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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문화예술의 교섭
유동하는 액체 세대

문화예술은 시대의 위기를 바라보는
창이자 함께 호흡하는 생물이다. 또한
산업, 경제와 함께 교섭하며 사회 가치와 혁신을
창출하는 동시에 그에 따른 변화가 또다시
예술 창작과 향유의 새 지평을 열기도 한다.
2023년 문화예술은 우리 사회와 어떻게 교섭했을까?
그 양상을 살펴보고 급변하는 현시대를 숙고해본다.
글_최익서(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교수)
들어가며:
문화적 접촉은 진실한 존경에서 어리석은 상업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태도를 낳는다. 많은 제도권 환경에서 사회와 문화예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특히 미술관과 박물관은 보존과 수집 활동뿐만 아니라 대중을 교육하고 예술의 가치에 대한 규범을 전달한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규범이고 어떻게 이뤄지는가? 그 규범들은 왜 발전했으며 무엇을 언급하는가?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문화적 교섭(appropriation)이란 결국 정교한 오해의 기술(art of deliberate misunderstanding)이다”라며 모든 문화적 투쟁, 그리고 윤리적 가치 판단의 승패를 가름하는 것은 인식론적, 보편적 논리의 진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식 구조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비논리적 생활 환경이며, 그러므로 문화란 유기체적 현상으로서 격의(格義)의 주체는 대승적 성격의 실내용을 담보해야 한다고 상대주의 문화 철학을 역설한 바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사회·경제적 계급과 교육 자본과 관련해 취미의 본질을 연구했다. 그의 목적은 사회 계급이라는 구조 안에서 미적 향유의 대상물을 나타내는 분류 체계의 토대를 밝힘으로써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오래된 문제에 과학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의 책 『구별짓기-취미판단의 문화적 비판』에 기록된 것처럼 그 결과는 복잡하다. 특히 계급 평가 기준을 한 국가로부터 다른 나라로 일반화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예술, 음악, 영화, 연극에 대한 선호와 계급 간의 분명한 연관관계를 밝혔다. 예를 들어 하층계급 출신의 사람들은 높은 경제적 수준, 전문가 계층, 그리고 교육을 받은 부류의 사람들보다 클래식 작곡가들을 더 좋아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양상들이 전위 연극이나 독립예술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 연구에서도 되풀이됐으며, 부르디외는 이를 ‘사람들의 취미는 그들의 계급을 반영한다’고 요약했다.

토마스 킨테이드의 <고향의 호숫가(Hometown Lake)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토마스 킨케이드의 <고향의 호숫가>와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Thomas Kinkade Studio·WIKIPEDIA

대중은 세속적인 키치(kitsch)와 아방가르드(avant-garde) 작품 사이에서 진정한 선택권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토머스 킨케이드(William Thomas Kinkade III)의 마을과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상어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 만약 박물관이 관람객의 요구에 부응하고 동족의 선호에 충실해야 한다면, 박물관은 대가들 작품의 ‘우수성’이나 더 참신한 아방가르드의 ‘비법을 전수받은’ 예술 두 가지를 고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공 프로젝트들은 소위 예술의 대중화를 위한 초기의 노력을 계승한 것이다. 사람들을 박물관·미술관으로 인도하는 것 외의 다른 방법(노동자들의 고된 일상이 ‘예술적’이고 ‘창조적’이 된다면 좀 더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하거나 예술가들을 도시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뤄지는 움직임)들이 존재해왔다. 국제상황주의(situation international)는 거리의 연극과 다다 스타일의 운동을 활용해 엘리트와 지식층의 전복을 기도했던 지난 세기 중반 유럽의 마르크시즘 경향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거리예술, 펑크, 그리고 특별한 연대조직의 현상들로 나타난다. 이와 유사하게 존 러스킨(John Ruskin)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같은 이들에 의해 추동됐던 19세기 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은 건축양식부터 가구, 조명, 섬유, 그릇, 가정용품에 이르기까지 주거 환경의 모든 것을 포함해 일상의 감각적인 환경에 미(美)를 추구함으로써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을 고양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은 환경 속의 유기체, 혹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일상적인 경험을 풍부하게 하자고 제안했던 존 듀이(John Dewey)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문명의 미장원’이란 예술적 관점을 거절했듯이 당대에 유행하던 도회적 풍경, 즉 도시의 슬럼화와 부유층의 아파트를 ‘상상력의 결핍’이라고 한탄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환경에서 탈출하도록, 어딘가를 가고, 어떤 것을 보고, 무언가를 사는 일상에 존재하는 장소, 사물 등 모든 것을 예술로 보도록 종용할 때, 그 ‘미장원’이라는 관점이 때때로 미술관이나 급진적인 운동 양자에 의해 채택된다고 염려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고 말하는 ‘동족’ 미술관조차 그 동족 출신의 특별한 사람들, 그들만의 예술가의 작품을 벽에 거는 경향이 있다. 