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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느슨한 아바이, 우리들의 흔들리는 시간 - 바이칼 노마딕 레지던시

  • 조회수 5726
  • 등록일 201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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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아바이, 우리들의 흔들리는 시간 - 바이칼 노마딕 레지던시
글 : 김지연(바이칼 노마딕 레지던시 기획자)

바이칼 호수를 수식하는 표현들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깊다. 가장 크다. 가장 차갑다. 가장 깨끗하다. 가장 오래 됐다. 1천 5백여 종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생명체들이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채 2천 5백만 년의 세월을 살면서 진화해 온 진화 박물관. 그래서 ‘또 하나의 지구’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성스러운 호수. 영적 기운이 가득한 샤먼의 호수 등. 바이칼에 대한 이런 설명들은 바이칼 호수의 존재감과 신비감을 부각시켰다. 한편, 호수 일대는 ‘세계 인류의 삶과 문명에 가장 역동적인 변화의 틀과 계기를 마련해 왔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의 발원지이자 활동 거점이었기 때문에 성스러운 존재가치를 지닌다고도 했다. 기가 센 곳이라 세계 곳곳의 샤먼들이 찾아와 의식을 치루기도 하고, 다양한 전설과 민담이 전해 내려와 이야기가 풍성한 곳이라고도 했다. 이곳을 한민족의 시원으로 보는 이들도 있으니 우리 민족에게도 특별한 장소다


이 신비로운 곳에 닿기 위해, 바이칼을 ‘글’로 배우는 과정에서 ‘아바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 ‘아바이’는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살고 있는 부리야트족의 단어로, 우리와 유사하게 ‘선조, 아저씨, 아버지’ 등을 뜻한다. 그 뜻 자체가 이미 ‘선조’를 지시하고 있기도 했지만, 과거, 현재의 (어쩌면, 그저 ‘우리’일지도 모를) 그들과, 역시 과거, 현재의 우리가 모두 사용하고 있는 단어라는 측면에서 ‘아바이’는 조상, 역사, 전통, 권력, 제도, 공동체, 이주와 정주 등의 의미를 은유하기에 적절해 보였다. 백 년도 못 사는 인간 입장에서는 거의 무한과 다를 바 없는 시간을 품고 있는 바이칼이 무대인 레지던시라면, 그 시공에 깃든 인간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장소를 옮겨가며 전달한 가치, 태도, 관계 등을 더듬어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없이 오래되고 거대한 바이칼 호수의 심오한 존재감이나, ‘아바이’를 통해 은유하고 싶었던 개념들이 전하는 무게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국가나 민족, 전통, 역사 등의 단어가 우리 일상 속에서 옛날만큼 막강하고도 절대적인 강제력을 발휘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이 의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과거에 비해 느슨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에게 ‘아바이’의 존재감은 이미 어느 정도 가벼워진 것 같았고 가벼워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여기에 다가가는 방식도 어딘가 유연하고, 느긋한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레지던시의 주제는 ‘느슨한 아바이’가 되었다.


4명의 작가 김서령, 박병래, 전진경, 조소희가 이 레지던시를 함께 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이르쿠츠크주와 본격적인 교류를 전개하기 위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송혜진 위원과 담당 부장이 동행했다. 그리고 이번 레지던시의 전체 일정을 기획한 비플러스픽처스의 정성훈 대표가 우리의 일정을 지휘하면서, 동행한 권미라, 김현경 학생들과 함께 작가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이들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죄로, 기꺼이 작가들의 퍼포먼스 촬영 스태프가 되어 주기도 했다.


