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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 예술의 파도에
필요한 정책 체계의 변화

과학 기술과 예술의 만남이 가져올 잠재력이 주목받으며,
예술과 기술을 융합한 지원정책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융복합 예술이라는 파도에 예술 본연의
가치를 싣기 위해서는 예술가와 기술자를 잇고
창작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협력 체계가 절실하다.
국내 아트앤테크 지원정책 현황과 정책 과제를 짚어본다.
글_설동준((주)알프스 운영이사)
아트앤테크 지원사업의 풍경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은 실체 없는 강요 혹은 유령 같은 개념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어느새 기술이 초지능성, 초연결성을 실현하면서 인공 ‘자연’으로 그 지위를 바꿔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경향이자 사실이다. 채 몇 년 되지 않는 사이 과학기술 분야 외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도 포스트휴먼(Posthuman) 담론과 탈인간중심주의(Post-Anthropocentrism)가 유행을 넘어 상식적인 관점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아트앤테크 분야는 어제의 ‘휴먼’과 비교해 오늘의 삶이 ‘이미’ 포스트로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예술의 개념과 경계를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준에서는 미래사업부가 주관하는 ‘앞으로’의 예술을 위한 탐색이지만, 현실의 변화 속도를 보면 빠르게 갱신되고 있는 ‘지금’의 삶 속에서 예술이 무엇인지를 묻는 ‘지금’의 예술 실험과 예술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정책 바람을 타면서 명멸하는 숱한 사업 중 하나가 아니겠냐는 의혹과 우려가 있지만, 동시대적 가치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ART&Tech 플랫폼

ART&Tech 플랫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양한 문화기관과 기업도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여러 방식의 사업을 실행하고 있다. 전반적인 지원사업 및 씬의 풍경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ART&Tech 플랫폼’ 포스팅에 잘 정리돼 있다. 사견을 더해 간략하게만 짚어보자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매해 20~30억 원 규모의 예산으로 100건에 가까운 아트앤테크 프로젝트를 지원하면서 빠르게 국내 아트앤테크 분야의 주요 지원 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현장의 요구를 반영해 지원사업을 개편한다. 이는 현장과 긴밀히 소통한다는 장점인 동시에 그만큼 지원사업에 변화가 자주 일어난다는 단점이기도 하다.
지방자치단체 관련 기관 중 가장 규모 있고 사업 경력이 오래된 사례는 서울문화재단의 ‘언폴드 엑스(Unfold X, 前 다빈치크리에이티브)’이다. 언폴드 엑스에서 눈에 띄는 점은 창작자 트랙 외 ‘기획자 캠프’라고 부르는 기획자 전용 트랙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결과물의 생산 이후, 생산된 것‘들’의 의미화와 대중적 접점을 디자인한다는 측면에서 좋은 시도이다. 다만 캠프라는 이름과 달리 기획자를 양성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 이미 역량을 갖춘 기획자가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실행하는 기회를 지원한다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비유하자면 작가 지원이 아닌 큐레이터∙에디터 지원인 셈이다. 또 한곳 눈에 띄는 기관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아트코리아랩(Arts Korea Lab)이라는 물리적 공간 기반의 사업에 역점을 두고 주로 기업과의 협력을 통한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과 사업화를 지원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픈 이노베이션 역시 생태계의 다층적 차원에서 의미 있는 시도이긴 한데, 기술을 매개로 한 예술과 기업의 협력인지, 혹은 기업의 필요를 예술가가 공공사업의 경로로 해결하는 수단적 만남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22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2022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 PARADISE

민간에는 대표적으로 ‘파라다이스 아트랩(Paradise Art Lab)’과 ‘제로원(ZER01NE)’이 있는데, 전자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라는 물리적, 대중적 공간 기반의 창작 지원이라는 점이 특징이고, 후자는 매해 주제를 제시하는 오픈콜 방식의 실험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비중을 놓고 보면 창∙제작 지원이 압도적이고, 일부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의 협력 사업이 더해지고 있는 정도의 구도다. 조사 및 학술 연구, 담론화를 위한 기획도 있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정책의 관점에서 사업을 다시 보면
“이번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은 무엇인가?”, “교육부가 말하는 교육정책은 무엇인가?”와 같은 말에는 이러저러한 ‘일’은 있는데 ‘방향’이 무엇이냐는 의미가 내포해있다. 때때로 명시적인 정책 표명이나 선언이 없어도 사업을 통해 암묵적으로 정책의 방향을 가늠하거나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럼 아트앤테크 분야에서의 정책은 어떠할까? 정책은 앞서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방향성을 가진다. 정책은 공적 의지의 핵심이고, 사업은 그것의 실현 방식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트앤테크 분야는 “사업은 있지만, 정책은 알기 어렵다”에 가까울 것 같다. 다만, ‘정책의 부재’라는 말로 모든 현상을 압축하는 것은 생산적 문제 인식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필자가 참여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기술 변화에 따른 예술지원정책 개선방안 연구>에서 제시한 정책의 틀을 준거점으로 삼아 현재 아트앤테크 정책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찰해보고자 한다.
연구에 적용된 아트앤테크 생태계 분석 틀

