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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없음
    스페이스선+ 신진작가 옥경래 전
    분야
    문의
    02-732-0732
    기간
    2012.10.01~2012.10.31
    시간
    11~18
    관람료
    무료
    조회수
    4305
    장소
    스페이스 선+
    등록일
    2012.10.15
    URL
스페이스선+ 신진작가 옥경래 전 이미지








도시의 관찰자







최태만/미술평론가

















지구의 역사가 태양과 함께 시작했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과도한 것일까. 그러나 태양의 폭발로 형성된 빛이 지구의 대양에 생명을 창조한 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빛이 있으므로 색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태초에 빛이 있으매 색도 존재할 수 있었지 않을까. 물론 물리적으로 색의 지각은 파장이 380㎛-780㎛인 가시광선에서 가능한 현상이고, 파장이 짧은 자외선과 반대로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길며 다른 반사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간투시, 거리측정 등은 물론 화폐나 증권 등의 위조검사나 농수산품의 건조, 소독과 멸균 등의 의료기기에 사용되는 적외선의 경우 색스펙트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색은 존재한다. 그러나 색을 지각함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못지않게 감각적, 심리적 요인도 중요하다. 예컨대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색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선, 형과 함께 시각예술의 중요한 조형요소 중의 하나인 색이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시대는 매너리즘(Mannerism)과 바로크(Baroque), 그리고 인상주의일 것이다. 매너리즘 시대의 예술가들, 예컨대 베네치아 색채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매너리즘의 문을 연 틴토레토(Tintoretto)나 영혼의 구원이란 문제를 길게 왜곡된 형태와 극적인 색채대비를 통해 표현한 엘 그레코(El Greco)는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6세기 후반에 고조된 정신주의를 반영하여 어둠 속의 빛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원근법은 파괴되고 있으나 종교개혁운동으로 타격을 받은 종교예술을 영적인 차원으로 고양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의 지나친 정신주의에 맞서 보다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종교화를 추구했던 카라바지오(Caravaggio)는 명암과 색채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회화의 깊이를 부여했다. 17세기 바로크미술에는 장중한 고전주의도 부활했으나 프랑스의 라 투르(La Tour), 네덜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촛불이나 등(燈)을 통해 공간의 거리와 깊이를 표현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출현은 ‘이지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바로코(barroco)’에서 연유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던 르네상스미술의 원리를 벗어난 기이하고 불균형한 예술이라 폄훼된 바로크미술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인상주의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여파로 등장한 새로운 시민계급인 프티부르주아의 도시문화와 외광(plein air)이란 표현이 증명하듯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의 강도와 대기의 밀도에 따른 색의 파노라마를 즉각적으로 표출하였다. 모네(Claude Monet)를 비롯한 많은 인상주의자들이 야외로 나가 혼색하지 않은 원색으로 푸른 하늘의 구름, 밝은 빛에 의해 빛이 산란하는 바다, 양귀비꽃이 흐드러진 들판, 연못, 수많은 꽃을 그렸다. 그것 못지않게 마네(Edouard Manet), 르누아르(Auguste Renoir) 등이 도시 모퉁이의 카페, 물랭루즈나 술집과 같은 중산층 시민들의 유흥장, 증기를 뿜으며 진입하고 있는 기차와 역사(驛舍), 센 강에서의 보트놀이, 경마장, 산책하는 사람 등 과거 귀족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도시문화의 풍경을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의 파리가 예술가들에게 인상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밝고 쾌활하며 현란한 색채로 뒤덮인 도시로만 비쳐졌던 것은 아니었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파리를 도깨비가 우글거리는 공간으로 봤고, 베냐민(Walter Benjamin)은 도시에 있는 백화점과 아케이드를 자본주의의 진열장으로 파악했다. 우리가 흔히 도시를 잿빛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도시화의 급속한 진행에 따라 기능과 합리성을 앞세운 콘크리트 건물이 도시공간을 지배하였기 때문일 것이지만 많은 예술가들에게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대도시조차 타락의 상징인 소돔과 고모라이거나 비인간적인 장소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화가수업을 하였던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도 <호수의 섬>이란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회색도시를 떠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간 적 있었던 섬 이니스프리(Innisfree)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노래했을 것이다.