출발을 앞두고 작가들과 몇 차례 회의를 가졌지만, 그들은 바이칼에서 정확하게 무엇을 할 것인지 확언하기를 망설였다. 미지의 공간에서 낯설음을 그대로 맞닥뜨리고, 그 상황이 야기할 불안한 긴장감을 즐기면서 무엇인가를 풀어가고 싶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치밀한 계획은 오히려 작가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계획 없이 떠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우리 일행에게 가장 어울리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비행기, 기차, 자동차, 배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통해 이동했다.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현지 통역과 함께 3박 4일 일정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불편하다는 생각에 빠져들기에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시베리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시간을 거슬러 달리는 기차 안에서 신체의 시간과 제도의 시간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 바람에 우리는 좀처럼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나왔던 송혜진 위원의 ‘요술가방’은 바이칼 호수만큼 신비로웠다. 우리는 기차에서의 시간을 꽤 즐기고 있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뒤 알혼 섬에서 일주일을 함께 할 러시아 작가들을 만났다. 다음 날 바이칼의 알혼 섬으로 가기 위해 6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 그리고 20분가량 배를 타고 바이칼 호수를 건넜다. 알혼 섬에 도착해서는 우아직이라는 작은 버스로 숙소에 갔다. 섬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느라 마구 흔들리는 차 안에서 전진경과 조소희는 펜과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펜을 쥔 손끝으로 전해지는 차의 흔들림을 그대로 노트에 옮겼다. 땅의 흔들림에 몸을 빌려 주었던 작가들은 그렇게 ‘진동 드로잉’을 발견했다.


▲ 러시아 작가들과의 상견례(왼쪽) / ▲ 러시아 작가들과 협업 구상 중(오른쪽)


한국 작가들과 러시아 작가들은 공동 작업으로 숙소에 내걸 현수막 그림을 그렸다. 회의를 거쳐, 바이칼을 가장 잘 상징할 수 있는 ‘물’이라는 단어가 러시아어와 한글로 적혀 있는 거대한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한 그들은 알혼 섬에 머무는 기간 동안 매일 함께 이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알혼 섬에서 러시아 작가들은 이젤을 들고 나가 알혼 섬과 바이칼 호수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우리로서는 아주 오래간만에 접해보는 작업방식이었는데, 그림을 대하는 그들의 성실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러시아 작가 세르게이는 틈틈이 우리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한국 작가들 가운데 비교적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바이칼에 온 이는 전진경이었다. 그는 3일간 바이칼 호수 근처의 어두운 들판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겁이 많은 작가가 이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감행한 ‘무서움 극복 프로젝트’였다. 러시아 작가들은 돌멩이에 전진경의 안전과 행복, 평화를 기원의 말을 적어 ‘부적’을 만들어 줬다. 한편 조소희는 숙소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향해 2시간가량 걸어가, 4시간 남짓 나뭇가지에 뜨개질을 하고, 다시 2시간 동안 숙소로 돌아오는 퍼포먼스를 했다. 박병래는 호수가 근처 움푹 파인 넓은 땅을 무대로, 현장에서 모은 재료들을 이용해 외계 생명체로 분한 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았다. 소설가 김서령은, 문학과 다른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 가는 미술가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열심히 관찰했다.


▲ 시베리아 횡단철도 이동 중에 그린 전진경 작가의 그림(왼쪽) / ▲ 조소희 작가의 퍼포먼스(오른쪽)


돌이켜 보면 우리의 여정에는 ‘흔들림’이 함께했다. 덜컹거리는 기차며, 우아직의 진동도 그렇지만, 바이칼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설렘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 것인지, 무슨 작업을 어떻게 풀어가게 될 것인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바다가 아닐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넓은 호수 곁에서 작가들은 그들이 처음 만난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작업에 집중했다. 한국 작가와 러시아 작가 간에 거리를 좁히기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은 없었지만, 서로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 방식으로 반응을 보이는 작가들의 태도에서 느슨한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이칼에서 작가들은 틀림없이 함께 생활하면서도 동시에 온전히 그들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경험했던 것 같았다. 4시간가량 나뭇가지에 매달려 뜨개질을 한 조소희 작가는 그 시간이 한없이 외롭고 허무했다고 토로했다. 전진경 작가는 새벽녘 텐트 안에서 파닥거리는 나방이 너무 반가울 만큼 홀로 있는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깊은 웅덩이에서 외계인의 모습으로 분장한 박병래가 홀로 서서 저 너머 어디에선가 올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모습은 아주 쓸쓸해 보였다. 숙소에 머물며 원고를 써 내려간 김서령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을 ‘관찰’한 나는 결과물인 작업뿐 아니라, 작가들이 작업을 이끌어 내고 그것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 흥미로웠다. 환경에 곱게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작가들을 보면서, 예술가들은 확실히 우리가 매몰되어 있는 견고한 일상의 구조를 파고들어 새로움을 제시해 주는 자질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자료담당자[기준일(2012.10.4)] : 국제교류부 유병은 02-760-4743
게시기간 : 12.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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