듀이는 인간의 상상력과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더 혁명적인 방법을 요구했다. 그는 예술의 생산과 지적인 향유를 이끄는 가치는 사회적 관계의 체계 속으로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려 90년 전 그가 언급한 사회와 문화예술의 부정적 대립이 오늘날에도 호소력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을 평범한 삶의 과정과 결합하는 것에 대한 적개심은 삶에 대한 애처로운, 심지어 비극적인 논평이다. 단지 삶이 좌절되고 부진하거나 혹은 너무 무거워 보통의 삶과 심미적인 예술 작품이 창조하고 향유하는 과정 사이에 어떤 고유한 대립이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어쨌든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서로 분리되고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되더라도, 이상이 체현되고 실현될 수 있는 조건들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액체 세대의 유동적 변화
MZ에서 잘파(Zalpha)로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 이는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나 이른바 ‘포스트 빈곤(post poverty)의 시대’에 성장한 액체 세대(Liquid Generation)의 가장 시급하고 동시대적인 욕망이다. 현대인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시대를 살아간다. 역사는 금융 위기와 기후 위기 등 선형경제에서 초저성장 시대 순환 경제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며 심리적 빈곤이 팽배한 새로운 단계, 즉 포스트 빈곤의 시대에 진입했다. 포스트 빈곤 시대의 인간은 매일 매 순간 자신의 결핍을 확인하며 심리적 빈곤 상태를 자각한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이 갱신되는 물질문명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온 인류 최초의 세대로, 어떠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희망보다 무엇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크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은 특정한 대상을 소유하는 것과 특정한 대상이 되는 것의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소유의 양식에는 나와 내가 소유하는 대상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가 생길 수 없다. 나의 소유물과 ‘나’는 물건이 됐으며, 내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관계도 성립된다. 나의 정체성, 즉 정신적 균형이 내가 최대한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기반으로 형성되므로 역으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나를 소유한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존재 양식에서는 주체와 객체 간에 생산적이고 살아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소유에 의한 존재 양식은 주체와 대상을 모두 물질계로 인도한다. 그러한 관계는 생명의 관계가 아닌 죽음의 관계다.”
우리는 지난 5년간 인류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을 여럿 경험했다. 장기간 팬데믹을 겪은 후 연이은 급변기를 맞이했다. 코로나19는 학교에서 기업까지 사회 전반에 비대면을 일상화했고 메타버스와 아바타 유행에 불을 지폈다. ‘집콕’하는 동안 미디어의 헤게모니는 OTT로 완전히 넘어갔다. 무너진 일상을 지키고 탄탄하게 다지기 위해 시작된 ‘갓생’ 문화는 ‘욜로’ 문화를 종식시키고 2020년대의 시대적 조류가 됐다. 생활에서 크게 체감하지 못했던 기후 위기가 비로소 전 인류의 발등에 떨어진 불씨가 돼 ESG가 정부와 기업, 시민의 관심사로 등극했다. 즉 코로나19 시기에 일어난 사람들의 소비, 관계, 가치관의 변화는 엔데믹과 함께 끝나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할 메가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Z세대와 알파 세대를 합친 ‘잘파 세대(Zalpha Generation)’는 MZ세대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등장했다. 초개인화 시대를 사는 Z세대는 이전 어느 세대보다도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자각하고 자기 캐릭터를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그리고 잘파 세대는 이런 경향을 더욱 진하게 띨 것이다.