도시를 잿빛으로 인식하는 바탕에는 실제 도시환경보다 그곳의 번잡한 삶에 대한 정서적 반응인 경우가 많다. 반대로 대중사회의 소비문화는 광고와 같은 것을 통해 도시를 ‘풍요의 잉여’로 표현한다. 팝아트는 소비사회의 시각이미지를 차용해 도시의 삶을 기호화된 이미지로 재현했다. 광고에서 넘쳐나는 원색으로 뒤덮인 시각이미지를 회화 속으로 끌어들인 팝아트는 도시를 입체적으로 재현했다기보다 평면 속에 뜬구름 같은 환영으로서 도시풍경을 포착한 것에 불과하다.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상품미학에 대한 순응과 굴복은 도시를 과잉된 소비문화의 환등 즉, 판타스마고리(phantasmagorie) 쯤으로 받아들인 결과인 것이다. 마침내 도시의 실체는 사라지고 그것의 이미지만 남게 된다. 풍요롭지만 허망한, 소비를 예찬하지만 물신만 가득한…







20세기 초반, 베냐민은 19세기 말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Georges Eugene Hausmann)에 의해 추진된 도시개조사업의 결과인 근대도시 파리를 연구하며 관통도로, 기념비적 건축물, 거대광장 등의 출현을 ‘공간의 판타스마고리’로, 금융자본과 결탁한 투기가 도시 재개발에서 표면화되는 것을 ‘시간의 판타스마고리’로 규정했다. 이 공간의 판타스마고리에 몸을 맡기는 존재가 바로 산책자(flâneur)이다. 베냐민이 제시한 산책자는 도시를 모티브로 작업하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제공하였으나 옥경래가 재현하고 있는 도시를 보면 그가 산책자가 아니라 관찰자로서 도시를 연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경래는 자신이 살고 있거나 여행한 도시를 장방형, 정방형, 원형의 기하학적 평면 위에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도시의 외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서 발견한 색채를 미니멀한 줄무늬로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도시의 특정한 풍경이나 도시를 평면 위에 구획해 놓은 지도와 같은 것조차 발견할 수는 없다. 화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계적으로 색칠된 띠에 불과하다. 이 기하학적 줄무늬는 그가 관찰한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옥경래가 경험하고 관찰한 도시의 색차트를 보면 런던을 나타내는 색채의 명도와 채도가 높은 반면 베를린과 캠브리지는 거의 무채색이다. 도시를 촬영한 사진과 나란히 놓고 보지 않으면 그의 줄무늬가 도시를 재현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고풍스런 건축과 현대의 디자인이 복합된 런던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도시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색채였다. 갈색의 건물과 그것을 마치 띠처럼 둘러싸고 있는 녹색의 지하철 안내판은 그의 작품에서 긴 색띠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석조건물로 둘러싸인 캠브리지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청회색의 색조였다. 반면에 그가 살고 있는 인천은 무채색을 기조로 하되 갈색과 노란색이 그 틈으로 슬쩍 끼어들고 있다. 붉은 색은 인천의 어느 언덕에 빼곡하게 들어선 개량주택의 지붕에서 발견한 것이며, 갈색은 구운 벽돌로 지은 집을 가리킨다. 그 속에 우리나라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통표지판의 노란색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옥경래는 도시의 이미지를 냉정하고 차가우며 중성적인 색띠로 환원시키고 있다. 나아가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하기 위해 재료도 알루미늄과 UV 잉크를 사용하며, 기법도 철저하게 공업적 과정을 따르고 있다. 수공의 흔적이 지워진 작품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처럼 깔끔하고 비인격적이다. 기계적 공정을 거쳐 표면에 안착된 색띠는 가지런하게 병렬되거나 혹은 사선으로 겹쳐지며 옵아트에서 볼 수 있는 시각적 일루전을 만들어내지만 그의 작품은 순수하게 시각적 효과를 추구한 옵아트와는 상관없다.







관람자에게 도시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인상을 설득하지 않는 차갑고 냉정한 작품이지만 옥경래의 작품은 도시공간에 대한 충실한 관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미국으로 망명한 후 제작했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를 상기해 보라. 그 작품에서 뉴욕의 어떤 풍경을 찾을 수 있는가. 그러나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마천루와 그 사이를 격자로 구획하고 있는 대로, 도로 위를 달리는 노란색 택시 등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처럼 몬드리안은 기하학적 추상을 통해 도시를 훌륭하게 재현하였던 것이다. 비록 인간과 그들이 꾸려가는 삶은 부재한다고 할지라도 이 색띠를 통해 각기 다른 색조를 지닌 도시를 읽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에서 투명하게 비워진 공간은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흰색의 여백과도 같다. 신지학에 심취했던 몬드리안이 이 여백을 통해 신성(神性)을 담고자 했다면 옥경래의 빈 공간은 단지 텅 빈 것이 아니라 조밀한 도시구조 속으로 침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흡사 밀림과도 같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시에 숨통을 열어주는 대기가 흐르는 공간이다. 그것을 나는 빛이 흐르는 공간이라고 보고 싶다.







옥경래의 작품에 나타나는 도시는 무채색인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도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도시풍경을 회색조의 풍경으로 재현했다면 우리는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작품의 의미를 확대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띠로만 재현된 도시에서 정서적 개입의 여지는 없다. 이 냉정함이 옥경래의 작품이 지닌 특징이자 매력이다. 주장하지도,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관찰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차가운 태도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작품의 간결한 구조와 맞물리며 우리로 하여금 도시의 외관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색채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