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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창암(蒼巖)학술대회 보고

  • 조회수 1,558
  • 작성자 조*숙
  • 등록일 2007.10.24
창암이삼만선생서예술문화진흥회 제2회 창암(蒼巖)학술대회 보고
『蒼巖 李三晩 書藝學硏究』第二號

曺 仁 淑 (창암이삼만선생서예술문화진흥회 이사장)

2007년 9월 29일, 정읍사공원 청소년수련관 1층 녹두홀에서 창암이삼만선생서예술문화진흥회가 주최하는 제2회 『蒼巖 李三晩 書藝學硏究』에 관한 5편의 논문 발표와 ‘창암 논문 공모 당선작’ 1편이 소개되었다. 먼저 발표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조발표:
조인숙(원광디지털대) - 「창암 이삼만의 생애와 사상」
주제발표:
이성배(대전대) - 「창암 이삼만, 工拙을 벗어난 서예」
배옥영(원광대) - 「창암 이삼만의 哲學精神」
이동국(예술의 전당) - 「창암 서예를 어떻게 볼 것인가 - 18·19세기 조선서단에서의 창 암서예의 위치와 성격」
조민환(춘천교육대) - 「창암 이삼만 ‘流水體’의 老莊哲學的 考察」
창암 논문 공모 당선작:
박재복(중국 북경대 박사과정) - 「창암 이삼만의 『서결』에 대한 고찰 - 역대 서론과의 비교 를 중심으로」

