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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디지털 세상에서 ‘하드코어’ 아날로그를 외치다 - ‘이머시브 씨어터’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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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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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상에서 ‘하드코어’ 아날로그를 외치다 - ‘이머시브 씨어터’의 역습



대학로 연극 리뷰 2
로드씨어터 대학로 2




글/유주현 기자(중앙SUNDAY 공연담당)




로드씨어터 대학로 2 공연사진



마로니에 공원 한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나레이션을 적당히 한귀로 흘리며 먼산을 보고 있자니, 살짝 특별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시야로 뛰어 들어온다. 즐겁게 웨딩촬영을 하고 있는 중년 커플,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 코러스, 2인용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젊은 커플들이다.



로드씨어터 대학로 2 공연사진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저들은 어떤 결혼식을 올릴까. 코러스는 저쪽에서 준비중인 야외무대에 서는 걸까. 자전거 커플은 신혼 부부일까. 혹시 이 공연의 퍼포머인가 싶기도 한데 아닐 수도 있다. 평일 오후 거리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지만 대학로이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제작한 지역활용 관객참여형 공연 ‘로드씨어터 대학로 2’의 시작이다.

요즘 공연계의 화두를 꼽으라면 단연 ‘관객참여’다. 요즘 ‘핫’하다는 공연들은 너도나도 ‘관객참여’를 내세운다. 관객에게 말을 걸고 호응을 유도하거나, 관객 한두명을 무대에 잠시 세우는 정도는 이제 ‘관객참여’ 축에도 못 낀다. 아예 즉석에서 관객의 제안을 접수해 공연을 완성하거나(뮤지컬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사회적인 문제를 놓고 관객과 열띤 토론을 벌이거나(토머스 오스터마이어의 연극 ‘민중의 적’), 공연장에서 대본을 처음 받아본 배우가 혼자서 관객의 도움을 받아 무대를 완성해 가는(‘하얀 토끼 빨간 토끼’)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로드씨어터 대학로 2 공연사진



가장 심화된 형태가 ‘로드씨어터 대학로’와 같은 ‘이머시브 씨어터(Immersive theater)’다. 이머시브 씨어터란 액자형 무대를 객석에 앉아 구경하는 통상적인 관람 방식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몸을 움직여 아예 액자 속으로 들어가는 형태다. 요즘 뉴욕에서 가장 핫한 연극이라는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대표적이다. 뉴욕 첼시의 5층 건물 전체를 호텔로 꾸민 공간에서 관객이 가면을 쓰고 100개 객실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히치콕의 스릴러를 입힌 무언극 퍼포먼스에 참여하면서 자기만의 공연을 스스로 완성하는 컨셉트다.

‘슬립 노 모어’는 2011년 원래 한달 예정으로 시작되었으나 폭발적인 반응에 오픈런으로 연장됐고, 이제 뉴욕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로 꼽히는 추세다. 상해에도 진출해 아시아 관객을 흡수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공연회차가 많은 뉴욕보다 더 매진열기가 뜨거울 정도다. ‘슬립 노 모어’가 대박을 치자 비슷한 형태의 공연이 속속 생겨나면서 이제 이머시브 씨어터는 대세가 됐다. 장소 특정형 이머시브 전문 극단인 'Third Rail Project'는 정신병원으로 쓰이던 건물을 탐험하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보는 ‘Then She Fell', 70년대 리조트로 초대받아 그시대 젊은이들의 낭만을 맛보는 ’The Grand Paradise'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중제)지금 공연계 화두는 ‘관객참여’



로드씨어터 대학로 2 공연사진



한국에서는 지난해 말 문화예술위원회가 제작한 ‘로드씨어터 대학로’가 ‘이머시브 씨어터’를 표방한 첫 공연이었다. 2012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된 호주극단 ‘원 스텝 앳 어 타임 라이크 디스’의 장소 특정 공연 ‘거리에서’와 비슷한 컨셉의 ‘지역활용형 관객참여 공연’으로 개발됐다. ‘거리에서’가 mp3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과 음악을 들으며 남산 일대 골목골목을 산책하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듯, ‘로드씨어터 대학로’는 스마트폰 앱의 안내로 연극인들의 터전인 대학로 곳곳을 깊숙이 체험하게 했다.



로드씨어터 대학로 2 공연사진



지난 6월 공연된 ‘씨어터 RPG 1.7-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도 문화예술위원회가 제작한 ‘백스테이지 투어형 관객참여 공연’이었다. 2013년 마로니에 축제에서 초연된 ‘씨어터 RPG’는 연극 장르에 이동형 극장 투어와 롤플레잉 게임을 접목해 앙코르 때마다 게임 업그레이드처럼 버전 1.0부터 진화 중이다. 관객은 대학로 예술극장 지하부터 옥상까지, 분장실부터 사무실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연극과 게임의 일부가 된다. 지난 9월엔 한국형 창작가무극을 만드는 서울예술단도 신작 ‘꾿빠이 이상’에서 가면을 쓴 관객들이 배우들과 경계없이 섞이는 순간들로 이머시브 형식을 시도했다.

