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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 시대에
연극 만들기

환경 보존을 위해 실천적 예술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공연예술계에서는 작품의 제작과 운송, 실연 등
활동 전반에서 발생하는 환경 오염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창작과 주최 측은 물론 예술가,
관객 모두가 나서야 할 이때 공연예술 현장의
기후 위기 담론을 제작 방식, 축제 형식,
이야기 구성 방식 측면에서 살펴본다.
글_전강희(공연평론가, 드라마터그)
시간을 들이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공연 제작하기

We’re living in a climate crisis. … If theatre is to be part of the most vital conversation humanity faces, then it has to change its practice. (우리는 기후 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 만약 연극이 인류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대화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면 연극은 그 관행을 바꿔야만 합니다.)

영국에서 제작한 ‘씨어터 그린북(Theatre Green Book)’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씨어터 그린북은 공연예술 창작 환경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며 영국의 예술 현장 전문가들과 극장을 포함한 여러 기관이 함께 만든 매뉴얼이다. 지속 가능한 공연 제작, 공연장 관리와 운영 방안을 총 3권으로 기술해 웹상에 공개했으며, 새로운 내용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의 예시를 계속해서 추가하고 있다. 주로 극장 공연에 대해 다루는 씨어터 그린북 속 상황은 한국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구체적인 실천 방안의 지향점은 ‘우리가 한 인간이자, 예술가이자, 시민으로서 모두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향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의 관행을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가’와 관계가 있다.
관행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씨어터 그린북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예시를 읽다 보면 평소 공연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꼼꼼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무대 의상으로 청바지 한 벌을 마련할 경우 먼저 극장이나 단체가 소유하고 있는 물품 항목을 점검해야 한다. 그다음 출연진들이 가지고 있는 옷을 점검해야 한다. 적절한 바지를 찾지 못했다면 물품을 사기 전에 주변의 지인이 해당 옷을 소유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이후에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지인에게 그 옷을 빌리러 가기 위해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기종인지, 운전을 직접 한다면 어떤 차종인지, 이보다 앞서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지를 알아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공연이 마무리되면, 이 바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다시 돌려줄 것인지, 그렇다면 이때에는 또 어떤 교통수단을 타고 지인을 만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비용도 절감하면서 탄소 배출량도 감소시킬 수 있는 이 단순한 과정을 위해서는 시간 투자와 이를 실행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가능한 대부분을 사전에 계획하고, 무언가를 만들거나 구매하기 전에 기존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재사용할 마음이 있어야 한다.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물건을 먼저 구입하기보다는 가상모형을 만들어보면서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하고, 현장을 정확하게 통제하는 것도 필요하다. 씨어터 그린북에서는 지속 가능한 공연 제작 모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씨어터 그린북 ⓒTheatre Green Book

씨어터 그린북 ⓒTheatre Green Book

실제 무대 제작에 들어가기 전 친환경 지표 설립(Set Green Book Standard), 친환경 콘셉트 회의(Green Concept Meeting), 친환경 전략 회의(Green Card Meeting)를 진행한다. 이후 제작을 거쳐 공연을 올리고 철거와 폐기 이후 성과를 검토하는 평가와 피드백 시간을 갖는다. 철거와 폐기의 기준은 재사용과 재활용 여부에 맞춰야 한다. 위 그림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실 실제 제작 시간보다 이를 계획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몇 배는 더 길다. 연출가가 무대에 올릴 작품을 분석하고 연출 방향성을 정하고,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설계하고, 디자이너들이 작품 콘셉트에 맞춰 결과물을 만드는 것만이 공연을 준비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아니다. 작업 과정 안에 기존의 연극 만들기에서는 고려하지 않았던 시간이 할당돼야 하며, 이 과정을 운용할 수 있는 새로운 포지션의 담당자가 있어야 한다. 일정을 계획하고 예산을 수립하는데 기존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인건비 항목이 늘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럿이 함께 만드는 축제에서
내딛는 발걸음
지속 가능한 공연 제작은 개별 단체나 개인 예술가의 시도만으로 주목할 만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여러 단체가 동시다발적으로 뜻을 공유할 때 시간과 예산이 감축될 수 있다. 몇몇 축제들이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 2021년을 기점으로 기후 위기 시대에 어떤 축제를, 누구와 함께, 어떻게 만들 것인지 예술가들과 고민을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연극제는 ‘확장하는 페미니즘과 기후 위기’를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온오프라인에서 ‘기후정의 티타임’을 운영하는 블루밍루더스의 이혜원 연출가의 사회로 <고기, 돼지>라는 작품을 만든 바람컴퍼니 한윤미, 보드게임 <움직이는 숲>을 만든 김보람이 패널로 참여했다. 관객 참여형 공연인 두 작품은 체험을 통해 관객에게 기후 위기 시대에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eco fringe(에코 프린지): 인류세에 대처하는 예술가이드’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며 축제를 준비했다. 현수막과 인쇄물을 친환경적으로 제작하는 방식을 조사하고, 참여 예술가들과 정보를 공유했다. 2022년에는 축제 참여 예술가와 단체를 대상으로 한 프린지만의 기후 위기 관련 워크숍을 만들었고, 올해에도 이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정규 프로그램으로 정착했다. 춘천마임축제는 2021년 ‘지구의 봄’이라는 주제로 일회성 홍보물을 줄이고 다회용기 사용을 장려하며 쓰레기를 감축했고 야외 공연에서 전기 사용을 자체 개발로 전환하고자 노력했다. 2021년과 2022년 노력의 결과로 올해는 지역과 좀 더 긴밀히 협업할 기회를 얻게 됐다. 축제와 지역이 도시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에코 프린지 워크숍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에코 프린지 워크숍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에코 프린지 워크숍 ⓒ전강희

