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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선 예술과 기술
그 어울림의 역사

메타버스,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 기술의 발전으로
예술의 존재 양식이 달라지며 예술의 위기도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예술과 기술은 그 기원이 같고, 산업혁명 이후에 분화된 후,
‘기계’라는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상호작용하며
각각의 영역에서 다이내믹한 진화가 이뤄졌다.
글_이원곤(단국대학교 미술학부 명예교수)
예술과 기술의 종분화를
일으킨 기계 문명
‘예술 vs 기술’의 화두가 문화 담론, 나아가서는 문화산업의 관심사가 된 지도 꽤 오래됐지만, 원래 ‘Art’가 라틴어 ‘Ars’에서 유래했고, ‘Ars’는 그리스어 ‘Techne’를 번역한 단어였다는 점은 자주 회자되는 사실이다. 즉 예술은 원래 기술을 의미했고, 근세 이전까지 예술가는 기능인 또는 직인이었으며 어떤 기술을 완벽하게 수련한 장인을 이르는 명칭이었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술은 시종일관 자연의 섭리를 해명하고자 하는 과학적 정신의 발현이었고, 실생활에 사용할 목적의 기술 발명과 같은 맥락에서 실천된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서구 사회에서는 대량 생산을 위한 산업용 기술이 발달했고, 그것이 전문화·고도화되면서 기존에 장인들의 손에서 발휘되던 공예적 기술과는 전혀 다른 ‘기계기술’로 진화해 갔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가지 유념할 일은 당시에 유럽에서는 이미 ‘자동 인형(Automaton)’같은 환상모방적인 기계 장치가 열렬한 관심을 모았으며 그것은 기계가 인간의 산물로서,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로서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는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8세기 개발된 자동인형 ⒸThe Met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산업혁명을 통해 얻은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한 귀족이나 자본가 등 상류층의 문화 취향은 실용적 가치를 가지는 응용예술, 대중의 오락을 위한 대중예술과도 분리된 ‘살롱예술’을 탄생시켰고, 이로써 오로지 예술적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순수예술(Fine arts, Beaux-Art)’이라는 개념이 성립됐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Fine art’라는 어휘가 등록된 것도 18세기 중엽의 일이었다. 이처럼 기술과 예술이 서로 이질적인 존재로 변한 것은 이 시대에 ‘순수미술’ 즉, ‘미적기술’과 ‘산업용 기술’로, 그 목적과 규범을 달리하는 영역으로 종분화(種分化; Speciation)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기술의 대립은, 예를 들면 인문 과학과 자연 과학의 대립처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화가의 붓질이나 캐스팅(Casting), 아날로그 사진의 인화술이나, 석판화나 동판화, 그리고 나아가서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Galerie Parnass, Wuppertal)에서 연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 전시에서 TV수상기를 해킹했던 것도 모두 하나의 기술이므로 여전히 “예술 또한 하나의 기술이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과 기술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은 바로 예술가들이 구사하는 수공업 기술과 확실하게 차별화된 ‘기계’이다. 그러므로 예술과 기술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선 먼저 어떤 예술(혹은 기술)과 어떤 기술이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나고 상호작용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서로의 경계를 넘나든
이종 간의 창조적 진화
전술한 예술과 기술의 종분화가 결정적인 것으로 굳어져 가던 19~20세기에도 예술과 기술은 연결돼 상호작용하며 결과적, 역사적으로 큰 혁신을 이뤄냈다. 서구의 르네상스기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카메라옵스큐라(Cameraobscura)의 원리, 그리고 초산은(硝酸銀)에 담갔던 소뼈가 빛에 의해 검게 변한다는 등의 17세기 말 화학자들이 관찰, 보고했던 화학적 지식들은 그냥 두었더라면 서로 연결되지 못했을 것이며, 단순한 과학적 지식이나 고립된 기술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과학자 윌리엄 폭스 탤벗(W. F. Talbot), 석판화 기술을 이용해 풍경 판화집을 출판하고자 했던 기술자 조세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 N. Niepse), 그리고 무대 배경을 쉽게 그리는 방법을 연구하던 화가 루이 다게르(J. Daguerre)가 서로 각각 연계가 없는 상황에서 ‘손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술한 기술과 지식의 융합이 일어나며 사진술이 개발됐다. 즉, 사진 기술은 예술적 의도를 가졌던 사람, 미술적인 목적으로 가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탄생한 것이다.
1839년 다게르가 촬영한 <파리 성당의 거리>

