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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을 지키기 위한 집단의 울타리
예술인권리보장법의 의미

‘블랙리스트 사태’와 ‘미투 운동’을 연이어 겪으며
예술인의 열악한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제정된 예술인권리보장법이
9월 25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문화예술인의 땀과 눈물의
결실인 예술인권리보장법은 과연 잘 작동하고 있을까?
글_이씬정석(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
독자를 위한 변명
나는 학술적 논증이나 법리적 분석을 위해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예술인권리보장법’에 기대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곱씹으며 이 글을 쓸 것이다. 예술인권리보장법 해설서를 읽고자 한다면 다른 글을 찾아보길 권한다. 법이 시행되기 전인 지금의 내가 느끼는 단상(斷想)을 짚어보며,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코끼리를 만져야만 한다(독자는 두 달 뒤에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 과정과 의미
이 법을 만들자고 처음 제안한 것도, 입법을 위해 뛰어다닌 것도 문화예술 현장의 예술인들이었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 ‘예술가의 권리를 법률로서 보호한다’라는 규정 이후, 예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첫 법률이 제정되기까지 정부와 입법부가 손을 놓고 있던 일이었다. 국가기관 등이 벌인 ‘블랙리스트 사태’의 제도적 대안으로 제기돼, 일반적이지 않은 예술인의 직업적 특성에 맞는 권리 보호 요구와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의 힘이 더해져 위계 폭력, 불공정 강요, 성희롱·성폭력의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피해자 구제 제도를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예술인들의 요구에 정부와 입법부가 이제야 한 발짝 따라왔다.
예술인 지위 및 권리 보장법 제정 촉구 운동