‘트라이브십(Tribeship)’은 개인의 취향, 라이프 스타일 등 점점 더 세분화되는 개인적 지향성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관계를 맺는 능력을 뜻한다. 나와 공감대나 성향이 비슷한 사람을 찾는 것은 바늘구멍에 낙타를 통과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커뮤니티에 연결돼 있다. 다채로운 커뮤니티와 교류하며 정서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한 트라이브를 형성해 영향력을 확산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선명한 개인적 지향성을 갖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남들과 차별화된 취향과 지향성을 갖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또 탄탄한 트라이브를 형성하는 연결고리가 되고 영향력을 강화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다. 이는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처럼 아이덴티티와 지향성이 뚜렷한 ‘스몰 브랜드(Small Brand)’가 주목받고, 뾰족한 취향을 잘 읽어낸 기업이나 예술가가 소비자와 트라이브를 형성한다.
잘파 세대가 과정 중심의 콘텐츠로 Z세대와 케미스트리를 만드는 방법은 비주얼이 아닌 ‘관계성의 몰입’에서 나온다. 일명 ‘찐’을 좋아하는 Z세대의 특성과 이들이 주로 소비하는 문화 콘텐츠 형식을 잘 활용하면 더 끈끈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개인 맞춤형 소재여도 괜찮다. 철 지난 이벤트나 콘텐츠, 작품, 상품이 다시 ‘올끌’될 수도 있고, 어설프거나 실패한 느낌이 공감을 사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예고한 미(美)와 사랑처럼 유동적인 ‘액체 인생(Liquid Life)’의 도래가 현실화됐음을 각인시켜 준다.
청춘에게 요구되는 역량
응용(applied)에서 연관(related)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이는 곧 희망이었다. 가장 이상화된 형태의 진보적 상징이자 유용한 미래 자원이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이들은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분석적·형식적 학습법을 배웠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의 표현을 빌자면, 이 과정에서 ‘실용적-맥락적 지식(공부한 것을 실전에 활용하는 능력)’과 ‘이념적-통합적 지식(학습을 바탕으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이 거의 등한시됐다. 그래도 이런 식의 학습은 취업으로 이어졌으며, 근면 성실한 학생이 직장에서 높은 연봉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공부와 취업이라는 두 버팀목은 지난 수십 년간 양탄자 아래 숨겨진 문제들을 잘 덮어주었지만, 양탄자를 걷어낸 순간 모습을 드러낸 바닥의 상태는 참혹했다. 기존의 메커니즘은 이미 붕괴했고, 많은 국가에서 고학력 젊은이들이 먼저 버림받았다. 그들보다 먼저 학업을 중단하고 한참 동안 열정 페이를 받으며 일한 대가로 정규직 취업에 성공한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뒤늦게 취업 시장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삶은 중단의 연속이며 아마 후세대로 갈수록 이러한 상황은 심각해질 것이다.
인식론 및 방법론의 막다른 골목에서 경제, 산업과 문화예술의 아우라지인 디자인계 역시 ‘응용’ 과학에서 ‘연관’ 과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디자인 이론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면 이 분야가 응용예술과 응용과학이라는 두 개의 주요 패러다임을 디자인 사고의 논리(혹은 인식론)로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에 기원하는 이 두 개의 패러다임은 오늘날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 종종 산업미술로 일컫기도 했던 장식 미술의 오랜 전통에 따라 디자인이 시작됐을 때, 응용예술은 그 기저에 작용한 첫 번째 모델이다. 인공물(artifact)의 한 측면이 예술적 측면이라면 ‘응용’이라는 단어는 인공물의 다른 차원, 즉 실용적 측면을 나타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이를 변형해 ‘훈련된 예술(disciplined arts)’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따라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잘 정의되면(예를 들어 예비 단계의 과학적 조사가 철저하게 수행되고 기능적 범주가 정확하게 설정되면) 그에 대한 해답이 거의 자동으로 나온다는 생각이 교육체제 안에서 유포된다. 그 결과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고 실천된 디자인 프로세스의 공통된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필요성 또는 문제가 정의된다 : 상황 A
2. 최종 목표 또는 해결책이 구상되고 서술된다 : 상황 B
따라서 3. 디자인 행위는 상황 A를 상황 B로 변형하는 인과관계(causal link)다.
