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교육의 약사
이른바 선진국들은 1980년대부터 ‘예술교육 국가표준’을 개발하는 등 문화예술교육을 이미 준비했다. 우리나라도 21세기를 앞두고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듯하다. 물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설립하고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을 제정한 것이 2005년이므로 구체적인 움직임은 21세기 초에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것으로 봐야겠지만 정책적 논의와 선택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1997년 12월에 고시된 제7차 교육과정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교육과정은 1-10학년은 국민공통기본교과로 11-12학년은 선택중심교과로 운영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학교 재량과 학생의 선택 가능성을 폭넓게 허용함으로써 특히 문화예술 분야가 들어갈 여지가 많아졌다. (이후에 1-9학년은 국민공통기본교과로, 10-12학년은 선택중심교과로 운영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7차 교육과정은 음악 교과 중 40%를 국악으로 편성하도록 했는데 학교 현장에는 국악 교사가 거의 없었으므로 당장 교육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해결책으로 2000년부터 현장 국악인을 학교로 초빙하여 수업을 맡기는 국악강사풀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현재 예술강사지원사업의 효시라 할 국악강사풀사업은 급박한 교육 현장의 사정이 발단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강사풀사업은 2002년에 연극으로 확대되었고, 2004년에는 영화 분야로도 확대 실시되며 무용 분야에서도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5년 초에 설립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각 분야의 민간에 위탁하여 운영하고 있던 국악, 연극, 영화 분야를 이관받고, 또 민간에서 준비 중이던 무용과 새로이 추가한 만화·애니메이션 분야까지 총 5개 분야를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2010년에는 사진, 공예, 디자인이 추가됨으로써 현재의 8개 분야 ‘학교예술강사지원사업’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의 법적 근거
우리는 다른 선진국보다 조금 늦게 문화예술교육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관련 법을 제정하고 주관 기관까지 설립한 것은 상대적으로 꽤 적극적인 시도였다. 법을 통해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를 공식화하고 국민의 권리와 국가의 책무를 규정한 것이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으로 하여금 사업을 전담하도록 한 것은 튼튼한 토대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문화예술교육의 법적 근거는 가장 먼저 「헌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헌법 제22조
①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문화예술교육의 지원에 필요한 사항을 정함으로써 문화예술교육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국가의 문화 역량 강화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헌법」에서 말하는 “예술의 자유”란 예술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으로서 예술 창작을 하면서 즐길 자유와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즐길 자유를 모두 의미한다. 국민이 감상할 작품을 생산하는 주체는 대부분 예술인이다. 따라서 예술인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할 예술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또 일반 국민이 예술을 감상하고 체험하며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안내하는 것도 예술인들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술강사이다. 그러므로 예술강사지원사업 역시 「헌법」에 명시된 예술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헌법」에 근거하는 문화예술교육의 법적 가치는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의 목적 중 “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이라는 문구로 한층 명확해진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예술의 참맛을 알게 되고, 그래서 예술이 일상의 삶 속에 굳게 자리 잡을 때 국민의 삶이 행복해지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의 기본원칙과 국가의 책무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은 제3조에서 기본원칙을 밝히고, 제5조의2에서는 국가의 책무를 명시하고 있다.
제3조(문화예술교육의 기본원칙)
① 문화예술교육은 모든 국민의 문화예술 향유와 창조력 함양을 위한 교육을 지향한다.
② 모든 국민은 나이, 성별, 장애, 사회적 신분, 경제적 여건, 신체적 조건, 거주지역 등과 관계없이 자신의 관심과 적성에 따라 평생에 걸쳐 문화예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받는다.
제5조의2(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문화예술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그에 필요한 지원을 하여야 한다.
② 국가는 문화예술교육 지원에 관한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관계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특별시・광역시・특별자치시・도・특별자치도(이하 “시・도”라 한다) 교육청 상호간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여야 한다.
③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저소득층, 장애인 등 사회적 배려대상자에게 균등한 문화예술교육 기회를 보장하여 문화예술적 소질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책을 수립・실시하여야 한다.
이처럼 모든 국민에게 차별 없이 평생에 걸쳐 문화예술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교육청 등에 대해 모든 국민이 문화예술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책을 마련하여 실행하라는 엄중한 책무를 부여하고 있다.
