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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술학교는
어떤 인재를 배출하는가?

미술대학은 예술가를 양성하는 중요한 터전이지만,
현장이나 진로와는 동떨어진 커리큘럼이나
시대에 맞지 않는 인재상으로 예술과 교육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다.
미술대학의 교육 방식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예술가의 사회 진출과 장기적인 직업 발전을 위해
개선이 필요한 지점들을 찾아본다.
글_임근준(미술 및 디자인 이론, 역사 연구자)
커리큘럼은 누가 결정하는가?
왜 설명해주지 않는가?
예술인의 전성기는 짧다. 성장하는 시기에는 모자라다는 내외(외부와 나 자신으로부터)의 질책에 시달려야 하고, 전성기가 지나면 한물 갔다는 소리를 견디며 살아야 한다.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내외의 질책을 받아야 하는 시기 가운데 으뜸은 학창 시절이다. 하지만 더 힘든 시기는 졸업 이후에 온다. 디자인 분야를 제외하면, 미대 졸업자에게 ‘커리어 계발’이라는 말처럼 막연하게 들리는 게 또 있을까. 먹고 사는 길을 약속하지도 못하는 미술대학, 그것도 회화과나 조각과 조형예술과 등에 진학하려는 이들이 여전히 넘쳐나는 이유는 뭘까. 신인 작가가 ‘경험 수집’의 일환으로 갖춰놓은 장식적 이력을 길게 CV에 적는 현상도 과거엔 보기 어려웠다.
미술학교의 가장 큰 문제는 학부에서나 대학원에서나 학생의 입장에서 교과 과정, 즉 커리큘럼의 구성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것이다. 정년 트랙의 교수들이 뭘 전문적으로 다루고 연구하는 사람들인지 설명해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 풍문이나 선배들로부터 여러 주요 정보를 얻어들어야 하는데 그 설명이 맞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학생들에게 새로운 관점의 창작 및 연구 경향을 알려주는 이들이 비정년 트랙의 겸임 교수나 강사인 경우도 많다. 어떤 이들이 학교에 출강하고 있는지, 또 언제까지 어떤 수업을 맡아서 가르치게 될 것인지, 전체적인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사람은 학과장직을 맡고 있는 정년직 교수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그저 운에 달린 일이 된다.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수강 신청을 하고 수동적으로 학점을 받고 떠밀리듯 학교를 졸업하기 일쑤다.
어느 미술학교를 보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떻게 해서 안 망하고 버티는지 신기해 뵈는 경우도 흔하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교육자들이 일군 금자탑에 금이 가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을 타고 유행했던 수정주의 커리큘럼들은 유효 기간이 지나서 급변하는 시대에 뒤처지고 말았지만, 아무튼 유명 미술학교들은 신입생을 모집하며 버티고 있다. 책임을 져야 할 포스트모더니즘 1세대 교수들은 노쇠해서 이미 은퇴하고 학교를 떠났거나 아니면 이미 세상을 떴다. 그러니 현역 교수들도 ‘내가 뭘 어찌하리오?’ 상태인 경우가 태반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BIPOC(블랙/인디지너스/피플오브컬러) 학생 그룹이 새로 조직되고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의 부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북미 지역 미술학교들의 경우, 백인 교수들이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사태가 전개되기도 했다. (그에 이어 전개된 교내 분규는 팔레스타인 지지 활동 금지 조치를 둘러싼 투쟁이 됐고.)
미술대학 실기시험을 준비 중인 학생들 Ⓒ인천일보

미술대학 실기시험을 준비 중인 학생들 Ⓒ인천일보

그래도 실기 과정의 학생들에게 여러 개안의 기회를 제공하고, 작업 세계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크리틱 시간에 유의미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교육자들이 얼마 전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미술학교를 학위 제공 서비스업 기관으로 바라보는 세대가 등장하고 여러 고발이 난무하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외의 미술대학 교육자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법을 방어 기제로 익히게 됐다. (문제 학생을 빨리/조용히 졸업시키면 더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까.) 결함이나 문제가 있는 작업에 매달리는 학생을 봐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듣기 좋은 소리나 하고 마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됐다. 다소 놀랍지만,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반복하는 친절의 가면을 쓴 교수를 더 선호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니 왕년의 주요 미술학교에서 걸출한 인재가 배출되는 모습은 보기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사실 진짜 더 큰 문제는 학생 선발 방식에 있다.
