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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진리 시대의 기술과 예술
양날의 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인간의 감각과 창조성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발전을 거듭하며 예술의 존재 양식을 변화시켜왔다.
예술과 기술의 결합은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하지만
경험하지 못한 낯선 세상을 향한 두려움도 촉발한다.
진보와 혼란, 성장과 파괴. 양날을 모두 가진
예술과 기술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글_최진석(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기술이 예술을 구원하리라
저 유명한 플라톤(Platon)의 우화에서 출발해 보자. 깊은 동굴에 갇힌 수인은 지상 위, 세상 사물의 본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지하에 발목이 묶인 그는 늦은 밤 달빛에 비쳐 동굴 벽면에 반사된 나무와 바위, 동물의 그림자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아마도 수인에게 사물은 겉면 테두리의 형상으로만 구별되는 존재이기에, 각각의 사물이 개별적인 특징이나 고유한 표정, 개성적 무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플라톤은 예술을 외관에 대한 모방, 즉 달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로 간주했다. 산을 묘사한 그림이 산 자체가 아니듯, 실연을 읊조린 시는 실연한 마음 자체가 아니다. 그처럼 예술작품은 사물의 본래면목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외적 형태만을 엇비슷하게 모사한 것의 허구적 반영에 불과하다. 핵심은 얼마나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에 있지 않다. 원본과 시뮬라크르(Simulacre, 모사물) 사이에서 성립하는 불일치, 진리와 비진리의 절대적인 차이에 놓여 있다.
미메시스(Mimesis), 곧 모방이 예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에는 원본과 시뮬라크르,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절대적 차이를 상대적 간극으로 바꾸는 것이 예술활동의 궁극적 목표였다. 실제로 예술의 오랜 역사는 시뮬라크르를 원본에 가깝게 끌어 올리려는 노력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가 진짜 나무와 너무나 흡사해 무수히 많은 새들이 날아와 부딪혀 죽었다는 전설은 원본과 시뮬라크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예술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보다 사실에 가깝게, 더 정확하고 더 세밀하게 모방하는 것이 예술의 지위를 비진리로부터 진리로 돌려세우는 길이라 여겨졌다. 문학의 경우, 17세기 이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거치며 19세기의 사실주의에 이르러 이 경로가 완성됐다. 수백 페이지 정도는 써야 ‘소설책’이라 불릴 수 있던 까닭은, 장황할 정도의 스케일만이 실제 세계의 ‘리얼리티’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은 탓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에르미타주 미술관(Hermitage Museum)의 일리야 레핀(Ilya Repin) 전시실에 걸린 초대형 그림들이 이전의 어떤 사실주의 회화보다 월등함을 자랑했던 것도 그 규모와 정밀함 때문이었다.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가가 예술의 진정성을 규정짓고, 그로써 작품의 진리치가 담보되곤 했다.
일리야 레핀의 <1901년 5월 7일국가 의회 100주년 기념 평의회>

일리야 레핀의 <1901년 5월 7일국가 의회 100주년 기념 평의회> ⒸWikipedia

물론, 미메시스를 본령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예술은 결코 현실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 진품은 진품이고 가품은 가품이니까. 그래서 일어난 전환이 진리의 소재 자체를 반대 방향으로 되묻는 것이었다. 인상파 화가 모네(Claude Monet)는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을 그리면서 매일 매시간 날씨나 조도, 안개의 유무 등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다르게 보이는 성당의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짜냐는 물음을 던졌다. 현실 자체가 고정돼 있지 않은데, 시뮬라크르가 특정한 기준을 현실이고 진리라고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카프카(Franz Kafka)의 문제작들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이 어지러이 뒤얽히고 통상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묘사에 우리는 기겁하지만, 실상 우리의 현실 자체가 원인이나 목적에 따라 정연하게 해석되지 않는 상황들의 (불)연속 아닌가? 시뮬라크르의 진리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는지 혹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지 되물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다소 철학적인 논변으로 흐를 듯한 이 질문과 답변을 틀어막은 것은 20세기를 전후한 기술의 발전이었다. 가령 사진은 이전까지 사실주의를 표제 삼았던 논쟁 자체를 종결시키며 등장한 새로운 기술이었다. 어느 누가 사진보다 더 ‘리얼’하게 대상을 재현할 수 있는가? 제아무리 세밀한 묘사력을 자랑한다 해도, 어떤 소설가가 사진보다 더욱 ‘리얼’하게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까? 뒤이어 나타난 영화는 정적인 재현예술을 역동화시킨 장본인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미메시스, 현실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또 리얼한 것으로 모방하느냐는 예술의 오랜 질문은 기술에 의해 극복됐노라 선포됐다. 예술이든 기술이든 같은 ‘Art’를 어원으로 공유하니 물음과 해답이 애초에 함께 있었노라 말해도 좋을까? 거의 100여 년 전의 상황이다.
챗GPT, 예술과 기술의
환상적 종합일까?