여러 역사가와 철학자들이 테크놀로지가 응용과학일 뿐이라는 생각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현대적 모델은 테크놀로지 역사가 과학의 발전에서 상대적으로 독립된 채 나름의 길을 걸어왔음을 인정한다. 이런 모델들은 모두 테크놀로지를 바라보기 위한 자율적 인식론을 주장한다. 심지어 허버트 사이먼(Hebert Simon)은 인간의 지식을 두 개의 주요한 부분, 즉 ‘자연물에 대한 과학’과 ‘인공물에 대한 과학’으로 구분하면서 디자인 사고의 고유성을 천명했다. 시스템 및 복잡성 이론 또한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기계론적 모델의 근본적 변형에 기여했다. 그 결과 엄격한 인과론적 연속체라는 개념 대신 목적론이 도입됐다. 그리하여 프로젝트의 개념이 훨씬 더 강력한 이론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응용’ 과학 대신 관계된(involved), 배치된(situated), 또는 삽입된(embedded) 과학이라는 용어를 제안하고 싶다. 이 같은 모델에서 과학적 탐구 및 태도는 창작의 과정이나 실무의 장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지 응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전자와 후자는 서로를 변형하게 된다. ‘행위를 통한 성찰(reflection in action)’ 개념은 이제 방법론의 영역에서 인식론적 영역으로 이전된다. 쉽게 말하면 방법론의 영역과 인식론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무관하다. 따라서 디자인 프로세스의 새로운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문제 대신 시스템의 상태 A
2. 해결책 대신 시스템의 상태 B
따라서 3. 디자이너와 사용자는 시스템(제3자 stakeholders)의 일부다.
디자이너의 과제는 시스템의 동적형태학(morphology), 그 ‘지적 능력’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스템 자체에 대해선 활동할 수 없고, 단지 시스템 내부에서 활동할 뿐이다. 우리는 시스템의 지적 능력에 반해 행동할 수 없고 단지 시스템의 고유한 진행을 독려하거나 방해할 뿐이다. 시스템의 상태 B는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도 의뢰자와 문제해결자의 일반적인 가치 체계에 따라 선호되는 어느 하나다. 상태 B는 역동적 과정 내에서 일시적으로 다소 안정된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물질적 사물의 제작은 상태 A를 상태 B로 변형시키는 유일한 방도가 아니다. 그리고 디자이너와 사용자 역시 전체 과정에 포함돼 있어 최종적으로는 그들 자신도 변형된다. 이 같은 습득의 차원 역시 프로젝트의 일부로 간주돼야 한다. 19세기 알렉산더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이 예술의 과학적 이해로서 아름다움의 조건을 규명하는 미학(美學)의 성립을 요구했지만, 이후 칸트(Immanuel Kant)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예술의 범례적 독창성(Exemplary Originality)에 기초한 비평과 비판 능력의 구분을 지적했던 바와 같은 맥락이다. 위의 내용은 디자인, 디자이너, 사용자로 명명됐지만, 이 단어들을 문화예술, 예술가, 관객 혹은 향유자로 치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 교육의 목표는 전문가가 아닌, 소통형 인물의 양성이다. 능력은 능력의 관리와 실행을 포함하는 역량(competency)을 의미한다. 성취도에서 적합도로, 중세 시대 통합적 사고를 뜻하는 전인형 인물에서 영역적 지식 기반 전문형 인물을 거쳐 관계적 사고의 역량을 갖춘 소통형 인물로 관점이 바뀌었다. 사회적 관계의 기본 전제 또한 공동체 중심의 접근(같음을 전제한 동질성)을 지향했던 집단지성의 동감(sympathy)으로부터 시민성 중심의 접근(다름을 전제한 다양성)으로, 그리고 비판적 사고력 지향 ‘공감(empathy)’으로 인재 요구기준이 바뀌고 있다. OECD 역량의 기준(The OECD Learning Framework 2030)에 따르면 지식·능력·태도와 가치를 포괄한 개념을 역량이라 지칭한다. 주위와 소통하며 자기 능력과 소질에 맞게 자신의 삶, 진로와 학업,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켜가는 자질로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창조한 것을 책임지는 변혁적 역량을 의미한다.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요구되는 역량 기준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탁월한 예술성의 비밀
상식선에서 불확실성으로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은 확실성 추구가 의미 추구를 가로막는다고 했다. 그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추진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봤다. 복잡한 문제를 만났을 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인지적 종결 욕구를 억누르고 대신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공존하려는 인지적 태도는 과학적 인식과 풍부한 상상력의 원동력이 된다. 이른바 우등생이라 불리는 학생들은 철학자들의 말을 자세히 반복할 줄 안다. 이들은 박학다식한 박물관의 도슨트와 비슷한 부류다. 하지만 그들의 배움은 소유를 위한 지식 습득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철학자들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철학자들의 모순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들이 의도적으로 몇몇 질문을 회피하며 정답을 제공하는 것도 꺼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어디까지가 진정 새로운 것이고, 어디까지가 어쩔 수 없이 그가 살던 시대의 ‘상식선’을 지키기 위해 쓴 것인지 모른다. 머리로만 쓴 글과 머리와 심장으로 쓴 글을 구분할 줄 모르며, 저자가 정말로 특출한 인물인지 거짓으로 점철된 사기꾼인지 구별할 줄 모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곡들이 불멸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갈등을 생생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해 낸 문학적 기량 때문만은 아니다. 각 등장인물이 내면 깊은 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결론 없이 열려 있는 이야기의 전개 구조야말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관통하는 핵심적 특징이자 탁월함이다.