1839년 다게르가 촬영한 <파리 성당의 거리> ⒸWikipedia

이렇게 탄생했던 사진은 초기에 미술계의 강한 반발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미술사에 실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화가들은 먼저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능력으로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고, 달리는 말, 걸어가는 사람의 다리 위치조차 인간의 눈으로 본 것과 실제가 다르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기존의 사실주의 이론이 도전받았다. 또 사진의 셔터 속도와 조리개의 광량에 따라 달라지는 시각의 리얼리티에 대한 각성은 인상파 탄생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으며, 사진의 대중화와 범람하는 이미지의 홍수는 몽타주, 콜라주 등 새로운 시각 형식의 탄생을 자극하는 원인이 됐다. 이와 같은 진행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일어난 일이지만, 예술과 기술이 서로 조응하면서 서로를 변화시켰고 이 때문에 두 영역 모두에서 창조적인 진화가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파가 활동하던 20세기 전반의 기계는 ‘눈에 보이는 기계’였으나, 20세기 후반 트랜지스터의 발명 이후에 ‘보이지 않는 기계’로 진화했고, 컴퓨터와 정보 기술이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디지털 연결망으로 발전함으로써 현재에는 지구 전체를 감싸는 유비쿼터스적 환경으로서의 기술권(Technosphere)을 형성하게 됐다. 이 같은 기술의 진화가 만들어낸 환경의 변화는 예술가들의 미학적 관점은 물론 예술 작품의 제작, 유통, 향유 방식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먼저 20세기 초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미래파 운동은 ‘기계미학’ 혹은 ‘기계적 미학’을 자신들의 예술적 실천의 원천으로 삼았고, 독일 바이마르의 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는 기존의 예술을 살롱예술로부터 벗어나게 해 새로운 기술적 실천이 가능한 공방과 통합하고자 했다. 건축, 연극, 디자인, 회화 등 여러 분야 예술가들의 교류가 가장 왕성했던 바우하우스는 당대의 기술과 예술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로 기능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이후에 급속히 발전한 정보통신기술은 ‘정보’를 매개로 한 생태계, 나아가 ‘우주적 연결망’으로 구성된 ‘정보 우주’ 혹은 ‘지구적 뇌(腦)’와 같은 새로운 세계관이 탄생하는데 기여했다.
기술 혁신을
이끈 예술적 아이디어
우주항공이나 자율 주행과 같은 첨단 기술이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국제적 혹은 세계적 경쟁을 치르면서 급격히 고도화될 때는 예술적 아이디어의 개입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세상에 등장하고 아직 그것이 현대 문명에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시기에는 예술적 아이디어야말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데 있어 더없이 유용한 기술 개발의 모델이다.
예를 들어 1960년대에 소형 비디오카메라와 레코더가 보급됐을 때, 화면의 요소를 분해하고 다시 합성하는 기술, 즉 ‘비디오 합성기’라는 발상은 의심할 나위 없이 20세기 초반이래 유행했던 사진 콜라주와 몽타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의 바술카 부부(Steina and Woody Vasulka)의 비디오 실험 , 스테펜 벡(Stephen Beck)의 비디오 합성기나 백남준의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 등은 모두 예술가가 예술적 목적으로 위해 개발했던, 세상에 하나밖에 없었던 고유한 기술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작품과 장치가 전자 회사들의 비디오 기술의 개발을 자극했고, 70년대 후반 이후로 수없이 많은 개발이 이뤄지면서 지금은 거의 모든 편집기나 영상 장치에 적용되는 하나의 보편적 기술로 진화했다.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 Ⓒ백남준아트센터

이 예술가들이 이러한 실험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기계 문명에 대한 인간성 회복’이라는 인문학적 관심과, E.A.T.(Experiment in Art and Technology) 운동이 확산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만남(Encounter Between Art and Technology)’이라는 슬로건이 세상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당시 벨 연구소(Bell Labs.)의 빌리 크뤼버(Billy Kluver)는 E.A.T. 운동을 시작하면서 모든 과학 기술자는 자신의 연구 성과가 세상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지켜볼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연구자들이 한 명씩 예술가를 선택해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의 협업을 제안했고, 이에 크뤼버의 동료들이 여기에 동조하면서 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E.A.T. 운동은 결과적으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할 정도의 성과를 내는 데 그쳤다. 그 이유는 기술이 막연하게 예술을 지원한다는 설정과 의욕만 있었을 뿐, 그 본질과 실천의 방법에 대해서는 이해와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감의 재료가 된
기계 문명
한편 백남준은 당시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였던 TV를 해킹하고, 그 일부를 자신의 표현을 위한 재료로 전용(轉用) 했는데 그의 스승 존 케이지(John Cage)의 유명한 <장치된 피아노(Prepared piano)>와 또 존 케이지의 스승이었던 헨리 카웰(Henry Cowell)의 <스트링 피아노(String piano)>도 피아노라는 기계 혹은 기성 테크놀러지에 대한 해킹이었다. 이처럼 세대를 거듭해 이어진 예술가들의 기계 해킹은 이미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범용기술이라 할 수 있는 기존의 미디어를 해체해 자신만을 위한 고유기술로 만드는 행위이다.
존 케이지의 ‘장치된 피아노'

