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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Counci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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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륜적 연극단체를 고발합니다!!

  • 조회수 1,518
  • 작성자 김*한
  • 등록일 2008.04.04
제가 약 한 달 전 영등포구청 부근에 있는 "멍석" 이라는 직장인연극단체를 찾게된 계기는
네이버 검색창에 연극이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딱 한군데"멍석"이라는 직장인연극단체가
검색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단 한군데만 검색이 되는지 아쉽고 이상했으나 마침 그곳의 위치가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영등포구청부근에 있는 그 곳을 그냥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마침 그들의 춘계공연 준비가 한창이어서 나는 그들의 연극 리허설을
이틀 동안 지켜보고 그 후 곧바로 대학로에서의 정식공연도 이틀동안 두 편의 작품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들과 함께 강화도로 엠티도 다녀왔습니다.
제가 이 멍석에서 이상한 일을 겪게 된 것은 엠티를 다녀온 직후 제가 인터넷멍석게시판에
"멍석 엠티를 다녀와서.."란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멍석 엠티를 잘 다녀왔다는 비교적 소상하고 다분히 멍석에 친화적인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글에 달린 댓글 내용도 한결같이 "좋은 글 잘 읽었다."
"멋있는 글이다." "참으로 잘 쓰여진 글이다." 등등 칭찬일색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댓글에 고무된 나는 연이어 내가 쓴 수필과 시와 단편소설 등을
차례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 제 글에 세 사람이 뚜렷한 반응을 나타냈는데
한사람은 제 글에 호감을 표했으나
나머지 두 사람은 제 글의 내용에 알 수 없는 묘한 뜻의 댓글을 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급기야는 노골적으로 "여기가 문학 동아리 게시판이냐.." "한 두 번도 아니고 왜 자꾸 이렇게 긴 글을 올리느냐.." "도대체 자꾸 글을 올리는 이유가 뭐냐.."
"글 잘 쓴다고 자랑하는 거냐.." "당신 글을 홍보하려고 게시판을 다 차지하면 어떡하냐.."
"여기가 무슨 문학작품 발표하는 곳이냐.." 등등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을 내 글에 대고 마구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그 들에게 쪽지를 보내 지극히 상식적인 말로 그들에게 항의하였으나
홍성인 이라는 멍석회장이 그들 대신 내게 쪽지를 보내 하는 말이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런 댓글을 다는 이유는 당신이 멍석에서 남자회원들의 신상을
꼬치꼬치 캐묻고 엠티에서는 여자회원들의 어깨를 툭 치며 좋지 않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심에서 그렇게 좋지 않은 댓글을 단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정상적인 사람의 정신상태에서 나오는 말이겠습니까?
저는 살다 살다 이런 봉변은 처음 당해보는 지라 분명 이들이 내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고 판단하고
그동안의 멍석에서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회원들과 나와의 차이점을 꼼꼼히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기존의 회원들은 멍석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활동상태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반면 나는 정모때나 엠티때 모임의 선두에 나와서 과감히 의견발표도
서슴없이 하고 멍석간부들이나 회장을 곤란하게 할 정도로 멍석의 부족한 점과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등을 가차없이 제시하는 등 그야말로 무리에서 튀는 행동을
했으며 기존회원들이 게시판에 그저 지극히 짧은글 몇 개 올리기가(그나마 퍼온 글) 고작인데 반해
나는 나의 창작소설과 수필, 시 등 장문의 글들을 거의 매일 같이 게시판에 올리는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가 눈치 없이 지나치게 열심히 활동한 걸까요?
지나치게 열심히 활동하면 안 되는 건가요?
열심히 활동하면 칭찬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의 눈부신(?) 활약에 상대적으로 자신들의(멍석의 몇 몇 운영자들)
존재가 어두워지고 따라서 존재적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 참고로 멍석은 실 회원 약 30명 가량의 대부분 20-30대로 구성된 단체인데
그나마 회원들간의 갈등으로 조직이 여럿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라고 홍성인 회장이
내게 푸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제거하여 내가 멍석을 차지할 수 없도록 위험을 미리 차단하고자
차마 내게는 직접 나가달라고는 말 할 수 없으니까 내게 그런 식의 야비하고 추악한
짓을 저질러서 내가 스스로 나가겠끔 했던 것입니다.
모든 내막을 파악한 나는 회장과 그 몇몇 붕당들에게 준열히 꾸짖는 글을 남기고
즉시 탈퇴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분에게 위로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런 추악한 멍석이라는 단체가 여러분의 연극단체에게도 미칠 수 있는
직장인 연극의 이미지 추락이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멍석) 얼마든지 내게서 좋은 자질을 얻어내어 그들의 발전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을 단지 자신들의 포지션을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멍석의 미래를 헌신짝처럼 포기하고 아무 허물없는 내게는
추악한 방법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쫓아내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마추어 단체의 하나인 그 곳이 어떻게 운영이 되던 간에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추악한 곳인 줄도 모르고 짧은 기간이나마 열정을 쏟았던
저의 허탈함과 심한 배신감, 모욕감은 제가 사는 동안 두고두고 저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선진사회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의 사회구조상 이런 패륜적인
단체가 순수아마추어의 탈을 쓰고 활동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저와 같은 피해자가
계속 나오리라는 두려움이 있기에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혹시나 제 글의 신빙성을 묻고자 하시는 분은 언제든지 011-9246-0078 로 전화 주시면
명쾌히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제가 썼다는 글의 내용에 대해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르는
오해의(내 글의 내용이 적절치 못해 멍석의 비난을 받지 않았나..) 소지를 해소시키기 위해
저의 창작 단편소설 한편을 이 글과 함께 실어 드립니다.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주신 회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철학적 살인>