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는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 셰익스피어가 이룬 위대한 성취의 비결은 ‘부정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이라고 썼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능력, 특히 셰익스피어가 풍부하게 지녔던 이 특징을 나는 ‘부정적 수용력’이라고 부르겠어. 사실과 이성을 추구하려고 안달복달하지 않고 불확실성, 미스터리, 의심한 채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거지.” 부정적 수용력이라는 개념이 키츠의 사후 15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주목받게 된 계기는 영문학이 아닌 정신분석학계를 통해서다. 영국 태생의 정신과 의사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은 『주의와 해석, 1970』에서 부정적 수용력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비온은 소설가 새뮤얼 베케트(Samuel Beckett)를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질환에 시달린 군인들을 치료할 때 부정적 수용력 개념을 적용했다. 키츠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불확실하고 이해할 수 없으며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성급하게 사실과 설명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대신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결과 주인공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고 인생의 모순과 비극의 심연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은 전형적인 인물과 극적인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상황과 성격의 영향을 받지만, 결코 그 환경에 사로잡히거나 머무르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4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해석되고 있다. 그의 작품과 작중 인물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사랑받으며 불멸의 생명력을 지니게 됐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멍청한 인간은 결론을 내고 싶어 한다”라고 했다. 심리학자 프랭크 배런(Frank X. Barron)은 저명한 과학자, 예술가, 건축가, 기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창의적인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며칠씩 함께 생활하게 하면서 창의적인 사람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연구진의 관찰에 응하고 IQ 테스트와 심리 검사, 정신질환 검사 등 다양한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IQ와 창의성은 서로 관련이 없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과가 도출됐다. 실험 결과 창의성의 구성 요소는 너무 복잡해 한두 가지 공통 요인을 찾아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배런은 창의적인 사람들은 내면에 솔직하고 복잡하고 모호한 것을 좋아하며 무질서와 혼란을 잘 견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끌어내는 능력이 있고, 독립적이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을 지녔다. 배런은 “창의적인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어둡고 혼란스러운 부분마저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이들”이라고 말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내 안에 혼돈을 품어야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다”라고도 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는 작가와 예술가, 학자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원천이지만, 이러한 태도가 창의적 직무에 종사하는 특별한 집단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지식과 기술의 빠른 변화로 모든 분야에서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갈수록 커지는 정보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갖춰야 할 핵심적 역량과 태도가 됐다. 미래를 예견하는 주요 핵심 개념으로 강력한 인공지능의 시대,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초미학적 휴머니즘(Trans-Aesthetic Humanism)은 아마도 메타인지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영원불멸의 테마
결국 관계, 그리고 사랑으로
관계에 대한 믿음은 현대인의 허상이 됐다. 인터넷 발달로 2000년대 초반보다 공동체에 소속돼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가 오히려 쉬워졌다. 갈수록 많은 이들, 특히 청년층은 공동체를 속임수의 동의어로 받아들인다.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공동체가 시급하다. 토마스 레온치니(Thomas Leoncini, 1985)는 새로운 공동체는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구성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과의 대담 ‘액체 세대’의 담론을 이어받아 하루살이 같은 액체 사회의 인간관계와 그 변화상을 탐구하고, 청년들에게 그들의 영혼의 현명함에 믿음을 가지고 삶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이고 희망으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들라며 젊은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방법을 제안한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도 과거의 행동 양식과 공동체 창조 방식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미래의 공동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문화는 종종 이 시대의 사랑이 변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여전히 사랑을 갈구한다. 