존 케이지의 <장치된 피아노> ⒸSmithsonian Magazine

E.A.T. 운동 등으로 촉발돼 이후에 확산된 이른바 ‘테크놀러지 아트’는 그 예술이 어떤 미디어에 기반을 두고 생겨난 것인가에 따라 제작, 유통, 향수의 방법은 물론 예술 그 자체의 성격마저도 규정짓는 경향 때문에 ‘기술 혹은 미디어의 명칭+ART’라고 불리는 수많은 단어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테크놀러지 아트’나 ‘하이테크 아트’가 ‘아트 & 테크놀러지의 만남’이라는 비전을 드러낸 명칭이라면, 엘렉트로닉 아트, TV조각, TV아트, 비디오 아트, 컴퓨터 아트, 홀로그램 아트 등은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수단 즉 미디어가 예술 작품의 제작 방식은 물론 유통과 감상의 방식마저 결정한다는 현실을 강조한 명칭이었고, 1980년대 이후의 텔레콤 아트, 위성예술, 팩스 아트, 네트워크 아트, 그리고 90년대 이후의 디지털 아트, 인터랙티브 아트, 사이버 아트, 멀티미디어 아트, 정보예술, 인터넷 아트, 웹 아트, 모바일 아트 등은 예술 작품의 내용이 다자 간 주고 받는 정보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예술관의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20세기 후반 이래의 정보미디어 환경에서 예술 작품이란 ‘작가가 완성해 관객이 감상하도록 전달하는 일방통행식의 고정된 내용(Content)이 아니라, 관객이 작품을 상대로 상호작용하며 매번 다르게 감상할 수 있는 일정한 문맥(Context)을 제공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이와 같은 예술 작품의 제작, 유통, 감상에 이르는 모든 측면의 차이 때문에 지금의 ‘Art’는 과거의 ‘Art’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같은 혁명적인 변화가 현대 기술문명이 만든 미디어 환경의 소산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침범하고 뒤섞이며
발전하는 예술과 기술
예술가이자 미디어 아트 담론의 세계적 리더인 로이 애스콧(Roy Ascott)은 서로 이질적인 두 분야가 만나고 융합해 새로운 것으로 발전하기까지의 단계를 연결(Connectivity), 몰입(Immersion), 상호작용(Interaction), 변형(Transformation), 그리고 창발(Emergence)의 다섯 단계로 설명했다. 아마도 기술과 예술이 연결되고 상호작용 함으로써, 새로운 창조적 단계에 이르는 과정 또한 대체로 로이 애스콧의 설명과 부합할 것이다. 전술한 사진의 사례가 그러하고, 비디오 합성기술의 사례도 시야를 사진 콜라주, 영화의 특수효과 등으로 넓혀보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술과 기술은 기계라는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며, 양방향으로부터 침범받고 있다. 또한, 이 둘은 원래 한 몸이었고 따라서 많은 유전적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어 아직도 이종교배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술이 기술의 진화를 자극하고, 기술권과 같은 지구적 환경이 포괄적으로 예술관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등 둘 사이의 상호작용은 비교적 온전하게 대척점을 고수하고 있는 자연 과학과 인문학 영역 사이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원곤
이원곤(단국대학교 미술학부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6년부터 비디오, 컴퓨터 등을 이용한 영상 및 설치작업을 발표했다. 1990년 일본 문부성 국비 유학생으로 쓰쿠바 대학 대학원(총합조형분야)에서 테크놀러지 예술 이론 전공해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귀국 후 한국영상학회를 창립하는 등 미디어 아트 관련 활동을 하면서 국무총리 표창(1999)을 받았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창제작센터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상기계와 예술』, 『디지털화 영상과 가상공간』, 『존재를 향한 이중시선과 구성주의: 비디오아티스트 박현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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