미술학교의 성패는 어떤 인재를
모아놓느냐에서부터 갈린다
국내 몇몇 대학의 경우 386 세대의 교수들이 기존의 입시 제도를 ‘창의력 테스트’로 뜯어고치면서 유입되는 학생들의 다양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의 석고 데생이나 수채화나 구성이나 두상 소조 등의 테스트가 학생들의 창의력을 파괴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면서 복잡하고 난해한 창의력 테스트형 실기 시험들이 나타났다. 서울대 미술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그 창의력 테스트야 말로 최고급 입시 학원에서 돈 주고 배워서 통과하기에 딱 적당하다는 데 있다. 과거엔 주요 미술학교에 최상위 부유층 학생과 빈곤층 학생이 골고루 분포하는 모습이었지만, 요즘은 아니다. 중상류층 학생으로 균질화돼 있다.
입시 논란 등 고질적인 문제로 교육부로부터 눈총을 받던 홍익대 미술대학이 아예 비실기 전형으로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고등학교에서 비실기로 입학한 이들이 실기 교과 과정에 부적응하는 모습이나 그 과결(즉 미술 전문가가 되는 길을 포기하기)은 명약관화했다. 입학시험은 우수한 천재를 뽑는 테스트가 아니다. 교과 과정에서 수학할 기본 능력을 갖춘 이(가급적 빈 서판에 가까운 학생)를 가려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예 적응하지 못할 학생을 가능성 어쩌구 하면서 뽑아 놓으면 뽑힌 학생에게도 동학들에게도 학교에도 불필요하게 힘겨운 일들이 펼쳐진다.
석고 데생은 오귀스트 로댕을 배출한 ‘프티트에콜’(Petite École; 3년제 상업 미술 학교)에서도 사용하던 교육 방법으로 지나치게 단순하고 시대에 뒤쳐진 것 같지만, 꽤 효과가 있다. 대상을 고찰하고 본질적·구조적 형태와 디테일을 나눠서 뇌내 시뮬레이션하고, 그를 선묘의 반복으로 화면 위에 재현해내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눈과 손의 협응을 통해 조형 사고를 전개하는 법을 익힌다. 또 동일한 대상을 여러 동학들이 다르게 그려낸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개개인의 차이가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파악하게 된다(대부분의 차이는 손이 아닌 눈에서 온다). 창의력 테스트형 입시에 맞춰 다종다양한 재료로 자유롭게 데생을 익힌 이들이 눈과 손의 협응을 통해 조형 사고를 전개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결국 잘못 개선해놓은 제도의 피해자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수채화나 두상 소조 작업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허비하는 방식 같지만, 암기식으로 가르치지만 않는다면 값싸고 효율적인 교육으로 정상 작동한다.
특히 더 중요한 점은 석고 데생 등의 구식 실기 교과의 시절엔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도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복잡한 전형에 맞춰 부모/보호자가 정보를 사전에 습득하고 그에 맞춰 딱 맞는 학원에 보내 포트폴리오와 시험을 준비시켜야 하는 시대이니 가난한 집안 출신들은 미대에서 만나기 어렵게 됐다. 그 결과, 오늘의 미술대학에서 남과 다른 각도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부류의 학생은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서울대 미술대학의 경우 복수 전공 트랙의 학생들은 엔간해선 작가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평안한 중상류층 집안의 2-3세로 태어난 이가 미술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미술계의 여러 부조리와 불합리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굳이 고생스러운 작가의 길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다. 위대한 예술가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부류의 예술가가 되겠다고 꿈을 꾸는 건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 차별적 현실이 너무나 싫어서 망상의 세계로 도망치며 성장기를 보낸 이들, 그리고 더 나아가 눈물로 지은 그 망상의 세계를 실현하고 남과 함께 나눠버리고 말겠다고 작심한 이들이다. 행복하게 사랑받으며 성장해 기성 체제에 대한 반감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는 중상류층 집안 자제들에게 부르주아 세상을 무너뜨리는 꿈을 꿨던 아방가르드 미술이나 그 일부를 계승한 네오-아방가르드 미술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퍽 아이러니하다.