무엇보다 사랑받고 싶어 한다. 현대사회는 인간을 시장의 법칙을 따르는 소비 대상으로 변화시켰고, 사람들은 자신을 시장의 기준에 맞추려 한다. 이들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인정받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끊임없이 노력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적 쓰레기가 됨을 의미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심리적 유배’ 상태로 지내게 된다. 심리적 유배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가정에서조차 소외된 것처럼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현대인은 어떤 면에서 모두 심리적 이민자다.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Czeslaw Milosz)는 “유배란 단지 경계를 건너는 것이 아니다. 유배는 망명자의 내면에서 성장하고 성숙해 그를 변화시키고, 결국 그의 운명이 된다. 유배는 자유의 증거지만, 이는 두려운 자유다. 유배는 파멸을 일으키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 더 강인해질 것이다”라고 했다. 심리적 망명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강해서, 현대인들은 사회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구매 능력과 기존에 구매한 물건을 신상품으로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을 끊임없이 자랑한다. 문화예술, 트렌드를 즐기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내비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러한 태도를 덮어놓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딥 러닝, 강력한 인공지능, 생성형 AI는 평균 인간보다 일천 배나 높은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고 장차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고가 팽배하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현대인은 시간이 갈수록 현실을 평가절하하지만, 미래를 향한 기대는 매일 재조정한다. 그 결과 현실은 우리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가는 느낌이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은 개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별로 세계관이 다른데, 이러한 개별적인 세계상들이 상호작용해 다양한 사상, 보편적 개념, 기호를 형성하며 ‘원하면 가질 수 있는 사회’를 ‘가질수록 원하게 되는 사회’로 바꿔버렸다. 기술이 발달하고 형식과 모양은 달라졌어도 인간의 내면이 가장 원하는 것은 어쩌면 희망, 사랑, 관계 같은 것이 아닐까. 문화예술에서 사라지지 않는 테마인 이유도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관료주의와의 거리
틀 안에서 틀 밖으로
관료주의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핵심 단어 중 하나이다. 인도 작가 아미트 차우드후리(Amit Chaudhuri)는 소설 『자유의 노래』에서 관료주의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한 어른들의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사무실은 차와 뒷담화와 모든 업무가 무한정 연기되는 공간이다. 어찌 보면 그곳은 세상과 연을 끊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려는 이들을 위한 아늑한 휴식 공간 같기도 하다.” 관료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단절시키고 습관을 중요하게 여기게 해 사람들을 세상의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묵시(默示)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료주의는 자아 형성 과정에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누르는 버튼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됐다. 문제는 그 버튼을 누르는 순간 관료주의로 인해 인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관료주의는 직장뿐 아니라 취미와 희망을 아우르는 모든 영역을 침범했다. 심지어는 재능마저 관료화됐다. 가슴에 음악을 향한 열정을 품은 한 청년이 있다고 해보자. 그가 순수하게 작곡만 해서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성공의 기회를 잡으려면 자신의 재능을 관료화해야 한다. 이 말은 곧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거나 유명 기획사에 취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요즘은 예술마저 관료주의의 창조물로 전락한 것 같다. 수학 공식처럼 쉽게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대상이 돼버린 것 같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표현에 따르면 “음악은 우리 몸에 문을 내어 영혼이 빠져나와 세계와 교제할 수 있게 해준다”. 음악을 버린 개인주의 사회에서 ‘타인과 교제하지 못하는 것’이 개인주의 시대에 인간의 가장 유용한 재능으로 간주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예술을 모든 것을 분류하는 관료주의 틀 안에 꿰맞출 수는 없다. 그리고 인생도 노래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예술 행위이다. 하지만 관료주의 사회에서는 ‘우리’는 ‘그들’을, ‘그들’은 ‘우리’를 판단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언제 어디에서 글을 써야 하고, 어떤 대학을 다녀야 하고, 글쓰기 전에 책상을 어떻게 정돈해야 하고, 조명은 어떻게 해야 하고, 몇 시간마다 워드 파일을 열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교육도 있다. 