조인숙 교수는 기조발표에서, 추사서예가 인위적이며 인공미의 아름다움을 대변한다면, 창암서예는 그 단계를 뛰어넘은 자연미의 극치로서 ‘무롱(舞弄)’의 경지로 끌어올려 ‘일운무적득필천연(逸韻無跡得筆天然)’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또한 창암서예로 인해 ‘동국진체’의 실체가 보다 확고하게 규명될 수 있었으며, ‘창암체’로서의 ‘동국진체의 완성’은 한국서예사의 한 ‘양식’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창암예술의 결정체로서, 당시 사회의 이념적 제약을 딛고 과감한 창신으로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며 살아 움직이는 미학적 언어 위에서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창암서예는 한국서예술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고 밝혔다.
본론에서는 그동안 근거 없이 왜곡된 사실들을 조목조목 밝혔다. 창암의 출생지가 ‘정읍 부무실’이었음에도 1967년 이후 전주의 한·두 명의 인사들이 ‘전주가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한 마디로 인해 계속 인용하는 바람에 잠시 혼란을 빚었다는 점과, 아울러 창암의 성명(姓名) 앞에 쓰인 ‘全州人’ 또는 ‘完山人’은 ‘전주 사람’ 혹은 ‘완산 사람’이 아니라 ‘본관(本貫)’을 의미한 것인데, 이로 인한 ‘전주사람’으로의 오해로 인해서 창암의 출생지를 전주로 잘 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완산(完山)’은 창암의 호가 아니고 본관(本貫)임을 분명히 했다.
창암이 일생 동안 세 가지 늦었다고 한 것은, 항간에 떠도는 학문·결혼·후손이 늦은 것이 아니라, 첫째 수학, 둘째 서예교육(出仕대신), 셋째 저술(서예 이론 정립 및 작품)로서 조선 선비들이 걸어야 할 일생의 길이었음을 처음으로 바로잡아 확인했다.
창암은 서(書)를 연마할 때는 탁본 내지 각본(刻本)으로 된 서첩보다 묵첩(墨帖)으로 임서할 것을 권했는데 비학(碑學)의 경우, 서자(書者)와 각자(刻者)가 달라 원전의 훼손에서 오는 오류의 심각성, 또한 설사 원전을 충실히 비(碑)에 새길지라도 원전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을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오세창이 「근역서화징」에서 소개한 창암에 대한 글을 해석함에 있어서, 창암은 벼루 세 개를 맞창내고 종이가 귀한 시절에 베를 빨아 또 쓰고 또 쓸 정도로 병석에서도 하루 천자의 글을 썼다고 소개하는 글에서, 그만큼 열심히 썼다는 것인데, ‘오죽 가난하여 베를 빨아 썼겠는가?’로 오해하여, 당시 창암이 서예에 관련된 값비싼 중국 진적(眞籍)을 구하기 위해 조선 팔도를 누볐고 교육을 위해서는 많은 사비를 들여서라도 판본을 제작하는 열의를 보였다는 점에서, 또한 창암 자신이나 후학들이 매끄러운 종이보다 필력을 기르기에 훨씬 효과적인 베를 일부러 사용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불어 당시 사대부가에서도 귀한 종이를 아껴 쓰느라 편지 한 장에도 사방으로 남은 여백까지 빼곡히 사용했다는 시대 상황을 짐작했더라면, 유홍준의 폄하(貶下)처럼, 창암을 감히 궁티 나는 시골 촌부였다고 비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최완수는 2002년 「화동서법인행서」에서, 창암이 후학을 위해 전주에서 사비를 들여 오늘 날의 법첩과 같은 판본을 제작한 사실 하나만으로 그 어떠한 근거도 없이 ‘사자관(寫字官: 목판 제작 때 글씨를 새기는 직업)’ 노릇을 했다고 창암의 직업까지 일시에 급조해 버리는 세태를 좌시(坐視)할 수만은 없었다고 밝혔다. 더불어서 일선 사가(史家)들이나 미학적 견지의 입장을 피력할 때는 좀 더 사려깊은 연구가 된 뒤에 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창암은 생(生)을 다하는 그날까지 누구를 만나든 올바른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한(漢)·위(魏)의 고법(古法)에 맞는 서(書)를 강조하며 그로부터 수렴한 서예론을 중심으로 일생 자신의 체험과 궁구(窮究)를 가미한 서예술 창작의 방법론적 서론을 차분하게 펼쳤다고 논증하였다. 실제로 창암은 그가 돌아가기 1·2년 전까지 80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그의 출생지 정읍 부무실을 찾아 30여 년 전에 헤어진 고향 친구와 하룻밤의 회포를 풀며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듯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에게마저 올바른 서법에 대한 염려를 놓지 않았었다고 밝혔다.
창암의 업적은 현대 서가들에게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정신적·물질적·학문적 귀감이 되는 것으로, 특히 고법 존숭의 유가 철학적 강력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예관이 오늘날 초시공자(超時空者)로서의 좌우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은, 창암이 말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배어나오는 서조어자연(書肇於自然)·대교약졸(大巧若拙)·자적기적(自適其適)·천리유행(天理流行)·겸양지덕(謙讓之德)의 노장철학적 사유가 함유되어 순자연(順自然)에 임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의 예술정신은 동국진체의 완성과 더불어 미래 한국서예에 대한 발전 가능성으로의 담론을 제시해 주었다고 밝혔다.
주제 발표에서 첫 번째로 발표한 이성배 교수는 「창암 이삼만, 工拙을 벗어난 서예」를 통해서, 한국서예의 정체성과 창암 서예와의 접목으로 이성과 감성이라는 접근 방식을 처음 시도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기존의 서예자료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폭넓은 이해를 위한 방법이기에 창암에 대한 이해도 이성과 감성의 시각에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방법론적 제시에 주목했다. 삼국시대의 감성서예와 통일신라의 이성서예, 고려시대의 감성서예보다는 이성서예,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의 이성서예의 흐름 속에서, 창암은 조선 말기의 감성서예와 이성서예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추구로 우졸(愚拙)의 미감을 추구했다고 논증했다. 작가와 작품은 작가의 감성과 이성의 상호 교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만큼 서예작품을 이성과 감성으로 확연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공감하면서도 창암서예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론적 선택이었음에, 매우 창조적이며 과감한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배옥영 교수는 「창암 이삼만의 철학정신」에서 」창암이 『창암묵적』의 ‘臨夏禹篆’을 통해 요순(堯舜) 정신을 지향하던 육경 정신의 영향을 그대로 심미의식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창암은 선진유학에 근간을 둔 육경지학(六經之學)의 古道에 대한 깊은 뜻을 바탕으로 서예론·서예교육·금석학·실학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이동국 학예사는 「창암 서예를 어떻게 볼 것인가 - 18.19세기 조선서단에서의 창암 서예의 위치와 성격」에서 창암서예의 위치를 역사적 연원의 추리 수용과 동국진체의 맥락에서 찾고자 했고, 옥동으로부터 이어져 온 동국진체의 흐름을 횡적 구조와 더불어 다층적 구조를 지닌 종적 구조로 파악한 점에서 종래와 다른 새로운 방법론적 논증을 한 점에서 진일보한 논거를 제시했다. 또한 창암과 추사와의 비교 우위를 논하기 전에, 청대의 학문 풍토를 존중했던 추사나 조선의 동국진체적 서예미를 추구했던 창암과의 대비는 단순히 이분법적이기보다는 고법의 본질을 현실로 끌어들여 당시의 타락한 서예현실을 개혁하고 혁신시킬 수 있을까 하는 두 사람의 고민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민환 교수는 「창암 이삼만 ‘유수체의’ 노장철학적 고찰」을 통해, 창암의 서예세계는 노장의 우(愚)의 철학을 근간으로 하면서 획에서의 연미함을 경계하며 창경미와 졸박미 그리고 양강지미(陽剛之美)를 숭상하였다는 점에서 유가보다 도가의 색채가 더욱 강하다고 밝혔다.
한편 제1회 창암 논문 공모에 당선된 중국 북경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박재복 선생은 현지 사정에 의해 행사 당일 직접 참석·발표하지는 못하고 논문 배부로 대신했는데 「창암 이삼만의 『서결』에 대한 고찰 - 역대 서론과의 비교를 중심으로」에서, 창암이 1840년(71세)에 쓴 서결 『기오이적(機奧異跡)』을 중심으로, 총론·본문(영자팔법, 결구법, 집필법)과 결어, 종이와 붓에 대한 논의를 거친 다음 역대 서론과 창암의 여러 작품에 남아있는 서론 내용을 비교 분석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해 주었다. 이는 지금까지 창암의 여러 작품에 담긴 역대 서가들과 서론에 대한 함축된 의미를 풀어내어, 창암의 방대한 독서량과 역대 서예자료 분석력을 실감케 했으며, 또한 그동안 포괄적이었던 창암 서론의 연원을 밝히기 위해 역대 중국과 조선 서가들이 남긴 원전을 일일이 도표로 제시하여 보다 정확한 창암 서론의 근거와 창암 서예의 궤적을 낱낱이 밝혀냈다는데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던 창암 관련 연구 자료로서도 큰 몫을 차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불어 창암은 역대 서론을 토대로 자연에서 얻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독특한 서론을 전개하여 초학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연구 결과를 밝혔다.
이상의 발표에 대하여 각각 김수천 교수(원광대)·김광욱 교수(계명대)·이은혁 교수(전주대)·여태명 교수(원광대)의 진지한 논평이 이루어졌으며, 종합토론은 김익두 교수(전북대)가 좌장을 맡아 진행하였다. 지난 해 제1회 창암학술대회 때, 창암 연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는 학계의 격려에 이어, 이번 제2회 창암학술대회는 보다 다양한 연구 방법과 심층 연구로 여느 학술 대회에서 보기 드믄 학술대회의 신바람을 불러 일으켰다는 참석자들의 평가였다. 계속해서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를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