연구에 적용된 아트앤테크 생태계 분석 틀 Ⓒ설동준

2021년 말에 완료된 <기술 변화에 따른 예술지원정책 개선방안 연구>는 국내 아트앤테크 분야가 몇몇 사례로서의 창작 실험과 시도가 아닌 하나의 예술 생태계가 되기 위해서는 현행 지원사업에 더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연구였다. 위 그림에서 보면 창작 주체(Subject)가 예술과 기술이라는 도구(Instruments)를 가지고 창작 결과(Object → Outcome)를 만들어내는 것을 ‘생산 체계’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생태계는 이러한 생산 체계만 있어서는 안 되고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분업과 커뮤니티로 만들어지는 협력 체계, 이들 사이에 통용되거나 경합하는 가치와 규범 등을 의미하는 문화 체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래야 공존 체계로서의 생태계가 실현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행 아트앤테크 분야는 생산 체계만 있고, 분업 체계와 문화 체계가 없거나 아주 약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담론 형성을 위한 과정 지원과 창∙제작 후 유통을 위한 후속 지원 트랙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사업 개선 및 포트폴리오 다양화 노력은 충분히 응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업에 대한 평가이지, 국내 아트앤테크 씬의 정책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지금의 풍경은 “일단 만들라!”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이번 <유형② 기술융합 창제작 지원>에서는 점점 더 예술과 기술이 잘 융합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형식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과 기술이 융합되는 실험을 확인했고, 예술가들이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공학 전공자가 예술적인 시도를 통해 전통적인 예술가와는 다른 형식의 예술가상을 만들어가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2022년 예술과기술융합지원 유형② 기술융합 창제작 지원 트랙 심의 총평 중


바로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트앤테크 사업 선정 심사평을 보면 ‘개별’ 프로젝트의 ‘생산’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의미 있는 변화이자 놀라운 속도의 적응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별’ 프로젝트 차원, 즉 생산 체계에 국한된 얘기다. 연구 과정에서 만난 현장 관계자가 느끼는 갈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생태계가 없어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기획자, 셀러, 전시장, 관객 등이 다 필요하죠. 작업은 늘어나지만, 작업이 가진 메시지가 보이지 않아요. 활용된 기술이 궁금해지게 하는 것도 필요해요. 작가가 다 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지금 생태계에 가장 필요한 분야는 생산되는 작품의 철학적, 미학적 지원을 해주고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게 하는 매개자 그룹(큐레이터, 프로듀서, 콜렉터)이라고 생각해요. 온전하게 작업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매개자를 양성하고, 매개자 그룹이 창·제작 외의 사업들을 펼칠 수 있는 지원이 절실해요.”