이러한 일타 강사들이 작가 위에 군림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위대한 작가 중에는 관료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는 앉아서 작업하면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며 반드시 일어서서 글을 썼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 역시 손가락 끝으로 영혼을 내보내려면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앤서니 트롤럽(Anthony Trollope)처럼 15분 안에 반드시 글 한 페이지를 완성해야 하는 강박을 가진 작가도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가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프루스트는 글을 쓸 때면 언제나 소음 방지를 위해 벽면을 온통 코르크로 도배한 방에 틀어박혔다. 에우제니오 몬탈레(Eugenio Montale)처럼 대학을 나오지 않은 세계적인 작가도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다. 그것은 절대 관료화할 수 없다. 위대한 작가들은 아주 은밀하고 지극히 사적이며, ‘자의식’의 일부를 구성하는 ‘내면의 자아’와의 만남을 통해 내적 언어를 정복했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준비를 넘어 물리적으로도 준비할 필요가 있는데 이 역시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부분이다. 모든 사람에게 은밀하고 지극히 사적인 태도를 통해 외부로 표출되길 끊임없이 종용하는 내면의 알테르 에고(alter ego)가 있다면 누구나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의 알테르 에고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어야 감동을 받고,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수많은 천재, 특히 문학계 천재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러한 내면의 자아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알테르 에고와 협력하는 모든 이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은 타인보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시인 프란시스코 루이스 베르나르데스(Francisco Luis Bernardez)는 “나무에서 피어난 것은 나무 아래 묻힌 것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아름답게 꽃피운 나무를 볼 때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즐길 수 있는 건, 모두 뿌리 덕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뿌리가 깊고 튼실해야 가지와 잎도 무성해진다”라고 했다. 또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이 좋고 열매를 맺나니’, ‘학비탐기화, 요자발기근(學非探其花, 要自拔其根)’ 즉 배움은 꽃을 탐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그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내는 터득(erudition)의 차원인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사물의 체계(Le systeme des objets)』에서 소유(Having) 감각에서 경험(Doing)의 세계로의 전환을 예고한 바 있다. “상징적 가치와 사용 가치는 구조(構造)적 가치로 대체된다. (…) 개인의 상호적이고 사회적인 구조의 두드러진 변화와 병행해 이전의 근본적인 울타리가 제거되는 것이다.” 창의성은 곧 창발성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작품의 창작이 아니라 ‘주변 환경의 프로그래밍된 센세이션 만들기’이다. 예술을 더 이상 유토피아적, 비판적 요청으로만 파악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현장감 있는 예술은 오늘날 삶의 자극소로서, 사회 조기경보 시스템으로서, 현실 연구의 측정기구로서 기능한다. 이에 따라 사회적 삶은 곧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 된다.
오늘날 공동체적 의미의 실천(Signifying Practice)으로서 문화예술 장르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상보적, 중용적 탈경계화 현상이 대두된다. 자기 표출과 감정의 절제로서 ‘하고자 하는 바(所欲)’와 ‘하는 바(所爲)’ 간 탈경계화와 편협성을 지양하고 균형 잡힌 인간관계와 질서 있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따른 시의성(時宜性), 즉 ‘시중(時中)’의 의미를 끊임없이 염두에 둬야 한다.
나가며: 공동체적 시대정신
문화예술과 공공성이라는 덕목
21세기 벽두에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새천년을 위한 여섯 가지 메모(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 1988)』에서 지속되길 바라는 공유 가치로 ‘가벼움, 지성, 공공성, 타자성, 시각성, 이론’에 관한 덕목(德目)을 제안한 바 있다. 덕목이란 문화예술계에서 분리하거나 고립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덕목은 창작 행위에 내적으로 각인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독자적인 인간 행동 영역으로서 예술이 지향하는 기본적인 인간적 관심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인간적 관심사를 다룰 것인가, 서로 다른 여러 관심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덕목은 이론적 전제와 유사하게 모든 문화적 실천에 스며있다. 특히 공적 덕목의 위대한 전통으로서 공공 영역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일상적 공공 환경에 대한 배려에서 ‘외견상의 자연스러움(Selbstverständlichkeit)’은 공직자의 고귀하고 철저한 의무로 당연시된다. 질 좋고 꼼꼼한 공공 서비스는 지역 문화권 시민 사회의 역사에 뿌리를 둔 정치적 사명감에 기인한다. 확실히 그것은 단기적인 조치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의 정치 체제에 뿌리내린 꾸준한 실천의 산물이다.
