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골목비엔날레라는 와인
그리고 양림동이라는 떼루아
그리고 양림동이라는 떼루아
좋은 와인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떼루아(terroir, 토양·풍토)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떼루아만으로 좋은 와인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와인의 진정한 품질이 결정되기까지는 자연의 선물과 인간의 노력이 결합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포도를 경작하는 것 외에도 숙성 과정에서 와인은 천천히 변모한다. 와인을 오크통에 넣고 숙성시키는 동안 수분과 알코올이 증발하는데 이를 앤젤스 셰어(Angel's Share), 즉 천사의 몫이라고 부른다.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은 공기 중으로 증발된 수분과 알코올을 천사들이 가져간다고 말한다. 이 아름다운 표현은 와인의 자연스러운 숙성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증발된 양을 정확히 측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좋은 와인을 만드는 중요한 과정이다. 와인을 천천히 숙성시키면서 와인이 공기와 만나 산화되듯이 예술과 마을이 결합하여 깊은 향을 발산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광주 양림동에서 열리는 양림골목비엔날레는 바로 이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양림골목비엔날레는 지역 예술인과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지역성을 강조하는 대안적 형태의 비엔날레를 추구한다. 베니스비엔날레나 광주비엔날레와의 차이점은 국제 비엔날레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에 있다. 지역의 독창적인 예술문화를 포착하고 지역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을 핵심으로 삼는다. 양림동은 100년이 넘게 쌓여온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유산 위에서 예술인과 마을 주민이 협력하여 새로운 창조적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마치 오크통에서 와인이 천천히 숙성되듯 양림골목비엔날레는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그 독특한 향과 맛을 발산하며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양림동의 역사적 맥락과 예술적 부흥
양림골목비엔날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 축제가 뿌리내리고 있는 100년 이상의 역사적 맥락이다. 양림동은 1900년대에 선교사들이 정착하면서 생겨난 근대 건축물과 문화적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지역이다. 이곳의 근대 건축물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예술적 움직임과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양림골목비엔날레는 이러한 문화적 유산을 토대로 지역사회와 예술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예술축제이다.
비엔날레를 추진하는 데 앞장선 한희원 작가(집행위원장)는 “양림동의 예술적 자산과 주민의 삶이 함께 결합될 때 진정한 로컬 크리에이티브의 가치가 발현된다.”라고 말했다. 그의 지도 아래 이 축제는 양림동의 역사적 배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지역주민과 예술인이 함께 소통하는 장으로 발전했다.
양림골목비엔날레는 광주비엔날레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강신겸 교수(추진위원장)는 광주비엔날레와의 협력을 통해 “양림골목비엔날레가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단순히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광주비엔날레 재단과 양림골목비엔날레 추진위원회가 적극 나서서 성사된 이 협력 모델은 광주비엔날레의 전시와 파빌리온이 점진적으로 양림동으로 확대・운영되다가 올해는 주제 전시 거점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지역 예술인에게 세계적인 무대와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올해 전시 감독을 맡은 정헌기 문화기획자(전시 분과장)는 예술인과 주민을 하나로 묶고 광주비엔날레와 양림골목비엔날레가 어우러지는 전시를 기획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정헌기 감독은 “지역 예술인과 외부 예술인이 함께 소통하며 양림동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반영한 전시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비엔날레가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전시 기획은 로컬의 역사와 현대적 감각을 조화롭게 결합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와 함께 디지털 미디어아트를 활용한 이이남 작가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가 결합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이 작가는 “디지털 시대의 예술은 전통을 현대화하고 지역적 가치를 글로벌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양림동의 역사적 유산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한 이 작가의 작품은 방문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술과 공동체:
협력과 상생의 장
협력과 상생의 장