예술인 지위 및 권리 보장법 제정 촉구 운동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2019년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예술인권리보장법은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술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법안 발의 과정에 직접 반영해 기존 법률보다 창의적이고 예술 현장에서 작동할 만한 새로운 접근이 많았다. 그러나 법률안은 20대 국회에서 진통을 겪으며 깎여 나가고 두루뭉술해지더니 임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다. 21대 국회 개원과 함께 다시 발의됐을 때 예술 현장의 당사자 중 일부는 재발의 법안에 기대하고 제안했던 내용이 없어지고 법 제정 취지에서 상당히 벗어났다며 손을 떼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법은 예술인을 “예술 활동을 업(業)으로 하여 (…) 활동을 하는 사람”, “(…) 교육·훈련을 받았거나 받는 사람”으로 정해 예비 예술인까지 적용 대상에 포함했다. 예술 활동, 예술교육활동, 예술지원사업, 예술교육기관, 예술지원기관, 예술사업자, 예술인권리침해행위 등 예술계에 적용할 법적 정의(제2조)가 정해졌다.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제3조), 국가기관 등의 책무(제5조)를 규정하고 예술표현의 자유 보장(제2장), 직업적 권리의 보호와 증진(제3장), 성평등한 예술 환경 조성(제4장) 등에서 권리 내용과 금지사항, 실태조사, 조성 방안을 법률에 담았다. 선언적 법률이 아닌 작동하도록 기구(제5장)와 구제 및 시정조치(제6장)가 마련됐다. 예술인권리침해행위와 예술활동 관련 성희롱·성폭력행위에 대한 신고, 조사, 구제조치, 시정권고, 시정명령, 재정지원 중단을 비롯해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명시했다.
거버넌스와 협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제도개선보고서〉 중 블랙리스트 방지를 위한 법제도 개선 권고의 내용으로 (가칭) 〈예술가 지위 및 권리 보호에 관한 법률〉 제정이 제안됐다. 이 법으로 국가기관 등 예술 지원 기관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해야 했기에 당연히 ‘거버넌스’가 호출됐다. 거버넌스, 협치의 작동 원리는 단순하다. 끝까지 민간에 정보와 권한을 나누고 이후 계획까지 함께 준비하는 것으로 정상 작동할 수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재도개선위원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재도개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법 제정 과정에서 ‘예술인권리보장법 입법추진 TF’가 활동했다. 이는 정부와 법률전문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국회 입법 과정부터 의견을 조율하는 거버넌스 통로로 활용됐다. 이 TF에 위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꾸준히 의견을 제시하고, 강도 높은 비판도 해왔다고 한다. 내가 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로 선출된 2022년 1월 이후 TF 회의에 몇 차례 불려가 정부 하위 법령 제정 과정을 마주했으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대통령 선거가 겹쳤고 정권은 교체됐다. 시행령 초안 논의 이후 새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묘하게도 TF 회의는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회의록 공개는 물론이고 공개적인 결과보고 발표조차 준비하지 않은 회의에서 위원들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의지와 역할이 법률 시행에 중요하기에 장관 면담을 계속 요청했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보여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제시한 기본 3가지 원칙인 ‘자율’, ‘분권’, ‘협치’가 흔들리지 않을지 우려감이 감지된다.
예술인권리보장법의 시스템에 대해
신문고와 권리보장위원회
권리 침해와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당한 예술인이 예술인 신문고에 신고 접수하면 예술인 보호관은 이를 조사해 조사 결과, 구제 조치 및 시정 방안을 권리보장위원회에 보고하고 위원회는 심의 후 조치, 권고, 명령 등을 결정해 통지한다. 신고 접수, 조사, 심의 결정의 진행 과정을 감당할 행정적 역량이 심각하게 우려돼 제정 단계부터 별도의 독립기구 설치1를 요구했으나 잘려 나갔다. 지금(법 시행 전) 정부에 의하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신문고를 신고 접수 창구로 그대로 이용하고 2023년 12월까지 시스템 개편을 통해 확장 정비하겠다고 한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 신문고에 대한 예술계의 신뢰 수준에 비춰볼 때 신고 접수부터 여러 문제점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인사 개편을 통해 전 예술정책과장을 부이사관으로 승진시켜 예술정책관에 임명하고 ‘예술인 보호관’ 직위를 준비했으며, 새롭게 ‘예술인지원팀’을 만들어 주요 담당 부서로 편제했다. 신설된 예술인지원팀은 총 7인(팀장 포함)으로 예술인 권리 보호 외에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관련 업무를 관리해야 하기에 조사 및 구제 조치, 시정 방안 마련을 포함해 법이 정한 업무를 모두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2023년에나 채용된다는 개방형 공무원 1인 충원만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된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임명·위촉하는 권리보장위원회 위원장과 위원 구성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이 글이 읽힐 11월에는 임명·위촉돼 있어야 한다 2022년 5월 임기가 끝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과 위원 후임은 언제쯤 임명·위촉될 것인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초기에 선임될 위원장과 위원들이 제정법에 관한 문화예술 현장의 인식 부족과 예산 및 행정력 한계의 보완은 미뤄두고 추천과 임명·위촉 과정에 누군가가 제정법의 취지를 흔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예술인의 직업적 권리의 보호와
증진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
예술인권리보장법은 개별 예술인이 예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활동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법이어야 한다.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불공정과 불합리에 저항하려면 누구나 집단의 힘과 울타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예술인조합’이었다. 전형적인 노동조합이 활동하기 어려운 예술 현장에서 예술인조합이 예술인 권익을 위해 단결하고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했고, 논의 초기에는 문화예술 분야의 노동조합에 예술인조합의 지위를 인정하는 조항이 있었으나 삭제됐다. 문화예술인은 직업적 특성(프로젝트별, 단속적, 복수의 계약 등)으로 인해 기존 노동법으로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다. 예술인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필증을 교부받아도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에 따른 사용자를 특정해 교섭 테이블에 불러 앉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실태를 반영해 예술인권리보장법으로 문화예술 분야의 다층적인 사용자들에게 교섭을 요구하고 노동 조건, 안전, 사회 안전망 등에 최소한의 업계 표준을 만들어갈 것을 바란 것이다.
그러나 국회상임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치며 예술인이 결성한 노동조합은 노동법상 지위를 가지고 있어 이 법의 예술인조합과 다르다고 분리당했다. 법에 남은 예술인조합은 “특정 예술 활동에 관하여 특정 예술사업자 또는 예술지원기관과 계약을 체결하거나 계약 체결을 준비 중인 2명 이상의 예술인”이 결성할 수 있지만 사용자에게 교섭을 요구하더라도 거절하면 교섭할 수도 없고, 사유를 갖춘 사용자의 교섭 거부 행위가 불공정 행위 유형2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제14조 제1항의 “특정”이라는 문구는 제10조 제2항에서 “예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단체를 구성하여 활동”할 직업적 권리와 충돌하고 예술인의 활동 현실과 달라 반드시 조정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근로기준법 개정의 요구도 사용자 전속성을 넘어서는 ‘근로의제’인데 예술계 활동 현실에 맞지 않는 ‘특정’을 삽입함으로써 예술인조합의 조항은 무력화되고 왜곡됐다.

