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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상설공연 풍류한마당 "진도씻김굿"

  • 조회수 1,273
  • 작성자 진*라
  • 등록일 2007.11.16
금요상설공연 풍류한마당 "진도씻김굿"
□ 공 연 명 : 금요상설공연 "풍류한마당"
□ 기 간 : 2007. 11. 23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 장 소 :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
□ 주 최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 후 원 : 문화재청
□ 관 람 료 : 무 료(미리 전화예약하셔야 입장가능합니다)
□ 예약/문의: 02)3011-2178~9 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공연전시팀
□ 오시는길 : 2호선 선릉역 8번 출구에서 선정릉, 라마다호텔방면으로 도보 7~8분
7호선 강남구청역 1번출구에서 도보 10분

● 공연소개
망자(죽은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했던 맺혀있는 한을 풀어주고 깨끗이 씻겨 극락왕생을 하도록 기원하는 굿을 말하며 풍악에 맞추어 춤과 노래로써 신에게 빌며 상복차림으로 망자의 후손으로 하여금 망자와 접하게 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진도씻김굿의 음악은 우리 민속음악의 대표적이기도 하다.

밤을 세워 계속되는 씻김굿은 길딱음 대목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끊어질 듯 애절하게 이어지는 곡은 듣는 이의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에 눈물을 내지 않고는 보지 못한다. 진도씻김굿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로 1980년 11월 17일 문공부의 지정을 받아 원형보존과 전승사업에 주력하고 있고, 유럽에서 열린 세계민속축제에서 금상을 받은 바 있고, 유럽 7개국과 미국, 일본 등에서 초청되어 수차 공연했으며 해마다 중앙 및 지방에서 발표 공연을 갖는다.

● 공연순서
1. 조가망석
2. 마마굿
3. 제석굿 - 산사람의 명과 복을 기원하는 굿
4. 고풀이 - 이승에서 풀지 못한 채 저승으로 간 한과 원한을 의미하는 '고’를 차일의 기둥에 묶어 놓았다가 이를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영혼을 달래는 대목의 굿(막혀있는 ‘고’를 풀어준다)
5. 영돈말이 - 시신을 뜻하는 영돈을 마는 대목이다.
(영을 목욕시킨다) 망자의 옷을 돗자리에 펼쳐놓고 이를 둘둘말아 일곱매듭을 묶어세운다.
6. 넋올리기
7. 길닦기 - 저 세상으로 천도한다
8. 종천

● [춤과 그들]박병천이 부르는 하늘과 소통하는 지상의 만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를 쓴 이윤기는 신화를 말랑말랑하게 주물러 빚은 역사 이야기로 해석했다. 그리고 못다한 신화는 무당이 풀어낸다고 했다. 무당. 신화속 하늘과 역사속 사람을 잇는 존재. 박병천(75·‘진도씻김굿’ 인간문화재)이 그렇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박병천의 소리와 장단. 그가 부르는 무가(巫歌)는 하늘과 소통하는 지상의 만가(輓歌)이다. 망자를 불러내는 굿판의 핵심이다.

요즘 그는 경주 개인병원에서 투병생활 중이다. 수년전 간질환을 앓았는데 요즘 몸이 다시 좋지 않다. 한달 전 기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그는 며칠 후 있을 공연 이야기를 하며 들떠 있었다. 그때는 왼쪽 볼이 많이 부어 치과치료를 받고 있다며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당시에도 간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사별한 아내의 제사를 앞두고 자녀들과 연락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가리지 않았는데, 지난 9월13일 문화관광부 지정 국악명가 공연을 마친 후 요양차 입원했다.

입원전 자신의 연습실에서 기자를 맞은 박병천은 기력이 예전만 못했지만 격의없는 푸근함은 여전했다. 서울 송파에서 미아리와 약수동을 거쳐 종로3가에 마련한 연습실 한 켠의 창호지문을 열고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3년 전에 몸도 안 좋고 목포 대불대 석좌교수로 초빙도 받고 혀서… 일단 낙향허야 쓰겄다 싶어 내려갔는디, 아! 불치병 걸렸다고 소문이 나요. 도저히 안되겠어서 서울로 안왔소!”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객원교수와 전통예술원 전임 객원교수로 출강하던 그는 목포 대불대의 전통연희과 신설과 함께 석좌교수 겸 학과장으로 임명됐다. “여간 바쁜 거이 아녀. 이빨 아프고 몸이 아파도 춤춥니다. 이거 놓아버리면 내 인생은 다 가는 거잉게. 그동안 여그저그에다 하고픈 말 다했고 또하고 또하고 혀서 새로운 내용이 없는디! 독자들이 ‘좋은 기사 나왔구나’ 하는 내용을 넣어야 할 거인디!”