양림골목비엔날레는 단순히 예술작품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과 지역사회를 잇는다. ‘오픈 스튜디오’와 함께 시민 참여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시민과 함께’와 ‘예술과 함께’라는 주요 프로그램 2개가 마련되어 있으며, 이들 프로그램은 지역 주민과 방문객이 예술을 일상에서 더욱 가까이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시민과 함께’ 프로그램은 양림동을 방문하는 다양한 연령층의 시민을 위해 기획된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마을 여러 주체의 협력으로 다채로운 마을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스와인하트 스쿨’은 양림동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스와인하트(Martin Luther Swinehart)의 이름을 딴 어린이 대상 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마을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예술을 체험할 수 있도록 교육적 기회를 제공한다. ‘양림스푼위크’는 양림동 골목의 다양한 식당과 카페를 소개하며 마을 상권을 활성화하는 행사로 양림동만의 독특한 미식을 알리고 소상공인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또 다른 프로그램인 ‘걷기 좋은 양림’은 차 없는 거리로 조성된 공간을 통해 양림동을 도보로 돌아볼 수 있도록 하여, 느긋한 걸음으로 마을을 탐험하며 지역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밖에도 ‘도슨트 투어’는 전시와 마을 곳곳에 대해 전문적인 설명을 들으며 지역을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양림동 그림 소풍’은 어린이들이 마을 곳곳을 걸으며 양림동의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는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마을의 모습을 아이들의 시각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골목쌀롱 콘서트’는 지역 아티스트가 양림동 골목에서 펼치는 콘서트로, 지역주민과 방문객들이 일상에서 음악을 감상하며 양림동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한다.
‘예술과 함께’ 프로그램은 지역 예술인과 기획자가 참여하여 예술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주제는 마을과 예술의 공존으로, 마을을 하나의 예술 무대로 확장하는 비엔날레의 의도를 반영한다. ‘아트마켓’은 지역 예술인이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고 마을 내에서 예술 생태계를 형성하는 공간으로, 작가와 방문객이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트 쌀롱 파티’는 양림골목비엔날레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교류하는 파티로, 예술인와 애호가가 자유롭게 만나 예술을 나누고 네트워킹하는 자리이다. 이 외에도 ‘골목 세미나’는 마을과 예술의 공존을 주제로 다채로운 담론을 나누는 자리로, 양림동이 예술을 통해 지역사회와 어떻게 연결되고 성장할 수 있는지를 함께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가의 시간’은 작가의 작업 활동과 창작 과정에서의 영감을 직접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들으며 예술의 깊이를 체감할 수 있게 한다.
양림동 주민자치회장 임현숙 씨(마을 분과장)는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이 주민과 방문객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라고 설명하며, 주민과 예술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양림동에 소재한 교회들과의 협력도 비엔날레의 성공적인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 교회에서 주차장을 개방하고 교인들에게 축제를 홍보하며 도슨트 투어에도 참여한다. 또한 교회 내의 연주팀이나 중창단이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마을 공동체와 예술이 결합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교회와의 협력은 양림동의 기독교 정신과 예술 정신이 만나 마을 발전을 함께 이끌어가는 중요한 연대의 모델이 된다.
속도 조절의 철학:
양림골목비엔날레의 방향성
양림골목비엔날레의 방향성
양림골목비엔날레를 기획한 지역문화기획자 이한호 대표(기획 분과장)는 ‘속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술과 지역사회의 상생은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마을의 삶과 예술이 결합되는 과정에는, 느리지만 꾸준한 성장이 필요하다. 이 축제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단번에 큰 성과를 내기보다는 마을과 예술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천천히 성장해 가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이 철학은 내가 양림골목비엔날레를 두 번째로 경험했을 때 더욱 확실히 다가왔다. 처음 골목비엔날레에서 느꼈던 생동감과 자발적인 주민 참여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다. 마을과 예술의 결합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문화적 흐름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와인을 오랫동안 천천히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앤젤스 셰어를 관리하듯 양림골목비엔날레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고유한 가치를 더욱 깊이 발산하고 있다.