홍익대의 경우 2024학년도 미대 신입생은 총 646명(서울 383인, 세종 263인)이라고 하니 참으로 황당한 숫자라 하겠다. 그래서야 양질의 실기 교육이 이뤄질 턱이 없지 않겠나?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매해 반복될 수 있을까? 바로 홍익대 등 주요 미술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문제라고 합리화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바로 당신!
교육학의 딜레마: ‘기성의 가치에 도전하는
현대미술’을 가르칠 수 있나?
20-21세기 미술·디자인 학교의 딜레마는 같다. ‘기성의 가치에 도전하는 현대미술’을 대체 누가 가르칠 수 있나? 진취적 가치를 추구하는 전문가로서 일가를 이룬 미술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가르쳐야 한다. 학교를 만들어 놓고 기성의 미술을 가르치면, 어떻게든 그 체제를 뒤엎겠다고 도전하는 이가 나오고 어쩔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실패하고 사라져가지만, 또 누군가는 또 기적적 성공을 거둔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에콜데보자르 ⒸWikipedia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에콜데보자르 ⒸWikipedia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폴 세잔은 제대로 된 미술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 사실상의 독학 화가였다. ‘현대조각의 아버지’로 불린 오귀스트 로댕은 세 번이나 에콜데보자르(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입시에 실패한 ‘프티트에콜’의 졸업생으로서 건축용 조각을 제작하는 도제로 일하며 오랜 무명 생활을 견뎌야 했다. 구식 교육과 절연하고 현대적인 조형 이념과 창작 방식만을 가르치기로 했던 바우하우스(1919-1933)가 출범했다고 해서 졸업생들이 다들 위대한 변혁의 전선에 성취를 거둔 것도 아니다. 바우하우스 졸업생 가운데 성취를 거둔 이들은 허버트 바이어, 마르셀 브로이어, 요제프 알버스와 아니 알버스, 군타 슈토츨 등 몇몇으로 사실 대부분 바우하우스 입학 이전에 다른 곳에서 교육 과정을 거친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서 실험적인 학교로 이름을 날렸던 블랙마운틴컬리지(1933-1957)의 경우에도 역시 밥 라우션버그, 싸이 트왐블리, 루스 아사와 등을 배출했다고 해도 역시 다수의 졸업생들은 조용히 노년을 맞거나 이미 무명으로 세상을 떴다.
앙리 마티스는 스승 귀스타브 모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데도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던 아카데미 마티스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배출됐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나마 한스 푸어만이 마티스의 제자 가운데 가장 크게 성공한 화가다.) 파블로 피카소나 마르셀 뒤샹이 훌륭한 제자를 키워냈다는 소리도 금시초문이다. 과거 한때 홍익대에서 걸출한 추상화가들이 배출된 것도 실상 어느 정도는 ‘국대안(國大案) 파동’의 산물이다.
1946년 미군정청 학무국이 일제 시대의 여러 단과대학들을 통폐합해 단일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안을 발표하자 1948년까지 2년간 통폐합 대상 학교들의 교수, 학생들이 격렬히 반대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울대 미술대학의 설립을 주도한 장발은 시위 참여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제적 처리했고, 김환기 유영국 등도 교수직을 사직했다. 김환기가 홍익대에 자리를 잡고 서울대에서 제적된 학생들, 즉 윤형근 등을 받아들임에 따라 진취적 학생들이 홍익대에 집결하게 됐던 것. 자칭 ‘위대한 화가’ 박서보도, 부산 피란 시절과 종로 장안빌딩 시절의 홍익대가 배출한 인재. 와우산 앞에 자리 잡은 홍익대에서 공부한 인재들은 그 정도로 파격적이진 못했다. (반면 서울대는 꾸준히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을 배출했다. 현실과 발언의 민중미술가들 다수도 서울대 출신들. 그런데 걸출한 성취를 거둔 신학철과 김봉준은 또 홍익대 출신.)