비록 법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만 일반 국민은 정서적으로 중앙정부건 지방정부건 교육청이건 국회건 지방의회건 모두를 국가로 본다. 그러므로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한 중앙과 지역, 교육 당국이 서로 협조하지 않고 갈등하거나 책임을 미루다가 헌법적 가치가 위협받는 일이 발생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제5조의2의 ③항에서는 “사회적 배려대상자”를 별도로 명시함으로써 일종의 우선순위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현재
프로그램의 대상이 주로 소외층에 집중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사회문화예술교육은 앞으로도 이런 기조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대상과 규모를 늘려가야 할 것이다.
반면 은 특별히 소외층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교육 대상을 선정할 때 특수학교 등에 가산점을 주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런 기준이 일관되고 확고하게 적용되지는 않는 듯하다. 즉 학교문화예술교육은 보편 실시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초·중·고와 함께 학교로 분류되고 있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거의 제외하고 있는 현 실정은 분명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학교문화예술교육의 위기
정부가 문화예술교육 예산 중 학교문화예술교육 예산을 2024년에 50% 삭감한 데 이어 2025년에 다시 72%를 삭감하기로 하여 커다란 우려를 낳고 있다. (2023년 574억 → 2024년 287억 → 2025년 80억) 문화예술교육 예산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출범한 2005년에는 국고로만 편성했으나 2007년부터 지방비가 조금씩 투입되기 시작했고 2009년부터는 학교문화예술교육을 위해 국고 대응 형식의 지방교육재정이 큰 비중으로 투입되어 왔다.
국고에 지방교육재정과 지방비를 더한 학교문화예술교육지원 총예산은 2023년에 951억 2600만 원이었는데 국고의 급격한 삭감으로 2024년에는 653억 2200만 원으로 31% 감소하였다. 2025년에는 설령 지방교육재정이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 해도 총예산은 2024년 대비 32%가 감소한 446억 4300만 원으로 예상된다. 즉 2023년 대비 2025년 예산은 국고로는 86%(574억→80억), 총액으로는 53%(951억→446억)가 감소되는 셈이다.
정부는 이러한 삭감에 대해 “학교 관련 예산의 지방교육재정으로의 단계적 이관에 따른” 조치라고 설명하였다. 이 설명이 타당성을 얻으려면 국고를 50% 삭감한 2024년에 지방교육재정이 그만큼 증액되었어야 옳다. 그러나 그런 곳은 강원도뿐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아주 소액을 증액한 울산 말고는 모두 동결되었다. 게다가 다시 국고에서 72% 삭감이 예고된 2025년에는 서울과 경기 등 주요 지역에서 아예 대응 예산을 내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앞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무”라 할 때 국가는 중앙정부만이 아닌 지방정부, 교육청, 국회, 지방의회 등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렇듯 커다란 개념의 국가 안에서 상호 협조하며 문화예술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책무 중의 책무일 것이다. 그러나 지방정부 및 교육청과의 충분한 협의 없이 진행된 정부의 예산 감액으로 현재 학교문화예술교육은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애가 타는 것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교육청이 아니라 수업을 못 받게 된 학생들과 수업 시수가 대폭 줄거나 학교를 떠나야 하는 예술강사뿐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업이 중첩되어 이러한 국고 삭감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업 내용과 파견 예술강사가 다르다면 진정한 중첩으로 보기 어렵다. 또한 자체 증액을 한다면서 그간 어렵게 조금씩 개선해 온 강사 복지를 개악하겠다는 일부 지역의 처사도 분명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일단 2023년 수준으로 예산과 사업 내용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뒤 이런 위기를 만든 무책임과 무능력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며 철저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학교문화예술교육의 정상화 방안
① 강사 처우 개선
2023년 학교문화예술교육 총예산은 951억 2600만 원으로 8693개교에 5021명의 강사가 파견되어 152만 9072시수의 수업을 하였다. 반면 2024년에는 총예산이 653억 2200만 원으로 줄어들고 8475개교에 4805명의 강사가 파견되어 104만 1777시수의 수업을 하였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예술인의 측면에서 볼 때 창작활동을 통해 수입다운 수입이 보장되는 예술인은 극소수이다. 따라서 예술강사의 수입이 강사료뿐이라고 할 때 강사료가 최저임금의 38-53%밖에 되지 않는다는 수치는 상당히 심각한 현실을 보여준다. 또 수업 준비 시간은 인정이 안 되고 원거리 이동에 따르는 시간과 비용에 대한 보상 기준도 없으며, 초단시간 근로자로 분류됨으로써 최소한의 복지 혜택조차 받을 수 없다.