- <기술 변화에 따른 예술지원정책 개선방안 연구> 중


인력과 역할 다양성 측면의 얘기지만, 정책 측면에서 기능 편중의 문제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즉, 한국의 아트앤테크 생태계는 여전히 생산자들이 섬처럼 뚝뚝 떨어져 활동하는 고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단기 성과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개별 지원사업의 디테일과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는 속도를 보면 지금의 아트앤테크 정책을 “일단 만들라!”로 환원하는 것이 미안하지만, 큰 흐름이 그러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만들고 나서는? 유통을 위한 전문 매개자는 있나? 매개자가 에이전시 역할을 할 때 자리와 상황을 제공하는 프리젠터는 있나? 기업 브랜딩 가치 외 독자적인 지향을 표방하는 아트앤테크 페스티벌은 있나? 예술가는 기술을, 기술자는 예술을 함께 학습하고 탐색하는 학습 지원은 있나? 이 질문들이 묻는 것은 한국에서 아트앤테크 정책의 ‘현실 인식’과 ‘지향’인데, 어느 질문에도 답하기 쉽지 않다. 그럼 정책은 왜 이렇게 큰 공백 상태로 있는 것일까?
한국의 아트앤테크 분야에서 필요한 것이 개별화된 창작을 넘어서는 생태계의 조성이라는 것에 찬성한다면, 이것은 개별 기관과 기업의 역량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유통만 하더라도 미술관, 공연장 등을 통한 작품 유통도 있고, 사회/기업의 이슈 중심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한 역량의 유통도 있다. 작품이든 리서치 페이퍼든 결과물을 생산하는 지원이 필요한가 하면, 기술에 대한 경험을 위한 학습 자체를 지원하는 접근도 요구된다. 전업 아트앤테크 기획자가 다수 배출되기는 쉽지 않아 보이지만, 장르 기반 프로듀서와 기획자가 아트앤테크 작업에‘도’ 참여하기 위한 경력 개발/확장 지원도 필요하다. 예술가가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예술을 확장하는 것 외에, 예술의 첨예한 이슈를 주제로 기술자를 모집하는 방식의 오픈콜도 필요하다. 이런 일들을 어느 기관이 맡아서 할 수 있을까? 하나의 기관이 할 수 있을까? 특정 기관이 주도해서 하는 것도 가능만 하다면 필요한 일이고, 그것이 어렵다면 정책을 위한 협력 체계 자체를 개발하기 위한 기획에 자원과 품을 투입하는 것을 지금부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정책은 국가 수준의 정책도 있고, 지방자치단체 수준의 정책도 있고, 개별 기관 차원의 정책도 있다. 정책이 있다는 것은 방향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때 국제 교류 붐 시기에 예술 현장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없는 각 기관의 국제 교류 지원사업에 같은 내용으로 양식만 바꿔가면서 지원하곤 했다. 제대로 된 국제 교류를 위해서는 리서치, 항공 및 육상 이동, 프로모션 콘텐츠 기획 및 제작, 시장 분석에 기반한 컨설팅 등의 기능이 함께 필요하지만, 예술가들은 국제 교류 씬의 생태계적 성장을 위한 기능의 이 빠진 영역 대부분을 알아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허덕이듯 뛰어야 했다. 예술가의 친구(지원기관)가 많은 것 같지만 다들 오른손만 내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지금의 아트앤테크 정책의 상황도 어느 정도 이와 닮았다.
세 번째 물결,
파도를 잘 타길 바라며
일전에 한 예술 대학에서 융합예술 관련 교육 과정 설계를 위한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다. 필요한 기술적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데 학생들이 주로 디지털 기반의 융복합 작업을 할 때 요긴하게 쓰이는 프로그램 ‘구독 지원’을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요즘 상황에 놓고 보면 ‘챗GPT(ChatGPT)’나 ‘미드저니(Midjourney)’의 구독을 지원하고 자유롭게 작업해보라는 것이 될 수 있다. 학교 관계자는 그 필요와 합리성에 공감했지만, 대학 차원에서는 애플(Apple) 컴퓨터 같은 눈에 보이는 ‘시설’에는 돈을 쓸 수 있어도 사용 후 사라지는 구독 서비스 지원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시설도 감가상각을 통해 유용성이 사라지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융복합 예술을 위한 생태계가 만들어지려면 눈에 보이는 성과 이외의 투자, 혹은 매몰 비용의 영역이 필요한데, 이 부분에 대한 부담이 언제나 단기 성과주의와 충돌한다. 정책이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일들이 매몰 비용에 따른 부담이 아닌 방향성 있는 정책에 기반한 투자가 된다는 뜻이다.
2022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22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짧은 국내에서의 아트앤테크 역사에서 보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 닷컴 버블과 함께 넷아트 등의 미디어 아트 붐이 있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Seoul Mediacity Biennale)가 그 결과물이자 촉매였다. 이후 2010년 초중반에 아이폰을 위시한 모바일 혁명과 아두이노 등의 보급형 툴킷의 보급으로 메이커 운동 등 두 번째 붐이 있었다. 그 두 번의 물결은 무엇을 남겼나? 미디어 아트 비평가들에 따르면 지금 진행되는 창작 작업 중 일부는 이미 그 시절에도 있었던 것들인데,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반복되는 것들도 있다고 한다. 생산은 있지만 교류와 축적과 재음미와 커뮤니티가 없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세 번째 파도가 일고 있다. 이 파도가 신기루가 될지, 예술의 동시대성을 갱신하는 예술 본연의 정신이 될지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책의 ‘존재와 부재’가 결정적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부디 파도가 지나간 잔물결 위에서 손으로 보드를 미는 수고를 반복하지 않기를.
설동준
설동준((주)알프스 운영이사)

학부에서 원자핵공학을, 대학원에서 교육공학을 전공했다. 서른 살에 뒤늦게 예술 분야에 발을 들인 후, 전통예술 단체 기획자, 문화예술교육 분야 연구자, 축제 사무국 멤버 등으로 접점이 약한 작업 사이를 오가며 다중 정체성으로 살아왔다. 예술 분야 경력의 대부분은 예술경영 역할이었고, 현재는 작은 기독교 대안학교를 운영하면서,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와 포스트휴먼, 인공지능과 인지과학, 교육학 등에 관심을 가진 현장 기반 연구자(Activist Researcher)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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