이제 공연을 보며 스토리에 빠져들고 싶다, 배우에게 몰입연기를 보여달라 요구하던 시대는 지났다. 영어교육의 슬로건인 ‘이머젼 방식’처럼, 공연계에서도 관객이 스스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가 화두가 됐다. ‘슬립 노 모어’의 경우 20명의 배우 중 누군가를 골라 100개의 방을 자유롭게 따라다닐 수 있기에 ‘스토리를 다 이해하려면 30번쯤 봐야한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이 공연의 목적은 스토리텔링이 아니며 ‘맥베스’ 스토리가 궁금해 이 공연장에 가는 사람도 결코 없다. 늘 바라만 보던 무대 속으로 들어가 멀기만 한 존재였던 배우들 틈에서 함께 호흡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느끼기 위해 이 특별한 공연장을 찾는다. 일상에서 자아를 분리해 자신도 몰랐던 또 다른 자아와 만나는 시간인 것이다.



영화 옥자



지난 여름 봉준호 감독의 ‘옥자’ 넷플릭스 동시 개봉과 함께 이제 최신영화까지 안방에서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이런 세상은 사람들에게 여가시간을 어떻게 즐겨야할지 고민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옥자’를 제작한 넷플릭스는 전세계 1억 회원을 대상으로 수집한 빅데이터로 개인 취향을 파악해 내가 봐야할 영화, 드라마까지 꾸준히 추천해준다.

디지털과 인공지능, 가상현실의 지배로 사람들은 점점 자기 신체 감각을 이용해 경험하는 일이 없어진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온갖 첨단 볼거리·즐길거리에 밀려 공연계도 위기를 맞았고, ‘이머시브 씨어터’의 등장은 궁지에 몰린 공연계의 역습에 다름 아니다. 어차피 아날로그일 수밖에 없는 게 공연이라면, 디지털 컨텐츠와 어설프게 경쟁할게 아니라 아예 확실히 차별화된 ‘하드코어 아날로그’ 전략을 취해 제3의 시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머시브 씨어터’의 역습은 올해 공연계 또 다른 화두로 떠오른 ‘생중계’의 유행과 정반대인 듯 보이지만 사실 ‘공연계 생존 전략’이라는 같은 맥락에 있다. 2006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메트: 라이브 인 HD’로 시작된 생중계가 큰 호응을 얻자 2009년 영국 국립극장의 ‘NT라이브’가 전세계에 서비스를 시작했고, 이제 세계 메이저 오페라극장들이 거의 생중계 마케팅에 나서는 추세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이 조심스럽게 시작했지만 올해는 대세가 됐다. 각종 뮤지컬 하이라이트 프레스콜 생중계는 기본이고, 야외오페라 ‘동백꽃 아가씨’, 창극 ‘산불’ 등 공연계 대형 화제작들이 앞다퉈 전막 생중계에 나서고 있다. 창작산실도 지난해 6개 작품에서 올해는 11개 작품 생중계로 확대 편성했다.

생중계가 공연예술만의 특징인 일회성과 현장성을 훼손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첨단 영상 테크놀로지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발달로 궁지에 몰린 공연업계가 새로운 관객을 개발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생중계 조회수가 높아지고 공연영상화 사업이 흥할 뿐, 이런 단순한 노출 확대 방식으로는 게을러진 관객을 공연장으로 유도하기 어렵다. ‘메트: 라이브 인 HD’가 메트 오페라 전체 수입의 1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성장했지만, 오페라극장 객석점유율은 점점 줄고 있는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중제)놀이하듯 즐기며 감동까지 원해



로드씨어터 대학로 2 공연사진



지난해 증강현실게임 ‘포켓몬고’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현실의 공간에 애니메이션 캐릭터라는 판타지를 심어놓은 놀이에 애어른할 것 없이 열중했던 건 요즘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는 ‘놀이’에 절실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체험형 콘텐트인 ‘방탈출’ 카페가 뜨는 것도 그래서다. 이머시브 공연이 관객에게 티켓 대신 놀이동산 입장하듯 손목에 티켓을 채워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시간 동안 꼼짝 못하고 자리에 갇혀 가공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만이 공연은 아닌 것이다.



로드씨어터 대학로 2 공연사진



하지만 ‘슬립 노 모어’의 전체 스토리가 궁금해 회전문을 도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공연에서 서사를 찾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서사를 무시하고 개념만 내세운 공연은 밀도와 완성도 면에서 부족하기 쉽다. 색다른 재미는 있을지언정 감동은 주지 못하는 것이다.

‘로드씨어터 대학로 2’가 극복한 것이 바로 이 감동 부분이다. 공연은 배우 이희준, 박진주의 내레이션과 동물원의 ‘혜화동’등의 음악을 들으며 마로니에 공원을 출발해 서울대병원 안 경모궁, 대명거리, 동숭3길 주택가 등을 거니는 1부와 극장에 모이는 2부로 진행된다. 두 남녀의 아스라한 사랑의 추억을 따라 대학로 곳곳을 누비다 보면 이 거리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한 독특한 느낌을 받는다. 대학로라는 공간이 무대고 나는 배우가 되었달까. 산책을 끝내고 극장에 모이니 거리에서 스쳐 지난 사람들이 하나둘 무대로 올라온다.



영화 옥자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상주, 손녀의 휠체어를 밀고 지나던 할머니, 커플자전거를 타고 출몰하던 신혼부부, 주택가에서 화분에 물을 주던 여인. 모두 배우가 아니라 배우의 꿈을 품은, 관객과 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 구름 위의 존재인 프로 배우가 아니라 어디서나 흔히 만날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진솔한 사연을 이야기할 때, ‘이머시브 씨어터’의 형식과 내용이 완벽히 일치하는 짜릿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어차피 공연이라는 놀이의 주인은 관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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