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실’처럼, ‘실처럼 이어진 빛’처럼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서 한강이 2024년 12월 7일 오후 5시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을 했다. 강연의 제목은 ‘빛과 실’이었다. 한강은 준비한 원고를 한국어로 읽었고 참석자 200여 명은 영어와 스웨덴어로 번역된 인쇄물을 받았다. 이 강연은 12월 10일에 개최된 ‘노벨문학상 시상식’ 전에 이뤄졌다. ‘빛과 실’은 한강이 스스로 밝힌 자신의 문학 세계에 대한 진술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 영상 ⓒThe Nobel Prize
한강은 하나의 장편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이 걸린다.”라고 말했다. 그 기간 동안에 한강은 집필하고 있는 장편소설 속에서 산다고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는 것이다. 1년 혹은 7년여 동안 작품 속에 연금되어 속박된 삶을 사는 셈이다. 작품은 독자에게는 결과물로 읽힌다. 하지만 작가는 그 작품을 몸과 영혼을 녹여 만들어낸다. 1년 혹은 7년의 유배 생활이라니, 가늠이 되지 않는 ‘견딤의 시간’인 셈이다.
한강이 ‘빛과 실’에서 ‘문학적 질문’에 관해 언급한 부분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질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이 한 편의 장편소설에서 답을 찾는 과정으로 서사화하기 위해 한강은 정신의 아득한 모험을 경험하고 언어 장인의 치열한 정열을 투여했을 것이다. 한강의 강연을 통해, 좋은 문학은 절실한 질문을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해 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예술은 삶의 은유라고 한다. 좋은 삶은 한강의 문학처럼 좋은 질문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을 자신의 방식대로 풀기 위해 묵묵히 견뎌내는 태도가 좋은 예술가의 자세이기도 하다.
한강,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기를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지원정책’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이 ‘한국문화예술의 세계화 지원’이었다. “K-컬처의 동력으로서 세계인이 함께 읽는 한국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문학 진흥 정책의 주요 과제로 제시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제2차 문학진흥기본계획’(2023~2027)에 따르면, 국제문학상 수상 횟수가 2003년부터 2012년까지는 11회였는데, 2013년부터 2022년까지는 28회로 상승했다고 한다. 이러한 추세는 K-콘텐츠의 세계적 열풍이 한국문학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로 파악됐다. 따라서 한국문학의 입지 확보를 위해서는 ‘노벨문학상’과 같은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암묵적인 정책 목표가 설정되었다.
2024년 10월 10일,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목표를 일거에 이뤄내고 말았다. 이는 벼락같은 수상 소식이었고 한국 사회 전체를 놀라게 한 천둥소리였다. 아시아 작가가 수상하리라는 기대는 있었으나 그 수상자가 한강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됨으로써 한국문학은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1와 오에 겐자부로2 가, 중국에서는 모옌3이 수상한 바 있다. 이제는 한국에서 한강이 최초의 아시아 여성 작가로 수상자가 되었다.
한강은 이제 세계인이 함께 읽는 한국문학의 자리를 마련한 존재가 되었다. 콤플렉스 없이 문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한강이 조성해 주었다는 것이, 한국에서 문학하는 다른 작가들에게 주어진 축복이기도 하다. 콤플렉스는 마음의 상처이기에 실제 현실을 왜곡되게 한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의 작가들은 외국 작가와 대면했을 때 자신의 언어권 문학을 왜소하게 생각하는 태도나 작가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조금은 더 당당해질 수 있게 되었다.
작가 한강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진다. 1970년생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강 작가는 지금의 문학적 성과보다 더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젊다. 그는 미래의 문학을 더 기대해 볼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가 앞으로 써낼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적 길을 만들어 나가는 개척 작업이 될 것이다. 먼 미래에 그가 멈추는 순간까지 그의 작업은 세계 독자의 눈길을 계속 잡아끌 것이다. 그가 바로 한국어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리라는 생각을 하면, 이는 분명 한국문학의 축복이다.
또 다른 ‘재앙 같은 축복’도 있다. 재앙의 몫은 한국 주류사회의 것이고, 축복의 몫은 한국 소수자의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일본 사회를 비판했던 것처럼 한강도 한국 사회의 주류적 관점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국가 폭력에 대해,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위협에 대해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는 소설을 써 왔다. 생활인은 놓치기 쉬운 구조적 폭력을 작가의 예민한 눈으로 포착해 질문하며 형상화해 왔다. 그런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상징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발언은 문화적 표준을 조정하게 할 것이고 그의 문학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나는 그가 오에 겐자부로보다 더 급진적이고, 귄터 그라스4
보다 더 실천적이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5
보다 더 근본적으로 전쟁과 폭력에 대해 비판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한국의 소수자에게는 든든한 후견인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인의 K-Arts, 세계인의 K-Arts가 되려면
국제 교류의 측면에서 정책은 과연 예술에 어떻게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문화체육관광부는 K-Arts 지원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K-뮤지컬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고 서울 아트 마켓을 개최하며 해외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K-콘텐츠의 긍정적 성과가 공연예술과 미술, 무용 등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는 지원 양상이다.
