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 위기
인구 감소에 따른 지역소멸은 이제 우리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전히 사람이 북적이는 서울이나 대도시에서는 덜 체감되겠지만 지방 소도시나 농어촌 지역에서는 매일매일 쇠락하는 것을 실체로 느낄 수 있다. 공동화되어 가는 썰렁한 마을과 고령화로 활력을 잃어 가는 동네,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무자 외에는 건강한 산업 활동을 하는 인구가 전무하다시피 한 현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지역의 인구 감소가 문화예술계에 끼치는 영향은 더욱 직접적이다. 정상적인 예술시장의 형성이나 활발한 창작활동은 고사하고 예술인과 예술단체는 생계의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예술 소비자 역시 시혜성 투어식 문화 행사에 만족하거나 인근 중소도시와 수도권에서 몰아서 문화를 향유하는 쏠림 현상도 이제는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일부 유명 예술인의 귀촌과 귀농, 귀향은 나름 그 지역의 활성화에 기여하며 새로운 활동 모델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부분의 일반･청년･신진 예술인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각종 순회형 문화 행사나 생활문화 중심의 지원은 이어지고 있지만 지역의 전문 예술인이나 예술단체의 생존을 위한 본질적인 해결책은 되기가 어렵다. 각종 축제 역시 유명 예술인 중심의 프로그램에 관광객이 몰리고 있어서 지역 예술인의 활동 기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금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의 ‘소멸위기 대응 문화적 지역활성화’라는 긴 이름의 사업은 그런 현장의 한계를 극복하며 나아가 지역에서 새로운 예술 활용법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업이 그동안의 소액다건식이나 공평분배식 지원이 아니라 지역의 역량 있는 팀을 과감히 선정하여 집중 지원함으로 지역의 거점이나 리더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점은 바람직하다. 지역 예술계 특유의 서열식 구조나 정치적 역학 관계로 인한 한계를 초월하여 중앙에서 공정한 심사를 거쳐 선정함으로써 힘을 실어주는 점 또한 긍정적이다.
특히 이런 단체나 기관이 단순 프로그램 기획과 제공에 그치지 않고 지역 내 다양한 문화공간을 조성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연속･연계 지원을 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이는 기존의 자체 공간 이외에도 지역 내 공간을 발굴하게 함으로 문화 인프라 편차를 해소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에 아르코 사업 대상의 일부와 함께 지역에서 의미 있는 공간을 운영하는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문화예술로 마을의 가능성을 확장하다
① 강원도 고성군 ‘명파마을’
① 강원도 고성군 ‘명파마을’
강원도 고성의 최북단에 위치한 명파리는 휴전선을 접하고 있는 대표적 접경지역이다. 명태잡이로 번성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금강산 관광 활성화 시기에는 출발 거점으로서 잠깐 활기를 띠었지만 중단 이후 황폐화되어 가고 있는 마을이다. 그동안 여러 부처의 지원사업이 시도되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난 안타까운 이력이 있다. 그러던 중 고성문화재단이 예술위의 지원으로 ‘고성 아트케이션’이라는 예술축제를 개최하며 마을의 농협 창고를 임시 극장으로 개조하고 마을의 역사와 주민의 삶을 주제로 공연을 하여 주민과 관람객 모두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앞으로 이 극장을 기반으로 지역의 전문 극단이 레지던시 작가 및 주민과 합심하여 예술마을로 만들어 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고성 ‘아트케이션 페스타’ 전경과 공연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② 강원도 태백시 ‘탄탄마을’
태백은 한때 광산촌으로 번성했으나 폐광으로 인해 매우 급속히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인구 소멸 지역이다. 이곳 출신으로서 대학에서 웹디자인을 전공한 한 청년이 귀향하여 로컬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골목의 주택을 개조한 공유 공간 ‘무브노드’를 만들었다. 이 무브노드에 디자이너를 비롯해 시각예술인, 사진･영상 작가, 음악가와 기획자가 찾아들며 마을이 활기를 띠고 있다. 탄탄마을은 행정안전부의 청년마을 사업으로 선정되어 비엔날레, 디자인 캠프, 디자인 페어 그리고 각종 커뮤니티 프로그램 등을 활발히 기획하며 문화예술 볼모지인 지역에서 문화예술의 거점이 되고 있다. 또한 ‘탄탄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어 다양한 분야의 지역주민이 참여하도록 이끌어내며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탄탄마을 ‘무브노드’ 간판 사진 ⓒ탄탄마을