예술인권리보장법 시행령·시행규칙 공청회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법에 담기지 못한 몇 가지
현재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예술계를 포괄하지 못한다. 법이 정하는 ‘예술교육기관’ 외에 예술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개인 교습, 사설 학원 등 문화예술교육 영역까지 포함돼야 이 법률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학원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직업예술인 양성 목적이 아닐 수 있다는 반대 논리에 막혀 예술교육기관에 진학하기 위한 입시학원조차 시행령에 담지 못해 예술인권리침해행위의 사각지대에 남겨졌다.
또한, 국가기관 등 예술지원기관이 예술인권리침해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를 기획하고 집행한 공무원은 어떤 처벌이나 징계에 처할 수 있을까? 국가기관 등 예술지원기관의 예술인권리침해행위에 대한 규정이 만들어졌으므로 이를 기획하고 시행한 이는 법 위반에 따라 처벌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를 직접 시행했던 공무원이 정권 교체 후 제자리 혹은 더 높은 지위로 돌아오는 경우는 어떨까? 블랙리스트 사태 후 정부의 처리결과 발표를 보면 수사의뢰권고자 26명 중 16명(수사의뢰 10명 외)과 징계권고자 105명 중 39명(중징계 1명, 해임 1명, 정직 5명, 감봉 8명, 견책 7명, 경고 2명, 주의 42명 외)은 퇴직했다는 이유로 징계조차 이뤄지지 않았으며 대부분 견책과 경고, 주의 등 가벼운 징계를 받고 공무원 직위를 유지 중이다.
지방자치제도가 확대되고 지역문화진흥정책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중요함에도 이 법률에서는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하는 조항을 명시적으로 찾기 힘들다. 최소한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를 제정하도록 독려하고 그에 따라 지역별 권리보장위원회를 구성하거나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피해 구제 지원기관을 설치·지정하고 행정 절차를 일정 부분 지역별로 위임할 필요가 있다. 예술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예술인이 권리 침해 행위나 성희롱·성폭력 행위를 했을 때, 향후 다른 지원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의 활동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과태료 처분만으로 끝나는 것인가? 휘날리는 이름값으로 다른 곳에서 행세하고 다니는 행태를 어떻게 용인해야 하는가? 지방자치단체나 예술지원기관 등이 각각의 조례와 운영 규정을 제정해 위촉이나 지원 과정에 적용해야 한다.

예술인권리보장법 시행령 내용과 문제점은?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모두를 위한 변명
예술인권리보장법 시행 과정에 순기능을 강화하고 부족한 제도를 개선해가면서 건강하게 선(善)순환하는 문화예술 생태계를 만들길 기대한다. 이 법은 ‘자율, 분권, 협치’ 3가지 제도개선 원칙에 따라 제정된 제정법이다. 이 법률에 적용한 이 3가지 원칙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활동은 결국 정치적인 운동이다. 정치적 당파성 문제가 아니라 자율과 분권, 참여를 통해 현실을 만지며 조형(造型)해가는 문화예술 당사자들의 권익을 위한 실천이다. 이 실천을 함께 할 도반(道伴)이 모이면 예술인 권리 운동이 확장될 것이다.
1) 2022년 2월 문화예술노동연대와 국민의힘 김승수 국회의원실이 간담회를 진행했을 때, 김승수 의원은 자신이 법률안에 반대했던 이유가 ‘독립기구’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별표 1] 불공정행위의 세부적인 유형 및 기준(제5조 관련). 이 불공정행위 유형은 예술인복지법의 불공정행위 유형 별표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이씬정석
이씬정석(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

음악인들의 노동조합인 뮤지션유니온 전 위원장이자 사회적 거리서 노래를 만들고 부른 지 20년이 넘은 음악노동자이다. 문화예술 분야 12개 노동조합과 노동단체의 연대체인 문화예술노동연대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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