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4중주 16번의 4악장 첫머리에 써 놓은 수수께끼 같은 문구. 악보의 첫머리에는 "힘들게 내린 결심(der Schwergefasste Entschluss)" 이라고 적혀있다. 그 뒤에 2분의 3박자인 1주제 "솔-미-라b" 에는 "그래야만 했나? (Muss es sein ?)"이라는 한마디의 악보가 있고, 이어서 4분의 4박자인 2주제 "라-도-솔, 솔-시b-미"에는 "그래야만 했다!" 라는 4마디의 악보가 있다. 이후 4악장(Grave ma non troppo tratto)가 이 2개의 주제를 엮어 가면서 시작하게 된다. 후세에 거장이 남긴 이 문구에 대한 수 많은 예측이 난무하고 있는데, 하나는 죽음을 앞둔 고뇌에 찬 베토벤이 귀머거리인 자신에게 자문자답한 철학적인 내용이라는 추측도 있고, "가정부 급료를 그렇게 주어야만 했나?- 그래야만 했다!"라는 그냥 일상적인 대화라는 추측도 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메모에 대해서 베토벤의 일생을 그린 영화 "불멸의 연인 (immotal beloved)" 에서도 인용하고 있는데, 베토벤의 젊은 시절의 연인이 죽어가는 베토벤의 병상에 찾아와서 귀가 들리지 않는 이 위대한 작곡가와 스케치 중인 악보 위에 대화하는 애처로운 내용으로 그려진다. 이 선문답 같은 베토벤의 말에 의미를 넣어서, 베토벤과 그를 존경한 중요한 후배 작곡가 2명(말러, 쇼스타코비치)의 가상적의 ‘음악적 문답’을 구성해 보았다. 베토벤–말러–쇼스타코비치로 이어지는 서양음악사의 가장 굵은 줄기를 그들의 가장 내밀한 음악인 실내악을 통해 조망해 본다 ♣ 공 연 내 용 이 소 연 Searching for the blue bird(파랑새를 찾아서) -세계초연 D. Shostakovich String Quartet in F op. 73 "Allegro non troppo" G. Mahler Symphony No. 5 in c# "Adagietto Sehr langsam" - intermission - L. v. Beethoven String Quartet in F op.135 Allegretto Vivace Lento assai e cantata tranquillo Grave ma non troppo tratto – Allegro ♣ 출연자프로필 ♬ 서울신포니에타 전문예술법인 서울신포니에타는 바이올리니스트인 김영준에 의해 1987년 12월 창단된 직업 실내악단으로서 정상급 연주자들이 모여 실내악의 깊은 내면세계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단체이다. 1988년 4월 피아니스트?예핌 브론프만?을 초청하여 창단연주를 가진 이래 400여회의 의욕적인 공연을 통하여 국 내외 정상급 연주자들을 초청, 각종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고전에서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레파토리로 폭넓은 음악적 영역을 형성하면서 꾸준한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2007년 한국음악 비평가협회로부터 한국음악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음악의 본고장인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밀슈타트 국제음악제와 카라얀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짤츠브르그 궁정음악제 및 2006 일본 쿠사추 아카데미 및 국제음악제에 정식 초청되어 연주회를 펼치므로서 현지 음악전문지와 언론사 및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음악적 평가를 받은바 있다. 서울신포니에타는 국내 음악계의 선도와 발전을 위하여 매년 10여회의 정기연주회와 기획연주, 지구환경 보존을 위한 환경음악회, 음악계의 후진양성을 위한 청소년음악회, 공단 근로자 및 가족초청 음악회, 평소 공연장을 찾지 못하는 소외계층을 위한 방문연주회 등 다양한 연주회로 음악, 교육, 사회봉사의 역할에 노력하고 있으며, 실내악의 예술적 정신으로 미래를 향해 꾸준히 노력을 하고 있다. ♬ 지휘 김영준 한국의 대표적인 바이얼리니스트 김영준은 국내의 김상대교수, 백운창교수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양해엽교수, 현해은교수에게 사사받고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음악원의 프란츠 사모힐교수 문하에서 음악수업을 하였으며 동아음악 콩쿨에서 1위 입상했다. 또한 러시아 그네신 아카데미 지노비에프 교수에게 지휘를 공부하였으며 연주활동으로 국내의 유명 교향악단을 비롯하여 프랑크푸르트 쳄버오케스트라, 모스크바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오사카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도니에츠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키에프 쳄버 오케스트라 및 키에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소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와 협연하고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우크라이나, 일본, 프랑스,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불가리아 등 현지 연주회를 통하여 외국 평론가들의 절찬을 받아 국제 음악제와 오케스트라의 정기적인 독주자로 초청받고 있는 그는 정상급 연주자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고 있다. 