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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적 가치를 발산하는
K-미술의 백년지대계를 꿈꾸며

인간의 삶, 역사, 예술에 관한 근본적 질문.
이를 표현해낸 혁신성이 조합된 작품을 마주할 때
우리는 시각적 쾌감을 넘어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 안에서 호흡하며 지적으로 성장한다.
서구 중심의 순수예술 시장이 지각변동을 맞는 지금,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킬 준비가 됐는가?
글_주연화(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 부교수)
한류와 K-Arts를
둘러싼 착각의 늪
K-콘텐츠의 글로벌 진출이 지난 몇 년 사이 두드러진다. 2019년 개봉한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상을,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에미상을, 2022년 방탄소년단(BTS)은 빌보드 뮤직 어워드 6년 연속 수상 기록을 세우며 K-콘텐츠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전 세계로부터 주목받았다. 세계 패션계에서는 한국 아이돌 모시기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주요 해외 명품 브랜드의 한국 매출이 2022년 평균 38%의 신장률을 기록한 영향이 크다. 한국 소비자의 명품 구매력이 향상된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루이비통(Louis Vuitton)은 지난 4월 29일 한강 잠수교에서 브랜드 최초로 프리폴(Prefall) 패션쇼를 개최했고, 구찌(Gucci) 역시 5월 16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를 아시아 최초로 공개했다. 넷플릭스는 앞으로 4년 동안 25억 달러를 한국 콘텐츠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세계에서 주목받는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와 크리에이터의 국제적인 활동,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은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 자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제고하고, 국제적 교류 또한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대중문화 분야에서 K-콘텐츠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의 순수예술 역시 국제적 관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또한 크다. 백남준의 해외 전시, 세계 여러 미술관에서 이어지는 이불과 김수자의 프로젝트, 해외 주요 갤러리와 함께 일하며 알려진 양혜규, 이우환, 박서보 등 단색화가들의 국제적 명성 획득, 1960~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작가들을 조명하는 구겐하임 미술관(The Solomon R.Guggenheim Museum) 기획전 등 한국 젊은 작가들의 크고 작은 해외 프로젝트가 과거에 비해 많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김승연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예술본부장에 따르면 지난 3년 사이 해외기관에서 한국 작가의 전시가 늘어나며 이에 대한 지원 또한 증가하고 있다. 또한 지난 몇 년 사이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큐레이터와 갤러리 수가 증대하고 한국 미술품 구매 인구가 늘면서 국내 미술 시장 규모도 커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프리즈(Frieze)’ 아트 페어 개최, 해외 갤러리의 한국 진출이 이뤄지며 한국과 글로벌 예술계 사이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그 방향성이 해외에서의 적극적인 한국 진출, 외국 작품의 수입이 주를 이루지만, 국제적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컬렉터들의 한국 방문은 국내 예술가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프리즈 서울 2022 ⒸFrieze

하지만 K-콘텐츠 혹은 한류의 유행이 K-Arts의 세계화까지 견인할 것이라는 견해에는 두 가지 함정이 존재한다. 첫째, 한류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소비가 ‘자연스럽게’ 한국 미술로 이어질 것이라는 소비의 관점에서 발생하는 함정이다.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은 소비자를 공유하지 않는다. 홍콩 영화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며 한때 홍콩 영화배우의 사진이 한국 초등학생들의 책받침에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인기가 홍콩 예술인들에게 이어지지 않았다. 영국의 록 밴드 비틀스(The Beatles)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했지만, 1970년대 미술사는 미국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은 가깝지만 멀고, 소비자 또한 다르다. 둘째,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처럼 순수예술가들과 그들의 창작품 또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창작의 관점에서 발생하는 함정이다. 이는 사실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국내 작가들이 각자의 예술관을 갖고 주어진 환경과 개인적 맥락 속에서 진정성 있는 작품을 제작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으로 탄생한 작품들이 현재 세계 미술사와 미술계에 어떤 영향력과 가치를 지니는가? 그 답은 상당히 모호하며, 영향력과 가치를 세계 미술의 흐름 속에서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 앞에 놓여있다.
