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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승과 제자

  • 조회수 1,179
  • 작성자 윤*기
  • 등록일 2007.08.30
어떤 스승과 제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야) 윤 상 기


벌써 한해의 절반이 자나가 버렸다. 이제 60고개를 넘고 보니 세월이 흐르는 게 아니라 날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운유수(行雲流水) 같은 세월이니, 무상한 인생이니 하는가 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담임선생님은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20살 총각 선생님이셨다. 항상 정장차림에 하얀 와이셔츠, 나비넥타이를 맨 선생님은 멋쟁이이셨다. 선생님은 문학에 관심이 많으셨고, 늘 손에는 시집이나 책이 들려 있었다.
그 당시 우리학급에는 17,8세 누님들이 같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선생님도 여러분 계셨다, 심심산골 멋쟁이 선생님은 알게 모르게 여자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셨다.

그해 6.25 상기 학예발표회가 있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6월산에 올라’라는 시를 낭송 하게했다. 그 후, 선생님과 나와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웬만한 심부름은 내가 도맡게 되었다. 선생님께 연정을 품은 아가씨들이 떡이며 식혜, 연서와 책이 나를 통해 배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입소문은 작은 시골에 금세 퍼지게 되었고, 마침내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고서야 조용해졌다.

간간히 친구들을 통해 들려오는 선생님의 소식은 5년간 초등학교에 계시다 대학에 진학하여 국문학을 전공하셨다고 했다. 그런 뒤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재일동포를 가르치는 중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근무하셨다. 서울로 다시 오셔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시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글을 쓰시기 위해 명예퇴직을 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어느 날, 동창회에 참석해서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수필집 한 권을 받게 되었다. 늘 글 속에서 사시던 선생님은 이순을 맞이하여 그동안 가슴속깊이 간직했던 ‘미처 못 다한 말’이란 수필집을 발간하셨다. 수필집에서 고향을 떠난 소년은 유랑민으로 떠돌다 집 앞의 개울소리와 텃논배미의 뜸부기 소리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고향을 회상하고 있었다.
한편의 글을 읽다가 나는 마치 전깃줄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초등학교시절, 내가 편지를 전해준 아가씨와 애절한 사랑의 사연이 소설 속 풍경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초가을 달빛아래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면 지나간 첫사랑 얼굴이 그립고, 산들바람 속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여인이 그립다는 사연이었다.

50대에 접어들어서야 선생님을 시골에서 뵐 기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제는 여자동창생 순이 이야기며 흩어져 사는 친구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꾸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분위기가 어색했던지, 너나 나나 똑같은 지천명이니 ‘야, 이제부터 형님이라고 불러라’ 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형님이란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 뒤 선생님은 소설을 창작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원래 문학에 소질이 많으신 분이시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친구들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부산 국제신문사 1억원 고료소설현상공모에 응모하여 당선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어린 시절 선생님께 받은 영향 때문에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쓰지 못하는 글은 내게 짝사랑이었을 뿐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가슴에 품고 마음으로 그렸지 실제로 행동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글은 내 몸속 가느다란 혈관 속에 희석되어 흐르는 엔도르핀처럼 끼가 남아 늘 나를 유혹했다. 문학도로서 꿈 많은 학창시절을 보냈건만, 빛바랜 교지에 쓰인 시 몇 편이 나의 전 재산으로 남았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내 나이 지천명을 넘어 이순이란 고개에 도달해서야 글방 문을 두드리게 했다. 40년간 나는 산업현장에서의 외도를 끝내고, 수필이란 본향을 찾게 되었다. 선생님 옆에 감히 설 수는 없는 왕초보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제자로서 나의 실체를 보여드리고 싶다. 선생님은 나를 이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분이기 때문이다. 수필창작이란 외길에 서있는 나, 그것만으로도 선생님은 흡족해 하시지 않을까?

이글을 쓰기 전 서울에 계신 선생님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상기야, 참 오랜만이다.”
다정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전주에 오시면 꼭 찾아주십시오.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모여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사제의 통화는 30여분이 지나서야 끝났다.

며칠 뒤 그동안 선생님이 집필하신 소설과 수필집이 집에 도착하였다. 책 속에 담겨진 선생님 마음을 읽으며 그 진한 제자사랑에 감사를 드렸다. 오늘밤 빛바랜 앨범을 들추며 사진 속 젊은 선생님과 옛날의 추억을 들추며 밤을 밝혔다. 흑백사진 속에서는 검정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멋쟁이 선생님과 내가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