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시대, 파편화된 대중문화
우리는 관객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콘텐츠의 창작과 향유에 대한 접근성은 그 어느 때보다 증진됐다. 그에 상응하여 콘텐츠는 다변화하고 폭증하였으며 또한 그에 따라 콘텐츠를 둘러싼 향유의 양과 질도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 우리는 걸작 미술품을 컴퓨터 모니터로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구석구석 감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인공지능(AI)으로 카라바지오(Michelangelo da Caravaggio)가 그린 모든 인물을 심슨 만화의 캐릭터로 바꾸어 즐길 수도 있다. 우리는 극장에서 본 영화를 오티티(OTT)에서, 때로는 밥을 먹으며, 때로는 밤을 새며, 때로는 음악을 틀어놓고 뮤직비디오의 영상처럼, 그 외의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관람한다.
다소 과장된 것 같은 에피소드도 전해 들었다. 극장에서 옆의 관객이 떠들어서 주의를 주었더니 돌아온 말은 “그렇게 조용히 영화를 보고 싶으면 집에서 넷플릭스나 보세요.”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극장은 마치 영화를 보며 웃고 떠들던 20세기 초의 ‘니켈로디온(Nickelodeon)’1으로 회귀한 것 같다. 이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20세기 초의 극장 니켈로디온은 노동 계급이 ‘함께’ 웃고 즐기는 공공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제 극장 티켓 가격은 5센트보다 훨씬 더 비싸졌고 그 안에서 관객들은 ‘따로’ 웃고 떠든다.
우리가 관객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그 어느 때보다 관객에게 제공되는 예술적 향유의 기회는 늘어났지만 그러한 향유 속에서 공과 사, 소비와 참여, 지배와 저항의 이분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럽게 무너지고 재조직화되었다.
1905년에 개관한 펜실베니아의 니켈로디온 ⓒHeinz History Center
제도적 예술 공간의 양면
문화향유 기회 확대 VS 문화향유의 불평등
문화향유 기회 확대 VS 문화향유의 불평등
물론 이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혼돈은 늘 있어 왔다. 1793년 설립된 루브르박물관은 구체제의 소유물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민주적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파리로 몰려드는 관광객에게 경이와 유흥을 제공해 주는 관광의 공간이었고 동시에 피식민지에서 약탈한 타 민족의 문화적 자산을 서구 문명의 자랑스러운 전리품으로 탈바꿈시켜 과시하는 제국의 공간이었다.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 한반도에서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박물관은 조선의 민중에게 교육과 여흥의 기회를 제공했으나 동시에 그 공간들은 일제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발휘되는 식민 지배의 테크닉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영토에서 설립된 다수의 제도적 예술 공간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착종하고 갈등하는 모순적 공간이다. 1960년대 등장하여 현재까지 이어지는 ‘제도 비판’은 미술관・박물관의 공공성과 급진적 정치성을 안팎에서 실험하고 구현하려는 시도이다. 이들은 엘리트의 지배 도구로, 상업주의의 파수꾼으로 전락해 가는 미술관・박물관을 개혁하고 그곳을 방문하는 수동적인 감상자를 능동적인 수용자와 참여자로 전환하고자 한다. 제도 비판은 제도를 부정하기보다 대안적 제도를 모색한다. 예컨대 “모두를 위한 예술”이나 “누구나 예술가이다”라는 구호로 대변되는 최근의 문화민주주의적 개혁 요구는 미술관·박물관의 외부에서 표명된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적 미술관·박물관의 태동 시기에 이미 제도 내부에 심어져 있던, 예술을 둘러싼 불평등의 문제에서 시작된 외침이었다. 우리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지점은 과연 그러한 제도 개혁이 관객의 시대로 불리는 당대의 변화와 얼마나 혹은 어떻게 맞물려 있는가이다.
제도적 예술 공간을 둘러싼 개혁 노력은 실효성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18대 박근혜 정부에서 만든 ‘문화가 있는 날’ 정책은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접근성을 상당 부분 개선한 것처럼 보인다. ‘문화가 있는 날’의 궁극적인 목표는 역설적이게도 ‘문화가 있는 날’의 폐지이다. 즉, 특정한 날과 상관없이 박물관・미술관에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날이 도래하는 것이 정책을 만든 관료와 전문가들의 기대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기대가 얼마나 충족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상이 바쁜 사람들에게 ‘문화가 있는 날’은 매달 스스로에게 ‘한 달에 한 번은 미술관에 가자’라는 다짐을 실현하게 도와주는 상징적 의미를 갖게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박물관・미술관의 이미지는 기존에 그러한 공간이 갖고 있던 위화감을 덜게 만든다.
