지 과잉 혹은 이미지 소비, 나아가 이미지 욕망의 여러 이론들은 대량생산에 대한 이미지 시대의 이야기다. 반복은 이러한 생산시스템에 대해 몸이 반응하는 당연한 형식일 것이다. 많은 현대미술가들이 반복을 자신의 예술에 방법론적인 형식으로 사용하는 건 예술창작이 사회조건의 영향 아래 있다는 예술사회학의 기본가설을 생각나게 만든다. <br />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배민영의 회화는 반복이 아니라 대량생산물(그것이 기계로 제작된 것이든 손으로 만든 것이든)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그러니까 워홀의 캠벨수프나 브릴로 상자처럼 사물의 반복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 반복되어 만들어진 사물들의 이미지다. 배민영의 회화는 시뮬라크르가 아닌 현실인 셈이다. 중첩과 반복의 이미지를 떠다니는 기표니, 감각이니, 기표의 물질화라니 하는 건 배민영의 작품에선 해당되지 않는다. 배민영은 회화 내에서 반복을 행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행해지는 반복된 것들을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br />
쇼핑사이트 홈페이지 등장하는 다양한 물품은 그 형태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이미지로 읽힌다. 남대문 시장에 걸린 의상과 장신구, 황학동 좌판에 깔린 오래된 시계들, 노량진 수장시장에 진열되는 생선은 서로 다른 사물이지만 모두 같은 이미지로 소비된다. 마치 굿에서 북과 징이 일정하게 반복되거나 살풀이춤에서 무희가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서 몰입을 위한 장치를 하는 것처럼 현대의 대량생산 이미지는 우리의 소비욕망을 이렇게 몰입하게 만드는 거 같다. 우리가 이미지를 만들거나 해석하거나 소비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이미지가 우리를 삼키고 있는 것처럼 이미지는 우리 옆에서 숨쉰다. 우리는 사물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며 그것을 욕망한다고 하지만 반복과 대량생산의 이미지는 이제 이미 우리의 욕망 자체일 지도 모른다. 사물과 그 이미지는 욕망을 현시하고 바로 또 좌절시켜 우리에게 결핍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한시도 이러한 이미지의 욕망, 혹은 욕망의 이미지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배민영의 사물과 이미지의 풍경은 결국 우리들 존재의 풍경인 셈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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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바로 이전 해, 미술판은 온통 이러한 사물들의 풍경으로 넘쳐났다. 투명한 유리컵, 알록달록한 과일, 팬시한 인형과 악세사리들을 그린 정물화나 개인의 심리나 작가 자신의 주변 풍경, 하물며 자신이 키우는 애완견이나 고양이를 극사실로 표현한 회화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많은 그림이 미술산업(문화산업에 빗대어)이 만들어 낸 허위의 욕망을 만들어내기 바빴다. 그 이후 5년이 지난 요즘, 그런 회화들은 많이 사라진 듯하다. 배민영의 회화는 어쩌면 이러한 극사실주의 회화가 횡행했던 시절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내 자신도 처음에는 그렇게 봤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기법이나 소재에 있는 건 아니다. 관념과 개념으로도 최고의 예술이었던 시대가 모더니즘을 주름잡지 않았던가. 정치적 이슈와 이데올로기나 철학이 예술을 움직인 적도 있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예술 본연, 회화 자체로 돌아올 필요도 있다. 중국 화가이자 평론가인 가오싱젠의 말은 오늘날 의미가 있어 보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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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로 돌아온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 취약한 개인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한때 영웅이었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 미쳐버렸다. 지금처럼 물화된 시대일수록 자신의 약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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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회화로 돌아온다는 건 감각하는 한 개인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작품의 소재나 색채, 재료의 선택과 매체와 상관없이 붓을 든 작가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셈이다. 굳이 그 세계가 소비 욕망이 팽배한 시대에 대한 통찰이거나 엉망인 나라꼴을 되비칠 필요는 없다. 배민영이 그린 과잉과 잉여의 이미지로 해석되어 오히려 지나쳐버리기 쉬운 대량산물들의 풍경들은 여러 연구와 해석에도 불구하고 소중하다. 사실 하찮은 것, 보잘 것 없는 것, 버려진 것에 대한 주목은 일찍이 낭만주의자들의 몫이었다. 웅장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픽처레스크의 시선에서 주변적인 것들로 변화하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시선은 뒤샹과 워홀에 와서 ‘발견된 사물’로서 정점을 찍었다. ‘억압적인 것들의 귀환’이라고까지 말해지는 이러한 일상 사물들을 통해 우리네 인간의 존재형식을 유비하는 건 흔해빠진 해석이지만 오늘날 예술의 적은 그 ‘흔해빠진 해석’에 반항하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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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민영의 회화는 사진보다 낫다. 흔히 극사실회화의 ‘사진처럼’, 혹은 ‘실재처럼’ 그린 그림이지만 실제 그림은 사진보다 더 회화같다. ‘회화같다’는 말은 작가의 손길과 어루만짐이 화면에서 묻어난다는 얘기다. 그것은 평면에서 단순히 사물을 현전하고 관념을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작가의 감수성이 느껴지는 거다. <br />
또 그의 회화는 크다. 100호에서 150호 크기의 극사실 회화는 한 점을 완성하는데 대략 4개월이 소요된다. 4개월 동안 작가는 사물을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고 구성해낸다. 가장 최근작에서 그는 단순히 사물의 풍경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화면 속에서 좀더 색다르게 구성하기 시작했다. 재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뭔가 새로운 자신만의 표현기법을 찾아가는 셈이다. <br />
그의 작품은 정확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관찰이 판단에 앞서며 붓은 관념을 이끌 뿐이다. 그러니 작품에 몰입하는 그 최대치의 감각이 발현되는 순간 사물은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그 사물의 사이사이에는 작가의 작은 붓터치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이 배민영의 극사실이 다른 작가와는 다른 차이다. <br />
사물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평면성을 추구한 모더니스트처럼 배민영은 회화의 맛을 살리면서 사실적 재현의 방식을 고수하려한다. 어쩌면 진부하고 또 어쩌면 오래된 숙제였던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는 작가의 생각이 난 좋다. 왜냐하면 차이는 늘 반복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니 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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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탁(예술학․ 계간 컨템포러리아트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