예술이 그저 모방하는 기술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차라리 진리에 대한 물음과 관련돼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다시 말해, 기술의 개입으로 인해 질문이 ‘진리란 무엇인가?’로부터 ‘어떤 진리가 존재하는가?’로 바뀌었다. ‘무엇(what)’에서 ‘어떤(which)’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전자가 진리의 존재 여부에 이분법적 답안을 요구한다면, 후자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진리의 복수성을 둘러싼 답안을 상정한다. 요컨대 진리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묻는 개연성이 문제일 때 사실주의 예술은 사진과 영화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진과 영화로 복제되는 현실과는 ‘다른’ 리얼함이 문제일 때 예술은 지속가능성의 새로운 명분과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진술의 발명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단지 현실을 똑같이 재현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육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던 현실,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다른’ 현실의 존재 자체가 드러났기에 사람들은 경이에 젖어 들었다. 접사(Close-Up)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인간의 피부에 밀착해 찍은 사진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단순히 머리와 몸뚱이, 팔다리와 손발 등 신체 부위들의 결합체라고 알았던 인간의 몸을 정밀하게 확대 관찰한 사진은 우리 안에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드러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지문과 관절부를 잇는 잔주름들, 미세한 땀구멍 등을 근접 촬영한 사진은 자신의 것이라 당연시하던 신체를 낯선 사물처럼 여기게 만든 기술의 충격이었다. 다른 한편, 사람이 없는 도시와 거리를 찍은 사진은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를 낯선 대상으로 간주하게 만들어 주었다. 외젠 앗제(Eugene Atget)의 사진은 너무나 익숙했기에 몰랐던 우리 삶의 ‘다른 풍경’들을 펼쳐냄으로써 인간적 감각만이 이 세계의 유일한 진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기술과 결합한 예술은 진리의 참모습이 여러 겹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원본도 시뮬라크르이며, 진리도 시뮬라크르라는 뜻이다.
외젠 앗제의 <텅 빈 거리>

외젠 앗제의 <텅 빈 거리> ⒸVisit the V&A

문제는 ‘다름’, 그 차이의 감각이다. 추상적 관념 속에 진리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아니라, 다르게 느끼고 그 차이를 얼마나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느냐에 예술의 다른 길이 놓여 있다. 기술적 진화는 미메시스의 오랜 진리관을 깨뜨리고 ‘다른’ 진리, ‘다른’ 예술의 지평을 열어젖혔다. 예술은 인간의 고유한 개성과 감수성의 표현이자 진리의 표명이라는 낭만적 믿음이 그저 도구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기술에 의해 돌파된 셈이다. 이런 경향은 기술의 진보가 전면화된 20세기를 넘어 우리 시대에 이르러 더욱 급진화됐다. 2022년 11월 30일에 첫선을 보이자마자 전 세계적인 주목과 경탄을 받으며 인간의 미래에 대해 근본적인 의구심을 던지게 만든 ‘챗GPT(ChatGPT)’의 탄생을 떠올려 보라. 간단히 말해, ‘대화형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챗봇’이라 표현해도 좋은 챗GPT의 상세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더 전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예술과 진리라는 우리의 논제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 보자. 챗GPT가 우리의 놀라움과 감탄을 사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실시간으로 인터넷 네트워크에 접속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인간의 언어로 즉각 전달해준다는 데 있다. ‘팩트’를 수집해서 열거해 준다는 게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창의적’으로 조합해서 새로운 문맥 속에 집어넣고, ‘예술적’ 풍미를 추가해 준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특정 작가나 예술 사조의 경향성을 포함해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작곡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정된 스타일로 시나 소설조차 순식간에 지어낼 정도이니 어지간한 예술가 수습생은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더구나 전 세계적으로 이 같은 과제를 반복 수행하면 할수록 데이터의 축적과 숙련성도 함께 향상되는 법이니 인간을 넘어서는 AI 예술가에 대한 숙원이 드디어 그 끝을 볼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개인적으로 그런 미래가 조만간 닥치리라 전망하는 편이다. 관건은 그 같은 미래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고야 만다는 데 있다.
예술은 진리를 좇고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창안하고 제시하는 활동이다. 이 점에서 챗GPT의 능력은 근본적으로 예술적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톨스토이, 베토벤 같은 전통적인 예술가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필요한 데이터만 집어넣으면 당장 학생들의 수업 과제나 회사의 기획안을 척척 만들어내는 챗GPT는 기술적 ·예술적 활동의 양면을 갖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수업 과제나 기획안에 대해 독창성이나 창의성, 가능성을 두고 평가하지 않는가? 절대적이고 단일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다수가 지닌 다양한 개성과 안목, 독자적인 재능을 중시하고 또 예술적 능력으로 고평하는 우리 시대에 챗GPT가 기술과 예술의 종합적 대변자로 나서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이를 토대로, 이제 기술이 진리를 창안하고 예술적인 것으로 각인하는 시대에 완전히 접어들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성싶다. 진리는 여러 겹이며, 이를 적극적으로 예시하는 예술은 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는 탓이다. 자, 그럼 우리는 마냥 낙관해도 좋은 걸까?