공감과 소통, 진리와 진실
그 위에서 성장한 순수예술
예술의 창작, 생산, 유통, 소비는 매우 복합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이뤄진다. 이는 개인의 영역(재능)인 동시에 공적인 영역(교육)이고, 제도(미술계와 교육)의 문제인 동시에 자본의 논리(소비력)이며, 개인적 취향의 문제(구매자)이자 문화 권력(주요 기관)과 서구 중심 역사(주류 미술사)의 산물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 한국 예술의 국제화, 정부가 원하는, 혹은 사람들이 막연히 바라는 K-Arts의 세계화는 상당히 복잡한 과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장단기 목표와 치밀하고 단계적인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국제적 콘텐츠의 창작과 이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문화를 형성하려면 문화 교육 시스템과 문화 향유 시스템 변화에 기반한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이와 달리 창작 작품을 국제적으로 유통하는 매개의 영역은 영리와 비영리 기관 사이의 상호 역학 이해, 그리고 글로벌과 한국 로컬 사이에 존재하는 헤게모니 이해에 기반한 단기적 전략과 중장기적 전략이 모두 필요하다. 무엇보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창작의 영역은 단기간에 가능하거나, 단순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개인이 이뤄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순수예술은 오랫동안 인간의 지적 정신활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시각예술은 그것이 지닌 조형적 아름다움 이외에 오랜 시간 시각 언어로서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영역과 관련됐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작품의 외적 형태가 지니는 특성과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 즉 작가의 의도와 작가가 커뮤니케이션하려는 바, 혹은 내가 만들어 내는 의도 자체가 중요하다. 그리고 메시지와 작가의 의도는 그 작품이 지닌 가치로서 작품의 질적 가치를 결정짓는다. 이 질적 가치를 구체화해보면 이는 작품이 지닌 미학적 가치, 역사적 가치, 정치∙사회적 가치 등으로 구성된다.1 미술사 흐름 속에서 가치 있는 미학적 관점을 제공하거나 새로운 형식성과 매체의 가능성을 제시하는지, 혹은 사회의 드러나지 못한 문제나 미래 가치를 제시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가치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하는지에 따라 작품의 질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 질적 가치, 전달하는 메시지와 개념,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 즉 글로벌 미술계와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가 작가와 작품의 국제적 위상과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감과 소통의 대상은 단순한 ‘시각적 쾌감’을 넘어 삶의 진리, 혹은 삶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이를 ‘진정성 있는’ 순수예술이라 부른다. 순수예술이 추구하는 ‘공감’은 진리, 진실과 연결돼 있다. 그리고 그 ‘진리와 진실’은 소통의 번역, 이해와 연결돼 있다. 따라서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삶과 예술에 대한 통찰과 지식이 필요하고, 이는 창작자의 역량에서 발현된다. 번역, 이해와 연결된 소통은 유통의 영역과 관련이 깊다. <기생충>이 전 세계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훌륭한 번역의 공도 크다.
삶과 역사, 예술에 관한 나름의 질문과 답, 그리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는 방식의 혁신성. 이 모든 것이 조합됐을 때 우리는 순수예술이라 불러왔다. 그렇다면 한국 작가들은 이 같은 역량을 지니고 있는가? 다시 말해 한국 작가들은 예술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슈를 다룰 수 있는 환경과 맥락 안에서 성장하고 활동해 왔는가? 현대 한국인이 성장해 온 일반적인 과정을 돌이켜 보면, 국어, 영어, 수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만 보더라도 한국은 사고와 철학을 기반으로 한 예술 창작자, 또는 다양한 의미와 철학을 함께 즐기고 능동적으로 사고하는 예술 향유자를 배양하기에 취약한 토양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이 혁신적일 수 있었던 이유에는 1940년대에 태어나 격동적인 현대화와 시대의 변화를 경험한 청년 작가들이 기존의 미술을 거부하고 시대의 변화가 지닌 사회∙정치적 이슈를 몸소 경험하며, 나름의 반응으로 시각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세계 미술계 흐름과 맥을 같이 함에도 개별 작가와 작품의 측면에서 그 또는 그녀의 메시지와 태도가 타 작가와 비교해 지니는 차별성은 좀 더 논의돼야 하는 지점이며, 이 차별점이 바로 개별 작가의 국제적 입지를 결정함은 부정할 수 없다. 즉 창작이 국제적 예술의 맥락 안에서 논의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국제적 미술의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동시에 개별적 차이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그들의 작품을 국제적 미술 맥락 안에 포지셔닝 하고, 동시에 차별점을 연구하고 밝히며 국제 미술계에 전달할 매개자(연구자와 기획자, 거래자 모두를 포함)가 필요한 것이다.