김영한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어느 인디언 부족에게 붙잡혀서 큰 나무기둥에 결박된 채
죽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인디언들 속에 그가 어렸을 적에 살았던 동네의 주민이 섞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안도하며 그 동네사람을 향해 "아저씨!" 하고 불렀다.
그러나 그 동네사람은 그를 무표정하게 쳐다 볼 뿐
마치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인디언 추장이 망나니 춤을 추더니 그의 목을 큰칼로 잘랐다.
그의 머리가 아주 깨끗하게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베어진 머리를 바라보며 어떻게 이렇게 머리가 쉽게 잘라지는가?
하고 신기해했다. 머리에서는 피도 나지 않았고 잘려진 머리는 아주 평온해 보였다.
잘려진 머리와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그 잘려진 머리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큰 나무 옆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가 보았다.
부엌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는 그 가마솥의 물을 아마 자기 머리를 삶는데 쓰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물이 끓고 있어요. 어머니." 하며 그의 어머니를 불렀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향해 돌아섰을 때 그의 어머니는 어느새 인디언 추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꿈에서 깨었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2시였다.
그는 잠시 정신을 추스르고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컵에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컵으로 모자라서 또 한 컵을 마시고 나서야 갈증이 풀리며 침대에 앉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악몽을 꾼 것인지 아니면 개꿈을 꾼 것인지 분간을 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는 꿈속에서의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서
다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12년 전 그의 나이 33살 때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직장생활을 하는 그에게 어머니가 쓰러 지셨다는 전화를 받은 건 그가 한창 바쁘게
거래처의 주문서를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 속에서 그의 바로 위의 누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소리쳤다.
"얘! 어.. 어 ..어.. 어머니가 아침에 갑자기 쓰..쓰러지셨어! 빨리 와 봐!" 하며
그의 누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헐떡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는 더 이상 물을 겨를도 없이 전화를 끊고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탔다.
그의 어머니는 본시 그와 함께 생활하기는 하지만 주로 그의 누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의 누나가 외출을 자주 하는 바람에 그의 조카들을 돌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어머니의 종교생활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교회를 아주 열성적으로 다니고 있었다.
헌데 그의 집은 인천이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교회와 가까운 그의 누나 집에서
주로 기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그의 어머니의 지나칠 정도의 신앙심에 한편으로는 불평도 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어머니를 존경하기도 했었다.
어느 한 노인의 아집 적인 신앙이라고 홀시 하기보다는 그런 뚜렷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그의 어머니가 그는 내심 부러웠던 것이다.
그야말로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열성적인, 진실한) 크리스챤 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어렸을 적에 그의 집에서 철따라 행해지던 굿판을 떠올렸다.
무당이 굿을 할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굿판 곁에서 무엇을 크게 잘못한 사람처럼
두 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
그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왜 저렇게 빌어야 하나하고 엄마를 불쌍해했었다.
그 후 그의 어머니는 철따라 절에 다니길 시작했다.
그의 나이 불과 6살 되던 때부터였다.
그의 어머니는 한번도 딸들을 데리고 절에 가는 법이 없었다.
오직 그 만 데리고 절에 갈 뿐이었다.
그가 그 당시로서는 귀하디 귀한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절에 가는 일은 정말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잠이 채 깨지 않은 그를 끌다시피 데리고
전 날 꾸려놓은 절에 시주할 쌀과 과일, 양초, 약과, 떡..등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양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그의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 절로 향했다.
그의 집 서울 숭실대학교 부근에서 지금의 신림동 서울대학교를 가로질러 관악산 꼭대기에
있는 절로 가는 길은 정말 멀고 험했다.
그리고 산길은 무척 험난했다. 가다 쉬고 가다 쉬 고를 반복하고 겨울에는 절에서
산길에 설치해 놓은 새끼줄을 잡고 기다시피 절에 도착했다.
그리고 별로 쉴 사이 없이 법당에서 예불을 올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상을 향해 하는 절은 어린 그로서는 꽤 무리한 노역이었다.