예술 공간에서 운영하는 예술교육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한 『2022 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예술교육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미래에 예술교육을 이수하고자 하는 의향이 예술교육 미경험자보다 월등히 높다. 하지만 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은 통계가 시작된 2008년에 비해 큰 변화 없이 등락을 반복하다가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오히려 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떨어졌다. 조사에 따르면 입장권을 구입해서 공간을 방문하여 문화예술행사를 관람한 사람들의 비율도 코로나19 팬데믹 직전까지는 증가 추세였지만 증가율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미술전시회 2003년 10.4%에서 2019년 13.5%로 증가). 문화예술행사에 직접 참여한 사람의 비율은 2008년의 2.4%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19년에 10.4%로 증가했으나 이는 영화를 포함한 문화예술행사 관람 비율(2008년 67.3%에서 2019년 81.8%)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 너머
당신을 위한 문화예술을 질문하다
당신을 위한 문화예술을 질문하다
문화체육관광부나 서울문화재단의 예술 향유 실태 조사는 전통적인 예술 장르와 제도적 공간에 대한 관람, 이용, 참여와 관련하여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문화민주화 및 문화민주주의 정책은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언제나 국가가 설립하고 지원하는 제도 공간에 국한된다. 물론 제도 비판과 개혁을 강조하는 이들은 “우리가 말하는 ‘모두’와 ‘누구나’는 ‘다수’를 뜻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그 ‘모두’와 ‘누구나’는 그렇다면 결국 여가 시간에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관심을 보이며 나아가 그러한 공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또 다른 엘리트층을 뜻하지는 않는가?
서울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을 더 많이 설립하여 서울 시민의 문화 격차를 해소하고 향유권을 증진하겠다고 2024년 초 발표했다. 그 일환으로 2024년 말 서울사진미술관이 개관할 예정이다. 사진이야말로 관객의 시대가 처한 가능성과 한계를 잘 보여주는 예술 매체이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말 그대로 모두가 사진을 찍고 전시하는 시대가 됐다. 인스타그램에는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사진 강좌 광고가 넘쳐난다. 사진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을 모르지 않는다. 국내외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전은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진의 역사와 미학에 대한 비평 서적과 그 비평 서적들이 다루는 작가들의 사진집의 판매 실적은 입소문을 타지 않는 한 저조하다. 어쩌면 우리는 관객의 시대가 아니라 마니아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니아의 예술 사랑은 결국 또 다른 구별 전략이 아닌가? 그들의 사회문화적 배경은 또 다른 엘리트주의의 후광으로 침윤돼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또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으로 지탱되는 문화가 아닌가? 우리 시대의 관객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떤 종류의 감상자이며 참여자이며 구매자인가?
서울사진미술관 조감도 – 믈라덴 야드리치作 ⓒ서울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제도적 예술 공간의 방문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시장과 공동체, 제도와 일상, 일과 여가를 가로지르는 삶의 전개 과정에서 예술을 만나고 예술에 사로잡히고 예술을 이용한다. 기존의 관객 연구와 조사는 그 의도가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근대적인 인구의 모형(계급, 시민, 소비자 등등)에 근거해 왔다. 그러한 연구와 조사가 밝혀온 혼돈도 근대적 모형에 따르는 숫자와 범주의 혼돈이었다. 그러나 관객은 숫자나 범주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이 시대 관객의 욕망과 소망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관객은 질문할 것이다. 왜 그토록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냐고. 이에 대한 답변 또한 다양할 것이다. 좀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좀 더 나은 공통의 경험과 삶의 질을 위해 등등.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이야기 수집가이자 이야기꾼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이야기를 모아 거기에 내 이야기를 덧붙여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당신들에게 다시 들려줄 것입니다. 당신들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내가 왜 그토록 예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궁금하거든요. 내가 당신들의 이야기에 매혹되고 흥분되는 만큼 당신들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 20세기 초 미국과 캐나다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소규모 영화관. 극장 입장료는 5센트로, 당시 5센트 동전을 니켈(nickel)이라 불러 니켈로디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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