특히 정치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살고 싶은 사회의 형태를 결정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은 정당의 영역보다 훨씬 크다. 공공 영역에 대한 배려는 비록 철저하게 정치적인 사명의 결과이긴 하지만, 정부의 이해조차 넘어선다는 혹은 그래야 한다는 의미에서 초 정치적이기도 하다. 공공 영역에 대한 관심이 보존돼야 하며, 특히 공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의 광적으로 철폐하는 것이 일반적 신조가 돼버린 현재의 지배적인 경제적 패러다임을 고려할 때 그 필요성은 더욱 절박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자임하는, 그리고 그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는 사회에서는 언제나 공적 이익이 사회를 황폐화하는 무분별하고 무제한적인 사적 이익을 견제해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화의 덫』에서 말하는 20대 80의 양극화된 사회 구조처럼 부유한 국가들에서조차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못 가진 자가 체계적으로 양극화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제3세계화는 우리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편, 그러한 사회 재편성 기획이 온당하고 바람직하다고 믿는 자들의 지성을 의심하게 한다.
도시건축 평론가인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도시는 다양한 삶의 기능들이 얽혀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변화하는 유기적 복합체이며, 따라서 낡은 건물과 새 건물이 혼재하고 생활의 활발한 혼란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봤다. 또한 그것은 구성원들의 작은 필요와 복합적 연결에 섬세한 주의를 기울이고 점진적 발전을 유도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러한 작업에는 섬세한 이해와 참을성 있는 협의 과정이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 자신, 그리고 개인들의 연대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를 사회로 바꿔 생각해봄 직하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사회, 더 나아가 세상의 공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데 필요로 하는 지식과 경험, 문제점들을 향한 비판적 시각과 안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유형의 사회, 새로운 유형의 인류를 맞이하고 있다. 메타 사피엔스(Meta Sapiens)는 메타버스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생각하는 기계 시대, 메타버스 문명, 초미학적 휴머니즘(Trans-Aesthetic Humanism), 기후 환경 등 복잡한 관계 체계에 있어서 프로토콜 명제(protocol statement)의 분기작용과 알고리즘(algorithm)의 재귀작용이 교차하는 세계에는 진화와 회선 사이에서 엄격하고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 이 미분화의 세계가 분화된 것, ‘이발(已發)’의 세계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존의 세계다. “소박한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된다(樸散卽爲器)”. 즉 원천이 분할돼 다양한 개물(個物)이 생겨났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위대한 제작은 쪼개어 나누지 않는다(故大制不割)”. 즉 천하의 계곡(순수 본성)과 같은 중용의 삶을 요구한다. 이렇게 분화해가는 과정을 진화(evolution)라 한다면, 분화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과정을 회선(involution)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의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본래의 순일성(Primordial Simplicity)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이 근원으로 되돌아감(going back to the origin), 복락원(paradise regained), 귀향(homecoming), 귀일(歸一), 복귀, 원시반본(原始返本), 귀명(歸命), at-one-ment, re-conciliation, re-union 등등의 낱말이 상징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 때 옛날의 나에서 진정한 우리로 다시 태어나는 ‘변혁(變革)’의 긴 여정을 완성할 터이다.
최익서
최익서(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교수)

‘문해(文解)와 저술주체로서 미학적 트랜스휴머니즘’에 조응하는 Museography, Exhibition Design, ICT Media 등 전시디자인 및 서사환경의 확장적 의미로서 공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와 관련한 다수의 프로젝트를 기획해왔다. 디자인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사변적 모색에 기초해 ‘적응성 환경(Adaptive Environment)’의 화용적 가능성들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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