하지만 20/21세기 미술·디자인 학교에는 또 다른 딜레마가 있다. 미술·디자인 학교에서 구체적 교과 과정을 강조해서 학교가 내용-지향적(content-oriented) 성격을 추구하면 전문적 직능 교육의 특성을 띠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가면 종합대학교에 단과 대학으로 존재할 이유는 없어진다. 장점은, 빠른 속도로 기능적 숙련도를 갖춘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것. 과거의 홍익대(이대원, 김환기 학장이 이끌던)는 내용-지향적 학교였다.
반대로 교육학적 가치를 강조해서 즉 학교가 과정-지향적(process-oriented) 성격을 띠게 되면, 인문학적(humanistic) 교육의 특성을 띠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가면 종합대학의 이상에 맞춰 제너럴리스트를 길러낼 수는 있지만, 기능적 숙련도를 갖춘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는 소홀하게 된다는 것. 장발 학장 이래 서울대 미대는 대체로 미국식 교육 모델에 맞춰 과정-지향성을 띠었다. 따라서 학부 졸업생들은 “미대를 나왔는데 이런 것도 못해?”라는 말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기 일쑤였다.
뉴바우하우스와 라슬로 모호이너지 ⒸUnframed·Wikipedia

뉴바우하우스와 라슬로 모호이너지 ⒸUnframed·Wikipedia

뉴바우하우스/시카고디자인학교/디자인대학에서 라슬로 모호이너지 같은 이들은 이러한 양가성을 통합하고자 노력했지만, 창조적 통합이라고 하는 건 현실에선 꿈같은 이상에 불과했다. 모호이너지는 하나의 매체로 여러 주제를 다루고 하나의 주제를 여러 매체로 다루는 훈련을 반복하면, 누구나 자신과 같은 총체예술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건축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하지만 보통의 학생들은 과도한 교육 프로그램 속에서 혼란과 한계나 느꼈을 것이다.
21세기로의 전환기에 매체로 나뉘는 구식 전공 과정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회화과, 조각과, 그래픽디자인과, 산업디자인과 등으로 나누는 방식을 폐기하고 통합 교육을 실시하라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며, 구식 교과 체계와 과정을 폐지하고 융합적 커리큘럼을 도입하는 국제적 학교들이 몇몇 나타났다. 문제는 그런 학교를 졸업한 이들에게서 매체에 대한 이해도가 다소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 현대미술에서 매체성과 물성에 대한 감각은 필수이므로 그런 신교육만을 거친 작가들은 소위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바탕으로 커리어를 이어 나가다가 아이디어가 소진되면 커리어 중단의 위기를 맞는 패턴을 반복했다. 결국 교육제도의 대대적 혁신은 의외의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니 있는 제도나 보완해가며 잘 운영하는 편이 낫다는 소리가 된다. 작가가 되는 길 외로 다양한 직업적 길의 가능성을 제시해보겠다고 잡다한 수업을 개설하는 경우도 유사한 부작용을 낳았다. 예술가적 성장을 위해선 하나의 매체에 집중해 제한적인 실험을 지겹도록 반복하는 시기가 필수다. 불행히도 왕도는 없다.
미술대학의 실기 과정을 졸업했다고
작가로 성공할 필요는 없다
안정적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제1의 이슈라면 굳이 작가를 지향할 필요는 없다. 미대를 나왔다고 꼭 미술인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작가나 큐레이터나 비평가로 버티며 사는 길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혹은 압박감과 고립감으로 인해 정신적 건강이나 안녕이 흔들릴 때 다른 더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이래저래 소위 ‘인서울대학’의 진학을 위해 어거지로 미대에 진학한 경우도 적잖다 보니, 그만두고 싶어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적잖다. 본인의 건강과 행복과 안녕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예술이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자존심이 그런 걸 포기해야 할 정도로 가치 있거나 중요하진 않다. 트위터에서 ‘존버’하라고 서로 격려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평범한 직장인의 경우에나 해당한다. 예술계의 대다수 청년에게 ‘존버’는 답이 아니다. 특히 지금 시대엔 그렇다.