‘무브노드’ 벽화마을 프로젝트 사진 ⓒ탄탄마을
‘무브노드’ 벽화마을 프로젝트 사진 ⓒ탄탄마을
태백 ‘아트티미술관’ 사진 ⓒ탄탄마을
③ 경상북도 영주시 ‘소백산예술촌’
현재 영주소백산예술촌 조국원 대표의 선친은 전통 예술인으로서 소백산 초입에 있는 폐교를 활용하여 전문 창작촌을 조성했다. 이후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아들이 돌아가신 부친의 맥을 이어 연극 및 뮤지컬 제작, 주민 문화예술교육, 마을 축제, 레지던시 등 매우 다양하고 전방위적인 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특히 젊은 연극인이 귀촌하면서 많은 청년 예술인의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지역의 타 문화예술단체와의 협업이나 지역 투어 등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동 지역에서도 소백산예술촌에 방문하며 문화예술이 지역에 기반한 국제 교류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영주 ‘소백산예술촌’ 전경 사진 ⓒ클라우드컬처스
‘2020세계유산축전’ 프로그램 현장 사진 ⓒ클라우드컬처스
‘소백산예술촌’ 상시 프로그램 사진 ⓒ클라우드컬처스
④ 강원도 속초시 ‘칠성조선소’
최근 강원도는 물론이고 전국 단위의 호응과 인기를 끌고 있는 속초 최고의 문화 명소다. 최윤성 대표의 조부모는 함경도에서 이주하며 조선소를 창업했다. 조선소가 폐업하며 대학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한 최윤성 대표가 그 산업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고, 조선소를 아내와 함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칠성조선소는 옛 조선소의 흔적을 수준 높은 디자인 퀄리티로 재구성하고 상설 전시와 함께 출판, 공연,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기획단체인 서울의 ‘무소속연구소’와 함께 매년 ‘속초아트페어’를 개최하며 지역 기반의 미술 시장이 활성화되는 데 기여하고 있으며 인근 고성의 펫푸드 브랜드 ‘동해형씨’와 반려동물 문화도 발전시키고 있다. 지역을 넘어서는 글로벌한 작가군의 앵커로서 탁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역의 주요 문화 행사의 장소로도 애용되고 있다.
‘칠성조선소’ 사진 ⓒ칠성조선소
‘칠성조선소’ 사진 ⓒ칠성조선소
‘칠성조선소’ 사진 ⓒ칠성조선소
‘2024 bac 속초아트페어’ 사진 ⓒ속초아트페어
‘2024 bac 속초아트페어’ 사진 ⓒ속초아트페어
‘2024 bac 속초아트페어’ 사진 ⓒ속초아트페어
‘2024 bac 속초아트페어’ 사진 ⓒ속초아트페어
⑤ 강원도 강릉시 갤러리 ‘소집’
지역 방송국에서 카메라 기자로 활약한 아버지와 여행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딸이 합력해서 강릉시 외곽의 소 우사를 개조하여 작은 갤러리를 조성했다. 기본적으로는 지역 작가의 전시공간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각종 클래스와 공연, 미디어아트 등 전 장르에 걸친 독보적 콘텐츠를 선보이는 대안 공간이기도 하다. 지역 예술인의 최애 공간이자 문화예술 분야 관계자가 강릉을 방문할 때 꼭 가보고 싶은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며 강릉의 대표적인 문화 명소가 되었다. 가족 운영의 성공 모델로서 부녀가 전공과 네트워크의 장점을 활용해 다양한 세대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
갤러리 ‘소집’ 사진 ⓒ갤러리 소집
⑥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꼭두인형극장’
장수군은 인구보다 사육하는 소 두수가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전북 내륙에서 인구 감소가 심각한 지역이다. 오가피와 한우 외에 특별한 농산물이 없고 인지도가 높은 장소도 없는데 최근 청년 부부가 트레일레이스(trail race)1
성지로 가꾼 후로 나름 활기를 띠고 있는 지역이다. 이 장수군의 계북이라는 작은 마을에 손인형극의 대가인 서해자 선생이 귀촌을 하며 마을에 인형극장이 생겼다. 이 공간은 도서관과 박물관 그리고 주민복지센터와 함께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장수지역활력센터와 젊은 외지 연극인이 합심하여 ‘꼭두인형극축제’도 열며 일약 인형극 마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장수 트레일레이스’ 사진 @jangsutrailrace
2024 장수 ’계북꼭두인형극제’ 개막식 사진 ⓒ장수지역활역센터
2024 장수 ‘계북꼭두인형극제’ 서해자 선생과 아이들 사진 ⓒ장수지역활역센터
2024 장수 ’계북꼭두인형극제’ 공연 사진 ⓒ장수지역활역센터
2024 장수 ’계북꼭두인형극제’ 공연 사진 ⓒ장수지역활역센터
지역주민과 예술인에게 사랑받는
거점공간의 성공 요건
거점공간의 성공 요건
위 사례의 공간들이 매우 전문적인 수준의 공간 조성과 프로그램 기획 그리고 지역 내 네트워킹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공통 요소가 있다.