독주회와 협연, 실내악 연주등 많은 연주회를 가지는 그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악장을 역임하였으며 “난파음악상(87년)” “이달의 음악가상” “올해의 음악가상(90년)” “한국음악상(91년)” “그리고 오사카에서 열린 제17회 “World Peace Youth Culture Festival”에서 이탈리아 SGI로부터 “New Renaissance Award(97년)” 및 2007년 실내악 운동을 통해 한국음악과 사회에 기여한 공적으로 한국음악대상을 수상했으며 레코딩으로 "Apres un Reve" 소품집과 Beethoven Sonata"Spring & Kreuzer", Violin in Sweet Dream을 Camerata 레이블로 출반 하였으며, 스타 클래식에서 Wieniawsky-Violin Concerto No.2를 출반하였다. 현재 서울신포니에타 리더겸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I - 음악사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 중에서 서양 기악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교향곡을 중심으로 그 산맥을 조망해 보면 누가 뭐래도 베토벤(1770-1827)을 가장 우뚝 솟은 산으로 평가 할 것이다. 베토벤 이후의 산맥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슈베르트,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브루크너, 차이콥스키 등 수 많은 작곡가들이 있지만, 이들에게 있어 베토벤은 오를 수 없는 산이자, 존경의 대상이요, 하나의 규범이었다. 이러한 산맥의 흐름에 베토벤의 아성을 넘으려는 거대한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세기말 빈(Wien)의 작곡가 겸 지휘자 구스타브 말러(1860-1911)이다. 베토벤을 가슴 깊이 존경한 이 세기말의 작곡가는 평생을 교향곡 작곡에만 몰두했다. 말러는 심혈을 기울여서 교향곡이라는 틀을 이용해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혼란스러운 전환기에서 우뚝 솟은 영웅이라면, 낭만과 현대의 전환기에서는 말러가 교향곡에 정점을 찍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그린 ‘베토벤 기념 벽화’에 보면 ‘황금의 기사’라는 part가 있는데 dl 기사의 얼굴 모델이 말러였다고 한다.) (그림2 참조) 아이러니하게도 말러는 베토벤처럼 -번호가 붙어있는- 9개의 교향곡(10번은 미완성)을 남기고 심장발작으로 1911년 사망했다. 이 높은 봉우리 이후에 자신만의 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수려한 봉우리가 솟아 있다. 바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작곡한 러시아의 현대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이다. 베토벤과 말러 두 선배 작곡가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쇼스타코비치는 생존 당시에 베토벤과 견줄 정도의 천재 작곡가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베토벤은 나 따위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언급을 했다고 전해진다. 현대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의 여러 곡에서 그보다 약 200년 선배인 베토벤의 영향을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베토벤이 후대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증명해줌과 동시에 쇼스타코비치의 베토벤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반증해주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2명의 작곡가들은 다양한 방식과 자기만의 세계로 특성 있는 곡들을 썼지만 그 누구도 베토벤이 쌓아 올린 아성을 깨뜨리지는 못한 것 같다. 말러, 쇼스타코비치를 선호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어떠한 음악애호가, 연주자, 지휘자도 말러, 쇼스타코비치가 베토벤보다 위대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거산(巨山). – 이것이 베토벤 그 ‘자체’ 이다. - II – 작곡가에게 있어 실내악 특히 현악 사중주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연주회를 위한 교향곡이나 협주곡등 대편성의 곡들은 작곡가의 명성과 수입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만큼 주변의 시선과 기대감으로 인해 본인의 부담감이 만만치 않은 장르였다.