지금은 검 끝의
서늘함을 느껴야 할 때
현대는 동시에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라고 부른다. 유일무이한 진리관이 저물고 다중적인 진리, 또는 진리의 다중성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예술에서는 이미 오래된 담론이지만, 이를 사회적 국면에서 진단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역시 챗GPT와 결부시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Art)이 진리를 창안하고 제시한다는 명제의 주어는, 이제 기술(Art)로 대신해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점이다. 예술사의 여러 사례들을 열거할 여유는 없으니, 예술에 대한 인간의 고유한 감각이나 관점도 결국 기술적인 것에 의해 영향을 받고 결정됐음을 지적만 해 두자. 인간이 무엇인가를 예술적인 것으로 느끼고 인식한 것은 인간 자신의 독특한 능력 때문이라기보다, 기술에 의해 그렇게 자극받고 촉발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이 세계와 마주한 인간이 고통스럽게 고뇌하고 힘겹게 노력한 결실이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손에 쥐고 어떻게 그것을 활용해 왔는지와 관련된 기술적 발전의 평행적 효과 속에서 예술이 탄생하고 발전한 것이다. 같은 논리로, 챗GPT의 무한한 가능성은 어쩌면 우리에게 근대 예술 너머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전통적인 예술 형식을 답습하고 대중에게 익숙한 예술성의 형상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조만간 인간의 지능과 재능을 뛰어넘는 낯선 예술의 단초를 AI가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챗GPT로 대변되는 기술적 진화에 거는 예술의 미래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하지만 정반대의 측면도 분명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기술에 의해 예술적 능력을 잠식당한다는 식의 두려움은 접어도 좋다. 오히려 관건은 ‘포스트-트루스’라는 근대 이후의 역사적 정황에 연관된다. 흔히 ‘가짜뉴스’로 표상되는 탈진실 혹은 탈진리의 문제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려는 인류 공동의 기획을 훼방하고 균열 내며 파괴한다. 우리는 흘러넘치는 인터넷 정보 속에서 카메라 시점이나 기사의 멘트, 상황의 조작과 변형, 허구적 명명 등을 통해 모두가 알아야 할 진리가 왜곡되는 상황을 자주 본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고 불렀던 허구적 (조작)행위들은 그 자체로 진리를 주장하는 예술 · 기술의 결합물에 불과하다. 단순한 주장일지 모르는 이 같은 행위가 권력과 결합할 때, 우리는 무시무시한 힘을 갖는 폭력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시뮬라크르는 예술의 전망을 여는 동시에 현실의 전망을 닫을 수도 있다.
챗GPT를 사용하면서 보고된 유사 사례 하나를 떠올려 보자. 가령 6.25 전쟁 이후 활동했던 세계적 예술가 홍길동에 대해 알려달라는 입력어를 챗GPT에 넣으면 우리는 그 허구의 인물이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문호의 지위로 격상되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아직은 AI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기에, 혹은 입력 조건이 제한됐기에 벌어진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만도 하지만, 전 세계 인터넷 통신망과 실시간으로 연결돼 모든 정보를 변경하고 재기입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질 때, 이 일은 과연 해프닝으로 끝나게 될까? 예술 · 기술은 진리를 만드는 허구로서 우리 앞에 군림하지 않을까? 거기에 권력과 능력마저 부가된다면 어떤 누구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 채, 모든 진리는 그저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니 아무래도 좋다고, 예술은 예술일 뿐이라고 웃어넘기게 될까? 기술과 결합한 예술이 우리를 억압할 때,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할까?
이런 상상이 어리석은 기술 거부론이나 인간만이 창조력을 갖는다는 전근대적 오만함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술의 발전은 가속화 경향을 띠기에 이미 그 적정한 상태를 예측하고 중도 개입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기술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세간의 근거 없는 우려보다 훨씬 밝고 긍정적일지 모른다. 창조력의 권한을 인간 바깥, 비인간 존재자들에게도 나누어줄 때 오히려 인간의 미래는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변할 계기를 만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같은 미래의 변화는 진리가 절대적이지 않고 단일하지도 않다는 예술적 통찰로 인해 더욱 긍정적일 것이다. 진리는 단 하나의 답안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은 예술의 영역 너머로, 사회적 삶을 위한 지혜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촉발해 온 기술의 진화를 환영하지 않을 까닭이 없고, 더욱 독려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같은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것이 낳을 잠재적인 곤혹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분명히 진단하고 성찰해야 한다. 시뮬라크르의 위험은 그것이 진리를 은폐한다는 점에 있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우리가 길을 잃고 만다는 데 있다. 무엇이든 다 길이 된다고 함부로 낙관할 때, 우리는 곧잘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고 해체해 버리는 탓이다.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 양날의 검처럼 도래한 지금, 그 검 끝의 서늘함을 진지하게 느껴봐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최진석
최진석(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수유너머104 연구원. 잡학 다식을 무기 삼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고 쓰는 낙으로 살아왔다. 주요 관심사는 예술과 사회, 문학과 문화를 둘러싼 정치적 무의식의 향방이다. 최근에는 챗GPT로 대표되는 기술적 진화가 비인간 시대와 어떻게 접목될 것인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저서로는 『사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 『사건과 형식: 소설과 비평, 반시대적 글쓰기』, 『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 『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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