무대 위에 올라가는 이야기들
이처럼 씨어터 그린북을 참조해 제작 방식을 바꾸고, 여러 축제의 친환경 실천이 일상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대 위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만들고 있을까?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있어 관행을 바꾼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공연예술인의 무대 위의 말하기 방식은 기후 위기와 어떻게 만나고 있을까?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국립극단

먼저,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구자혜 연출가가 2021년에 국립극단에서 시즌 단원과 자신의 단원들과 무대에 올린 <로드킬 인 더 씨어터>에 대해 살펴보자. 이 작업은 기후 위기라는 주제를 다루는 작업이라고 명명된 적은 없지만, 동시대 연극인들이 타자의 재현, 좀 더 구체적으로 동물의 재현에 대해서 폭발적인 관심을 갖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 작업에는 고라니, 원숭이, 비둘기, 개 등이 등장한다. 떠돌이 개인 라이카를 제외하고 이름 없이 1, 2, 3이라는 숫자 정도만 부여된다. 극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인간의 관점이 아닌 동물의 관점에서 상황을 이야기하고자 노력한다. 인간이 사는 곳에서 죽음에 쉽게 노출된 이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상황을 표현하고 묘사한다. 이 또한 인간의 언어로 객석에 전달되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점이지 않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비인간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예술 현장의 창작자들이 다각도로 고민해 볼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기후비상사태:리허설 ⓒ국립극단

2022년 국립극단에서 올라간 전윤환 연출의 <기후비상사태:리허설>은 기후 위기라는 주제하에 만들어진 작업이다. 전윤환 연출은 일상을 그대로 무대 위로 가져오는 방식을 선택하면서 기존의 무대 위 재현 방식을 택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지구의 시간이 24시간이라면 인류에게 남은 시간은 단 60초뿐’이라는 가설에 기대어 이 시간이 오지 않도록 리허설을 해보자는 취지다. 유명한 환경운동가들의 말을 군데군데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윤환은 일상의 실천을 무대 위로 가져올 방법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익숙한 이야기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처음 제기되는 물음이기도 하다. 관객이 각자 다른 경험치 안에서 기후 위기를 체감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 극이다. 이 프로덕션은 자체적으로 친환경 매뉴얼을 만들었다. 텀블러를 매일 사용하는 것부터 무대 위 재료를 재활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또한 관객들이 극장에 도착하기까지 탄소를 얼마나 배출하는지 데이터화하면서 내용과 형식 면에서 주제에 접근할 방안을 만들고자 했다.
밤이 없는 여름 ⓒ섬우주

밤이 없는 여름 ⓒ섬우주

공연 만들기의 관행을 바꾸는 것은 관객이 보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9월 15일부터 24일까지 삼청동에 위치한 과학책방 갈다에서 기후 위기 관련 과학 방탈출 게임 <티핑포인트>가 열렸다. 7월부터 8월까지 선보였던 공연으로 9월에는 지난번보다 회차를 줄여 진행했다. 4개 방을 차례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방 곳곳에 기후 위기와 관련된 질문들, 이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놓여있다. 빙하 형성 시기 정보를 알아내 현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빙하코어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단순한 오락물로서만 게임을 즐기기에는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게임이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일종의 이머시브 시어터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7월에는 신촌문화발전소 소극장에서 드라마터그, 무대 디자이너, 사운드 디자이너로 구성된 ‘섬우주’의 공연 <밤이 없는 여름>이 올라갔다. 이머시브 다이닝을 표방하는 공연으로 회당 20여 명 정도의 관객을 받는다. 4가지 코스가 마치 식당의 메뉴처럼 ‘짙은 그늘’, ‘눈의 맛’, ‘검은 빙하’, ‘하얀 밤’ 순서로 진행된다. 각자의 관객 앞에 4개 코스를 상징하는 가상 칵테일이 놓이고, 관객이 이를 직접 조합한다. 날씨와 감정, 역사, 기후 위기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연이었다.
지금까지 공연예술 현장의 기후 위기 담론을 제작 방식, 축제 형식, 이야기 구성 방식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종종 동료 예술가들과 기후 위기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이 주제로 지금 당장 작업을 만들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다뤄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오랜 관행을 바꾸는 것은 개인의 일로 머물 수 없으니, 무엇이든 함께 논의하는 자리가 자주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전강희
전강희(공연평론가, 드라마터그)

영문학과 연극학을 전공하고 예술 현장에서 드라마터그, 축제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극적 언어를 탐색하고 장르 간 해체와 협업이 활발한 공연 만들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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