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음악’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읽어가기 위한 음악’이 바로 실내악이다. 또한 실내악은 형식적 명료함과 작곡상의 편의 때문에, 내용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이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피력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실내악은 작곡가의 대표 간판곡 뒤에 숨겨져 있는 그들만의 깊고, 심오한 정신세계를 엿 볼 수 있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창’이다. 곡의 규모와 형식적인 면으로 보았을 때, 마치 음양(陰陽)의 조화처럼 교향곡과 실내악곡은 작곡가의 인생에서 나란히 쓰여지는 걸 볼 수 있다. 베토벤과 쇼스타코비치가 대표적이다. 현악사중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를 꼽으라면 베토벤을 내세우는 데에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일생에 걸쳐 비교적 시기적으로 균일하게16곡의 현악사중주를 남겼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인 이상을 구현하였다. 특히 그의 만년작품들(12번~16번)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하며 이 장르 최고의 역작으로 손색이 없다. 베토벤은 현악사중주에서 교향곡으로는 표현 할 수 없었던 자신만의 감정을 표현하며, 새로운 기법과 양식의 실험을 하였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교향곡 9번 보다는 후기 현악사중주가 그 당시 베토벤의 가슴속 본질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이 16곡의 현악사중주가 고전주의를 넘어 후배 작곡가들의 낭만주의를 예고함은 물론 현대음악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쇼스타코비치도 마찬가지이다. 15개의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를 작곡한 쇼스타코비치도 교향곡과 현악사중주의 작곡이 어느 정도 시기적으로 병행하고 있다. 당시 소련의 스탈린 당국이 예술적 창작을 조정하고, 음악이 공산주의의 선전용 예술로 전락하고 있던 시기에 작곡된 현악사중주는 그가 대중들에게 차마 말로 할 수 없었던 자신만의 예술적 고뇌와 이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말러는 교향곡 작곡에만 몰두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향곡을 통해 사람과 우주, 이성과 감정 이 통합된 거대한 형이상학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거인’, ‘부활’, ‘비극적’,’천인(千人)교향곡’ 등의 표제만 보더라도 그가 만들어 내는 세계, 즉 교향곡이 얼마나 내용적으로 철학적이고장대하며 규모적으로 큰지를 쉽게 엿볼 수 있다. 이런 그에게도 가슴 떨리는 연애편지와 같은 곡이 있는데, 사랑하는 아내 알마를 위해 썼다는 교향곡 5번 4악장 ‘Adagietto’이다. 현악 합주와 하프만으로 연주되는 이 탐미적인 곡은 토마스 만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도 쓰여서 그 유명세를 더하였다. 세계를 향해 발산하는 음악이 아닌 자신의 내향으로 침잠하는 말러의 느린 악장 중에 백미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서양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3명의 교향곡 작곡가들의 인간적인 내면을 ‘역사적인 작곡가’ 로써의 ‘교향곡’이 아닌 ‘하나의 인간’ 으로써의 ‘실내악곡’을 통해 재조명해 본다. - III - "Muss es sein? (그래야만 했나?)" "Es muss sein! (그래야만 했다!)" 이 선문답 같은 베토벤의 메시지에 음악으로 줄거리를 넣어 하나의 음악회를 구성해 보았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이 선문답에 위대한 선배 베토벤과 그를 결코 넘을 수 없었던 후배 작곡가의 ‘가상의 대화’를 상상하여 대입해 보았다. 일생 베토벤을 존경했고 절대 그를 넘어설 수 없었던 후배 작곡가들이 베토벤에게 물어본다. "그래야만 했습니까?" 베토벤이 답한다. "그래야만 했다!" 서양음악사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들의 높은 산을 되짚어보며, 혜안을 통해 ‘간판곡’인 교향곡이 아닌 그들의 인간적인 내면과 진솔한 감정을 들을 수 있는 ‘실내악곡’으로 재조명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