예술계엔 원래 예술 활동만으로 먹고 살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필립 글래스는 배관공·택시 운전사로 일했고, 부유층 출신인 마르셀 뒤샹도 미술품 거간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레이스 하티건은 뉴욕에서 난방도 수도도 없는 작업실에서 캠핑하듯 살았지만,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자식까지 키웠다. (대신 체력이 남달랐다.) 그러고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능력자들도 젊어선 예술 활동만으론 못 먹고 살았으니 예술 활동만으로 생계를 꾸리며 버텨야 하는 악조건이라면 더 안정적인 길로 방향을 트는 게 맞다는 이야기다. 미대에 진학한 모두가 훌륭한 미술가·디자이너가 되려고 고통을 감내할 까닭은 없다. 그런 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극소수의 일이다. 보통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보통의 길을 찾는 게 맞다. (하지만 역시 그 길을 찾는 것은 각자 몫의 일이다.)
추신)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들의 사회 진출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이슈가 외국인 유학생 차별이다. 한국의 미술대학을 졸업한 유학생들을 왜 한국미술계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각종 지원 제도나 전시에서 철저하게 배제돼야 하는가? 왜 통계 자료마저 부재하는가? 한국에 유학 온 똑똑한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면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반복해서 듣게 되는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부모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좋아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한국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한중일 이외의 아시아 지역에서 나고 자란 경우라면 중국을 더 우선순위에 놓는 경우가 많다. 정치 체제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
2. 한국에 와서 인종주의에 놀랐다. 비한국계 인물이나 가족이 한국에서 몇십 년을 살아도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한국계 한국인이 절대다수라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다.
3. 한국 사회의 공고한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동년배 청년들에게 더 놀랐다. 거의 모두가 인종주의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웃어넘긴다나. (청년이 미래의 희망이라는 소리가 2020년대의 한국에선 거짓말이 됐다.) 한국의 중산층 청년들이 카피 페이스트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노는 모습에서 슬픔을 느낀다.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
4. 졸업 이후 비자를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작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비자를 받기가 굉장히 어렵다. 한국에서 유학한 이들의 커리어와 역할을 생각하는 정치인도 없고 교육자도 없다. 한국 사회의 인구 절벽을 보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또 인재 유치를 위해 변화를 시도해야 할 것 같은데도 아무런 개혁의 기미가 없다.
5. 모국어 외로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한국 유학파 인재들이 많지만, 의료 관광 마케터 등으로나 일하는 게 소모적이라고 느끼게 된 이들은 다수가 결국, 깊은 상처를 품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6.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터놓고 풀어놓을 상대를 찾기도 어렵고 그런 대화나 토론의 장은 아예 한국에서 만날 수 없었다. 몇 년이나 한국에서 소중한 청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대학의 소셜미디어 채널에선 유학생을 홍보 수단으로 이용할 뿐으로 진짜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
왜 아무도 이런 현실에 분노하지 않는가? 이런 악순환이 한국의 미래에 도움이 되겠는가? 외국인 유학생을 차별하는 한국/서울의 미술계가 국제적 현대미술의 허브로 부상할 턱이 없지 않겠나? 프리즈아트페어 기간에 허망한 파티를 기획할 여력과 돈이 있다면 이미 한국의 미대에 진학한 외국인 청년들을 모아 그들의 꿈과 희망에 귀를 기울여보길 권한다. 그들이 우리고, 또 재정의돼야 하는 우리의 미래다.
임근준
임근준(미술 및 디자인 이론, 역사 연구자)

1994-1995년부터 2000년까지 미술가, 디자이너이자 인권운동가로서 실험기를 보냈다.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디자인 연구자 모임인 DT 네트워크 동인으로 활동했고,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2008년 이후 당대 미술이 붕괴∙해체되는 과정에서,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과 ‘아시아의 새로운 상호 연결성으로 문화예술의 미래를 창출하기’를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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