문제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문화예술을 지원하다 보니 국가주의의 그늘이 드리워지곤 한다는 데 있다. 예술의 ‘창의성, 다양성, 혁신성’은 국가 경쟁력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클래식 분야, 무용 분야, 국제 콩쿠르 분야에서 국제적 수상의 성과를 냄으로써 국가 브랜드를 향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와 더불어 경제적 부가가치의 산출도 계산된다. “영화 한 편이 자동차 4만 대 수출보다 낫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문화예술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려고도 한다.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으면 짙을수록 문화예술의 국제적 교류는 축소되고 만다. 전 지구적으로 감수성이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제국주의적 관점은 치명적일 수 있다. 그렇기에 문화예술 분야의 국제 교류는 ‘평등주의적, 수평적 감수성에 기반한 정책 지원’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류와 협력, 장기적·거시적 정책 입안이 필요하다.
먼저, 세계 시장으로의 진출을 위한 정책적 지원은 세계인을 한국으로 유입시켜 문화예술을 체험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예술 지원을 국적주의에 입각해 자국민에게만 한정하는 정책은 바뀔 필요가 있다. 한국으로 들어온 외국인 예술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 외국 작가와 연구자를 불러들여 작업실을 제공하고 물질적으로 지원한 후, 그 작가가 자국에 돌아가서도 독일에 관한 예술활동을 하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다음으로, 단기 지원 체계보다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정책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숨은 공로자는 번역자이기도 하다. 한강 문학의 번역자인 데보라 스미스와 같은 존재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곽효환 전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은 한국문학 번역의 역사를 3세대로 구분했다. 제1세대는 광복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로 이때는 외국문학을 전공한 한국인 교수들이 번역을 주도했다. 제2세대인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는 외국어에 능통한 한국인과 한국어 능력을 갖춘 외국인의 공동 번역이 성과를 냈다. 다음으로 제3세대에서는 한국문화와 한국어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전문적인 번역 훈련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시기는 201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이다. 이렇듯 장기적인 시간을 견뎌낸 이후에야 문화 간의 교류가 가능해지고 그 문화적 교류에 기반해 예술적 성취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수 있다. 정책의 접근도 시간을 견디는 구체적 프로그램의 실행이 중요하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문학적 개성의 성취이다. 더불어 한국문학의 풀뿌리에 기반한 문학 생태계의 건강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강의 문학적 작업을 가능하게 했던 독자들의 응원과 지지, 문학 출판 인프라를 유지했던 출판사들, 그리고 문학사적 전통 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중 지원으로 이뤄낸 성과가 아니라 풀뿌리의 힘에 기반한 성과이기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벼락처럼 한국 사회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부에서 견실히 다져진 문학예술 지원정책이 어느 순간에 이르면 외부의 좋은 평가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예술인의 힘
처음에 이야기했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인 ‘빛과 실’로 다시 되돌아가 보자. 이 강연에서 한강은 문학적 질문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중에서 다음 대목이 유독 내 마음에 뾰족한 울림을 주었다. 젊은 시절이었던 20대 중반에 한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문학뿐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 직면하곤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이 질문은 현재 글을 쓰는 ‘나’가 인간 존재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내가 쓰는 텍스트는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현실을 바꿀 수도 없다. 그런데도 무력함을 감내하면서 글쓰기를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의문은 ‘현재와 과거, 산자와 죽은 자’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한강은 19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 YMCA에 남아 있다가 살해당한 젊은 야학 교사인 박용준의 기록을 읽으면서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꿨다고 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과거의 사건이 글을 쓰는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작가가 쓴 글 속의 사건은 과거처럼 읽히지만, 그 글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현재’의 작가의 삶에도 개입해 영향을 미친다. 쓰는 존재와 쓰인 글의 관계에 대한 역전적 사유가 이 질문에 스며 있다. 작가는 쓰는 순간에 집중하면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히고 만다. 하지만 자신이 쓴 글을 경유하여 세계를 다시 대면하게 되면 자신이 쓰는 글이 어떤 질문을 담아야 하는가를 심사숙고하게 된다. 좋은 문학은 시간에 관해, 존재에 관해 좋은 질문을 품고 있다.
2024년 12월, 한국 사회는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현실을 경험했다.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라는 극단적인 정치 현실에서 1980년 5월 광주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 희생당한 사람들은 집단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유혈사태를 극적으로 막았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비상계엄 선포’에 이어 윤석열의 억압적 통치가 지속되었다면, 한강은 스웨덴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객으로 떠돌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1980년 광주의 핏자국이 2024년 한국 사회를 살렸으며 한강의 『소년이 온다』의 문학적 성취도 한국 사회를 살리는 데 기여를 했음에 감사드린다.
(좌)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 ⓒNovel Prize Outreach / Anna Svanberg
(우) <소년이 온다> ⓒ창비
*본 원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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