우선 운영자의 전공과 경력이 출중하다. 대부분 해당 분야의 교육과 현장 경험이 풍부하며 이를 공간의 디자인과 콘텐츠 제작에 잘 활용하여 빼어난 공간 아우라를 창출하고 있다. 또한 이 공간을 채우는 전문적인 프로그램과 독창적인 프로젝트의 기획력이 뛰어나다. 해당 장르의 기본적인 공연과 전시 및 축제, 출판 등에 있어서 전문 아티스트의 참여가 돋보이며 그들의 공간 이해도와 활용도가 매우 높다. 이틀 통해 공간의 매력적인 서사를 창출하여 많은 관계자의 공감을 얻고 있다.
따라서 이에 호응하는 지역 안팎의 예술인과 기획자, 단체 및 기관이 늘어나며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 앵커로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다. 전문적인 네트워크가 공고해지고 그 안에서 다양한 협업과 공공 프로젝트가 생겨남으로 지역 문화예술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 지속적 활동은 공간의 서사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공간 브랜드 파워와 지역 인지도를 높여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팀들이 이번 예술위의 ‘소멸위기 대응 문화적 지역활성화’ 사업에 선정된 이유는 단순 지표 심사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묵묵히 지역에서 공간의 가치를 높이고 독보적 활약을 이어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지역사회나 지방자치단체의 협조를 끌어내는 데에도 훌륭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지원사업의 활용을 통해 주요 프로젝트의 고도화, 공간의 재활성화, 지역 문화 리더십의 강화를 해 나가며 인구 소멸 시대의 긍정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지역문화예술 거점공간 활성화를 위한 제언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공간을 발굴하고 재생하기 위해서는 대형 집적 시설 중심의 인프라 구축보다 이른바 마이크로 스페이스로서 촘촘히 뻗어 있는 대안 문화공간을 조성하고 이를 네트워크화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현실적으로 지역 간의 거리가 멀고 대중교통이 취약하며 이용하는 데 제약이 상당한 상황에서 많은 문화시설이 건물만 지어놓고 사용이 전무하거나 특정 단체만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다양한 대안 공간의 확충은 지역 예술인의 창작활동과 지역주민의 문화 향유를 가속화할 수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좀 더 전략적으로 공공지원을 설계하고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중앙정부나 관련 기관은 진정성을 가지고 지원과 협력을 하며 가장 일차적인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기관은 더욱 적극적인 지원 체계를 갖추고 예산을 매칭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에서 이런 문화공간의 가치에 대해 무지하거나 일부 탁월한 공간을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런 폐해를 타파하고 편견 없이 지원과 육성이 이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역의 문화예술 공간이 직접적으로는 지역 예술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지역주민의 문화 향유에 일조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측면도 강화되어야 한다. 이른바 문화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문화공간이나 축제나 단체를 적극 지원하면서 실제로는 굉장한 규모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는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직접적인 사업 수익 외에도 일자리 창출, 청년 창업을 통한 로컬크리에이터 육성, 문화복지 강화로 인한 인구 유입, 실질적 관계 인구의 증대에 문화예술 공간이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위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고 이를 계기로 더 많은 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기관이 합력하여 다원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선철(감자꽃 스튜디오 대표)
예술경영 1세대로 공연, 음반 및 극장 기획자로 활동하다가 30대 후반에 강원도 평창으로 이주해 폐교를 활용한 복합문화공간인 ‘감자꽃스튜디오’를 설립한 후,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예술로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사업을 꾸준히 전개해왔다. 현재는 문화기획자이자 연세대, 국민대, 경희대, 인하대, 경희사이버대 및 러시아 북동연방대 등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4 소멸위기 대응 문화적 지역활성화’ 사업의 자문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좋아요0
함께 읽으면 좋을, 추천 콘텐츠
문화 현장의 이슈와
건강한 정책 담론을 나누고 싶다면
웹진 A SQUARE에서 만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