작품의 질적 가치를 위한
근본적 토양의 필요
비즈니스 관점에서 특정 사업이나 상품은 내적 가치와 외부적 환경이 모두 받쳐줄 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상당 부분 내적 가치(메시지와 형식의 혁신성)보다 시각적 특성과 수공적 특성 더 강한 경우가 많고(해외 전문가들과 구매자들은 한국 미술 작품의 특징으로 종종 수공적 섬세함과 정형화된 스타일을 언급한다), 한국 작품의 시장 수요 역시 여전히 국내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한국 미술품 구매자들이 해외 작품을 구매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해외 작품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고 판매자가 증가하며 선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한국 작품의 수요가 해외 작품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미술의 발전은 그 소비자인 한국의 문화 향유자와 구매자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그러한 기반의 글로벌 성장이 단기적으로는 한국 작가들에게 득이 돼 보이지 않는다. 창작과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지원 시스템과 관리∙운영 시스템은 받쳐주는가? 순수예술계의 낮은 임금 구조는 인재의 업계 탈출과 해외 유출로 이어지고 있다. 작품에 대한 번역 지원이나 해외 전시 지원도 좋지만, 한국 미술이 현재 국제적 미술계의 흐름 속에서 가진 강점과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에 기반한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가치 사슬 분석(Value Chain Analysis)을 접목하면, 한계와 보강 지점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날 수 있다.
최근 정부가 콘텐츠 제작과 유통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만들어낸 콘텐츠가 외부 환경이나 소비자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거나 다양한 소비자와 소통하는 데 실패하면 시장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순수예술은 한정된 시장과 부족한 교육 시스템, 서구 중심의 시장 생리 등 여러 이유로 국제적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전환을 맞고 있다. 순수예술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국내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SNS를 통해 국제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의 문화 소비 자본이 증가하면서 서구 중심이었던 예술계가 움직이고 있다. 기존에 장애로 작용했던 문제들이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문화 생태계로 진화하면서 콘텐츠만 좋다면,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시스템이 받쳐준다면 한국의 순수예술 또한 국제무대에 알려질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콘텐츠와 유통 시스템 중 더 중요한 것, 우선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둘 모두로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이는 것도 있고 장기적으로 결과가 나오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정책은 유통 채널을 마련하는데 지나치게 치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질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 삶과 예술의 진지한 접근과 나름의 철학을 제시하는 예술 작품, 인류의 미래에 기여하는 예술 작품. 이러한 작품을 창작해 낼 토양을 마련하는 것은 장기적인 작업이며, 아주 이른 시기에 이뤄지는 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 순수예술 강대국을 꿈꾼다면 문화를 산업적인 관점에서 수익화 모델로 접근하며 이를 유통할 방법만 고민할 게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발산할 예술 작품들을 창작해 낼 근본적 토양을 마련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했다. 교육은 국가와 사회 발전의 근본 초석이기 때문에 ‘백 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1. 이 질적 가치와 분리돼 작품이 지닌 외재적 가치로 투자적 가치 등이 존재할 수 있다.
주연화
주연화(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 부교수)

미술 경영 및 미술 시장 전문가로 국제적 미술 현장과 학계에서 활동 중이다. 아라리오갤러리, 갤러리 현대 등에서 일하며 20여 년 동안 한국 작가를 포함한 글로벌 작가의 국제 프로모션과 시장 개척, 한국 갤러리의 해외 진출, 전시 기획과 작가 관리 업무를 책임져 왔다. 현재 중국 베이징 엠우즈(M Woods) 미술관 인터내셔널 프로젝트 어드바이저이자 한국예술경영학회 대외협력위원장, 한국 키아프 외부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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