얼굴만 보면 어디 예인인가. 그런데 마음에 춤가락을 담고 장단에 몸을 맡기면 징도 녹여내는 ‘쟁이’가 된다. 9시간 동안 씻김굿을 이끌어가면서도 몸짓 하나 소리 한 장단마다 절절함과 위엄이 서려 있다.

# 22대를 잇는 무업가의 용사

박병천은 진도 신청의 당장인 박범준(24세에 작고)과 진도 최고무당 김소심(87세에 작고·남편보다 한 살 아래)의 차남으로 진도 지산면에서 태어났다. 장남은 박병수(56세 작고). 그 사이에 누이 2명이 있고 박병천과 6살 차이 여동생 박화신이 있다. 무업은 2남3녀중 박병천만 잇고 있다.

박병천의 예능은 절로 나온 게 아니다. 작은할아버지 박종기(1879~1941)는 대금산조 창시자. 1935년 ‘오케레코드사’에서 3장의 대금산조 음반을 냈고 미발견된 일부 대금산조 가락을 장남 박환영 부산대교수(50·대금연주자)가 2000년 완전 복원했다. 당고모 박선래도 무업을 이었다. 윗대 할아버지들은 도지사급인 통정대부를 지냈다. 무당이었지만 궁궐에서 잔치가 열릴 때 소리꾼으로 뽑혀갔고, 왕이 할아버지의 노래 소리에 반해 즉석에서 통정대부를 내려 2대 연속 통정대부를 지냈다.

박병천의 부모님은 무업을 이었기에 생활이 괜찮았다. 박병천이 목포상업중학교(목포상고 전신·29기 졸업생)로 유학간 배경도 무업 덕이었다. 미국 유학보다 더 힘든 게 섬에서 육지로의 유학이라고 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목포에 해양상선고교(현 목포해양대학)가 신설됐어요. 그 학교 교장이 우리 중학 선배인데, 자꾸 우덜 보고 상선고로 진학하라는 거예요. 사실 일제 강점기에 세운 목중을 두고 누가 신설된 학교로 갑니까. 교장이 ‘우리 학교 모자를 3일만 써달라’고 하소연하데요. 결국 목포상선고를 2년6개월 다니다 그만두었죠. 그런데 재작년에 명예졸업장이 옵디다. 그때는 학교 제대로 안가도 대학갔그덩. 그래, 목포상선전문학교로 진학했지. 내가 3기인데 2년 댕겼어요. 지금은 해양대학이 됐는데. 그때만 해도 부모님이 ‘우리 새끼들은 (무업 잇지 말고) 다른 것을 했으면’ 하셨어요. 무당은 천대받으니까요.”

사춘기의 병천은 부모가 멸시당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며 무업을 피해 목상중 권투부에 등록, 사각의 링에 올랐다. 목상 브래스밴드 활동도 했다. 악기를 불다보니 학교 응원단장은 으레 그의 몫. 고향에 갈 때마다 동네에 난리가 났다. 또래들이 남자 한복 입고 다닐 때 백바지에 빨간 줄 친 응원복 입고 나팔 불며 다니는 그를 여자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인물까지 좋았다. 박병천은 여자들을 피해 다니느라 수난아닌 수난을 당하곤 했다.

# 세습무를 공연 무대에 올리다

무업을 피해 밴드부와 권투부에서 활동하고 대학도 다녔다. 미곡상도 하고 객주노릇도 했다. 그래도 따라 붙는 운명의 가업. 피할 길 없었다. 굿의 황제가 됐다. 70년대에는 집안에서 이어온 진도만의 ‘남도 들노래’ ‘강강수월래’ ‘다시래기’를 다듬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등을 줄줄이 탔다. 77년에는 ‘진도 다시래기’(출상 전날 밤 초상집에서 벌이는 민속놀이)를 발굴, 서울 YMCA 강당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78년부터는 ‘진도씻김굿’을 공연했다. 무대에 서본 적이 한번도 없는 무당과 악사들을 모아 연습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런데 무엇보다 힘든 건 부모가 세습무당임을 밝히기 꺼리는 자손들의 원성이었다.