그가 누나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어머니는
반듯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그는 그의 어머니 머리맡에 놓여있는 성경책을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쓰러지기 전까지 성경책을 보고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 눈을 뜨지 않았다.
앰뷸런스가 오고 그의 어머니는 대학병원 중 환자실에 입원됐다.
그 다음날 담당의사가 배정되고 그와 그의 형제들은
담당의사를 병실 밖 사무실에서 만났다.
의사는 그의 어머니의 나이와 평소의 건강상태 등을 묻고 초조하게 환자의
회복여부를 묻는 그의 형제들에게 무표정하게 "검진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휭 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렸다.
그런 의사의 행동에 그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위축감에
움찔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의사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뺨에 축축하게 느껴지는 안개비의 촉감이 그의 마음을 더 없이 가라앉게 했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원에 갔다.
아무도 없는 공원은 공동묘지를 연상케 했다.
공원의 가로등은 그를 보자 안개비에 젖은 희뿌연 불빛으로
그를 비추며 여기는 당신이 올 곳이 아니라는 듯 최대한 음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깨를 웅크리고 벤치에 앉았다.
여명이 보이려면 아직도 한참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검진결과 그의 어머니는 서너 곳의 뇌출혈로 인해 뇌 조직의 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였다. 그대로 식물인간이 된 것이다.
그의 형제들은 의사에게 회복가능성을 애타게 물었지만 의사는 그저
콧구멍을 후비듯 덤덤한 말투로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후로 그의 어머니는 중환자 실에서 예수의 부활과도 같은 기적을 바라는
자식들에게 생명의 끈을 쥐어주고 내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상태로 한 달이 지났다.
그러자 그의 형제들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미 어머니의 상태는 처음부터 결정되어진 것이라는 그들의 난처하고 불편한 심리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도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다만 조금 일찍 돌아가시면 자신들의 불편함이 그 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지극히 편리한대로 지어낸 망상이었다.
처음에 가졌던 어머니의 쾌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바래지고 회복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남은 자들의 안일을 위해 어머니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비감함에 모두들 동조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못 다한 생을 마감하고
자식들에게 쥐어준 자신의 생명의 끈을 거두어 들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길을 떠났다.

그는 공원벤치에서 몸을 떨며 일어났다.
안개비 때문인지 머릿속이 송연 해지며 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공원의 오솔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그의 어머니의 종교관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다만 노인의 퍽 바람직한 소일거리정도로만 여기는 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종교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인의 맹목적인 종교생활은 오직 교리에 순응하는 것일 뿐
그리고 교회내의 유대감이 노인을 교회로 이끄는 것일 뿐
그의 어머니는 아마도 종교관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행복하게 돌아가셨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바램은 어머니에 대한 그의 죄의식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지금도 많은 식물인간 환자들이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스럽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거나 아니면 가족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회복가능성이 없는 식물인간 환자의 "죽을 권리"를 주장한
어느 학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정신적 신체적 기능이 정지된 식물인간의 그러나 본래의 인간 된 권리를 존중해서
그가 고통스런 상태를 일찍 종료하고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안락사를 시켜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종교학자나 윤리학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종교학자가 주장하는 논리는
인간의 생명은 자신의 소유이기 전에 신의 소유인 것이고
따라서 모든 인간의 생명권은 신에게 있다.
즉 자연사만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이다. 는 것이었다.
윤리학자도 그와 비슷한 견해였다.
인간의 생명은 그 존엄성의 무게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 생명이라도
그것을 인위적으로 끊는 행위는 분명한 살인행위다.
그 윤리학자는 또 좋은 예를 든다며 미국의 잭 케보키언 박사의 예를 들었다.
그는 8년 간 무려 120명 이상의 환자를 안락사 시킨 혐의로 1급 살인죄와
범죄적 자살방조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아무리 치료 불가능한 환자라도
그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고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기 위한
안락사라는 것은 인간생명 존중사상으로 볼 때 그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윤리학자는 잭 케보키언 박사를 "죽음의 박사" "의사가운을 걸친 연쇄살인범" 이라고
불렀다.

그는 공원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마치 저 세상인 듯 깜깜하고 솔잎의 향이 안개로 인한 축축한 기운 때문인지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는 소나무에서 떨어져 두텁게 쌓인 솔잎의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바닥에 누웠다.
그는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회상하려 했다.
잠시 후
그의 머리 속에 그의 어머니가 무당의 울긋불긋한 옷자락에 대고 손을 비비며
무언가를 하염없이 빌고 또 비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삶은 돼지머리의 입에 시퍼런 지폐를 물려주고 있는 모습도 나타났다.
어린 그의 손을 잡고 깊은 산 속을 걸어가는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 이어서 나타났다.
깊은 산중에 있는 암자의 작은 촛불 곁에서 그의 어머니가 어린 그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어린 그는 몹시 행복한 눈빛으로 열심히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잠시 후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 무늬가 수 놓여진 棺 덮개가 보였다.
찬송가 소리도 들렸다.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누워 있는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어머니..." 그는 신음하듯 나지막하게 어머니를 불렀다.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숲에 누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