여기서 삭감된 예산을 회복한 후에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드러난다. 우선 강사료 인상이다. 강사료는 2000년에 3만 5천 원으로 시작하여 2003년에 4만 원이 되었다가 15년 만인 2017년에야 4만 3천 원으로
대학 강사료는 물론이고 법무부의 법교육 강사나 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성범죄예방교육 강사, 한국정보화진흥원의 인터넷중독예방교육 강사 등과 비교해도 50%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
물론 예술강사를 초단시간 근로자로 묶기 위한 기괴한 기준도 없애야 한다. 대부분의 예술강사는 주 15시간 미만, 월 60시간 미만의 초단시간 근로자로서 주휴수당, 연차, 유급휴가, 퇴직금 등을 적용받지 못하며, 4대 보험도 건강보험은 아예 제외되고 나머지 역시 절차와 조건이 현실과 잘 맞지 않아서 효용성이 대단히 미흡한 상태이다.
예술강사가 처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또한 인지하고는 있지만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예술강사를 예술인으로서, 교육자로서, 노동자로서 제대로 대우하는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교육부와 각 시도 교육청, 국회, 예술계가 모두 함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학교문화예술교육의 정상화 방안
② 장기적인 규모의 확대와 상세화
학교문화예술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길게는 법에 맞는 방향성을 설정하고 꾸준히 실행해 나가야 한다. 즉 법의 취지대로 모든 국민에게 문화예술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데 특히 학교문화예술교육의 보편적인 실시를 위해서는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인 확대가 필요하다.
정부는 전국 초중고 70-80%에 예술강사가 파견되고 있다고 홍보하곤 한다. 얼핏 초중고생의 70-80%가 문화예술교육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설령 2023년의 수준으로 예산 편성이 된다 해도 초중고 한 학급당 1년에 6.56시수가 배정될 뿐이다. 즉 1년 34주 중 단 6-7주만 주당 1시수의 수업을 받는 셈이니 34주를 채우려면 지금의 최소 5배는 되어야 하고 주당 2시수가 되려면 지금의 10배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몇 차례 시범 사업만 있었던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생각한다면, 그 학급 수가 약 1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므로 최대 15배까지 확대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적어도 10년에서 길게는 2, 30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까지라도 염두에 두고 점진적으로 늘려가는 장기적인 방향 설정과 계획 수립, 꾸준히 흔들리지 않는 실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장기적인 규모의 확대와 함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정교하게 다듬는 상세화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2002년 시작한 연극 강사풀 사업은 강사 연수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140시간의 정규 연수 외에 특수아동 등 특정 대상을 고려한 연수도 따로 제공하였고, 강사끼리 그룹을 짜서 자체 워크숍과 정보 공유, 상호 컨설팅 등이 가능하도록 유도하였다. 또 벽·오지 학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기 위해 강사들에게 교통비와 숙박비까지 지급해 가며 파견하였다. 그리고 평가는 2명의 전문가가 나가되 애로사항까지도 청취해서 해결 방법을 함께 모색하도록 하였다.
물론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실행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전에는 이런 과정에 대해 단순한 경제 논리를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학교예술강사지원사업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으로 이관된 후 소위 효율성 문제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효율과 단순이라는 단어를 교육에 결부시킬 때는 대단히 신중해야 하건만 그러지 않았다. 상세화는 우리 문화예술교육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필수 과제이다. 그렇게 장기적인 규모의 확대와 함께 상세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헌법적 가치를 지니는 예술의 자유와 문화예술교육의 실현을 위한 국가의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순천향대학교 명예교수)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장 주네 희곡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배우의 화술』 , 『예술강국, 문화대국』 , 『연기화술 클리닉』 등의 저서를 집필했고 연극 분야 고교 교육과정(2009, 2015, 2022) 개발과 여러 종의 연극 교과서 집필을 주도했으며, 여러 편의 희곡을 번역하고 연출했다. 1996년 가야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1999년 순천향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2020년 8월까지 재직했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2007-2008년 한국연극교육학회 회장과 2005-2012년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2015년 한국연극교육학회 산하 분과학회로 한국화술학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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