“피할 수 없어 나선 길. 세습무의 전통을 고스란히 잇고 싶었습니다. 굿판을 무대로 옮겨오면서 느끼는 게, 우리 것은 음양이치에 안맞는 게 없다는 거예요.”

박병천은 음양의 이치를 유난히 중시했다. 아내도 무당이었으니 음양의 동양철학을 논하던 부부의 열기를 짐작하겠다. 8년 아래 아내 정숙자는 2003년 음력 6월14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도의 맥따라 내림해 온 가업. 속일 순 없었다. 진도 박씨가문에 대한 박병천의 분석이다. “악기 중 왕은 징이다. 소리 중의 소리가 징소리다. 진도에 징혈이 있는데, 우리 선산이 바로 징혈이다. 고향에선 ‘쟁혈’이라 한다. 그 때문에 우리 섬에선 예인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온다. 우리 집 여자들도 치마폭따라 예인의 대를 잇고 있다. 마당극의 여왕으로 꼽히는 중앙대 김성녀 교수가 내 조카다. 김성녀 모친이 내 사촌 박옥진이고 그 이모가 박보화다. 독일의 바흐집안이 7대를 이어가며 음악을 했는데, 우리 집안은 무업 24대를 잇고 있다. 지난달 국악 명가로 지정돼 기념공연을 한 배경도 문화관광부에서 조사한 결과다.”

박병천도 쟁혈의 산물이다. 춤추고 나면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냐’고 반문한다. 박병천의 답이 명문이다. “묻는 이에게 ‘내가 금방 한 게 춤으로 보입니까’ 하고 되묻죠. 그이가 ‘춤이 아니냐’고 다시 물으면 ‘북의 소리는 인간과 신의 중간 역할을 하는 겁니다’ 하죠. 큰 절에 가면 큰 북이 있잖아요. 그게 그저 북의 대합주가 아니고 신께 올리는 인간의 통곡인 겁니다. 그래서 내가 평생동안 마음으로 가난하게 삽니다. 내가 죄없고 여유있어야 남을 위해 빌어줄 수 있어요. 내가 죄짓고 살면 남의 행복을 못빌어줍니다. 굿 자체가 남을 잘되게 빌어주는 것 아닌가요!”

# 아직도 못다한 노래, 무가

“인생 살며 육신이 늙어도 악·가·무가 겸해지면 집이 생깁니다. 그게 소위 집 가(家)예요. 집이 생기면 남을 빌어주는 의식이 생기고요. 기(氣)와 예(藝)로만 가면 미적(美的) 구성밖에 안됩니다. 춤춘다고 오른손 먼저, 왼손 먼저를 지키며 하는 게 아니라 악·가·무를 마음대로 통달했을 때 무가가 됩니다. 나는 아직 못했어요. 이 세상에서 못하고 눈감을 겁니다.”

하나를 통틀어 보는 눈이 있고 무언가 이루려면 악·가·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악은 덮어놓고 노래가 아니라는 것. 악은 자동차가 지나가고 낙엽지는 소리라도 어우러지면 음악이라고 했다. 무(춤)도 마찬가지. 살풀이 수건 들고 분위기 잡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노인이 바람불면 쓰러질 것 같은 노송처럼 추어도 깨달음이 있었다면 그게 춤이다. 그런 이치를 모아 하나의 집이 생기면 그게 바로 ‘예술가’이다.

지금 죽어도 일을 이루었으니 됐다고 했다. 사실 한 사람이 문화재 한 종목도 지정받기 힘든데, 그는 국가지정 받은 종목이 4개이고 지방문화재가 3개다.

타고난 무업의 후손. 소리·춤·풍물·굿·비나리… 엇중모리의 비나리 한줄만 해도 박수다. 그저 소리한다고 박수하는 게 아니고 그에게 빨려 들어 박수한다.

“늙은 사람 죽지 말고 젊은 사람 늙지 말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지 말고 병든 사람 나으시고…” 비는 소리가 낭랑하다.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남을 위해 빌어줄 텐데….” 해마다 만나는 친구들이 줄어든다. 저마다 출생하며 당기는 화살시위. 누구의 화살이 더 멀리 갔나 조금 갔나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경주 병실에서 가을을 맞은 박병천은 저들의 복을 빌기 위해 자신의 화살이 멀리 날아가길 바랄 뿐이다. 다른 욕심이 없다.


- 2007년 10월 18일 경향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