로컬의 가치와 양림동의 정체성
양림골목비엔날레는 ‘로컬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로컬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역사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문화가 모두 포함된 개념이다. 양림동은 진정한 로컬의 가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은 과거의 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대 예술과 결합시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양림동의 주민은 골목비엔날레를 통해 자신의 삶과 공간을 예술로 표현한다. 마을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주민은 단순한 소비자에서 더 나아가 창작의 주체가 된다. 그들의 삶과 이야기가 예술로 승화될 때, 이곳은 전시장을 훌쩍 넘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 골목길을 걸으며 만나는 예술 작품에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그 향이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사람이 만드는 융합과 창조성
대구 북성로의 ‘모루’와 미국 포틀랜드의 ‘스니커 위크’
대구 북성로의 ‘모루’와 미국 포틀랜드의 ‘스니커 위크’
양림골목비엔날레와 같은 로컬 크리에이티브 활동은 대구 북성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북성로는 대구의 오래된 공업지대로서 시간이 흐르며 그 역사적 가치와 산업적 유산이 예술적으로 재탄생한 지역이다. 특히, ‘훌라’라는 로컬 크리에이터 그룹이 창조한 복합문화공간 ‘모루’는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대표적인 공간이다. 모루는 낡은 기계와 산업 장비가 예술적 오브제로 재해석된 공간이다. 예술인들은 모루에서 지역의 산업적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며,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양림골목비엔날레에서의 역사적 유산과 현대 예술의 결합과 매우 유사하다.
미국 포틀랜드에서 열리는 ‘스니커 위크(Sneaker Week)’도 양림골목비엔날레와 같은 로컬 크리에이티브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포틀랜드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본사가 위치한 도시로서 스니커 위크는 나이키의 디자이너와 로컬 크리에이터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축제이다. 스니커즈 디자인과 제조라는 지역의 산업적 배경을 바탕으로 예술적 콘텐츠가 결합된 이 행사는 지역과 글로벌의 교차점에서 탄생한 독특한 로컬 문화이다. 포틀랜드의 스니커 위크는 나이키라는 글로벌 기업의 존재가 로컬 크리에이티브와 어떻게 결합하여 독창적인 예술적 이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지역의 산업적 유산이 현대의 창의성과 결합될 때,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림골목비엔날레, 북성로의 모루 그리고 포틀랜드의 스니커 위크는 모두 로컬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2024 스니커 위크(Sneaker Week PDX 2024 Recap) ⓒSneaker Week
양림동의 떼루아와 로컬의 진정한 힘
양림골목비엔날레는 예술 축제 그 이상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양림동의 역사적 유산이 현대 예술과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발산하고 있다. 마치 좋은 와인이 떼루아의 영향을 받아 탄생하듯 양림동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적 떼루아를 가진 지역이다. 예술인의 창의성과 마을 주민의 협력 속에서 이 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숙성되어 더 깊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양림동처럼 완벽한 환경을 가진 곳만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환경이 척박할수록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포도는 영양이 풍부한 땅이 아닌 석회석과 자갈, 모래가 섞인 척박한 땅에서 생산된다. 그런 곳에서 포도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깊이 뿌리를 내리며 그 과정에서 최상의 열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역이 환경적으로 불리하다 해도 사람들이 그 땅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따라 결실이 달라질 수 있다.
양림동의 성공은 단순히 이상적인 조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곧 예술인, 주민, 기획자가 그 지역을 예술과 결합시키기 위해 기울인 시간과 정성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시간, 공간 그리고 사람’이 맞물려 돌아가는 과정의 산물이다. 양림동의 역사적・문화적 유산은 그 뿌리 깊은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양림골목비엔날레가 주는 교훈은 모든 로컬에 적용될 수 있다. 척박한 지역이라고 해서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런 지역일수록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력이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양림의 실험은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를 현대 예술과 결합시켜 새로운 로컬 크리에이티브 모델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지역 축제를 넘어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유지되게 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결국, 양림의 진정한 힘은 시간과 사람 그리고 예술이 만들어내는 조화 속에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깊게 뿌리를 내리며 그 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키워 간다. 양림동은 그것의 한 예일 뿐이다. 로컬의 진정한 힘은 결국 그 지역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척박한 환경이든 그렇지 않든 로컬은 사람들의 손길로 피어난다. 양림골목비엔날레는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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