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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거버먼트가 아닌
지속가능한 거버넌스를 꿈꾸다

‘좋은 거버넌스’라는 말은 낯설다. 예술 현장에서 자주 접하는 말들은
‘거버넌스의 후퇴’, ‘상실’, ‘일방적’ 같은 말들이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한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TS) 워킹그룹 사례를 소개하며
그간 현장에서 느낀 예술계 거버넌스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KTS를 성공한 혹은 실패한 사례로 결론짓기 위함이 아니며
오히려 거버넌스의 이상과 현실을 고찰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글_강보름(연극연출가)
넘어서기 어려운 거버넌스의 장벽
예술 현장에 있는 창작자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거버넌스의 형태는 지역 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등의 작품 지원사업 방식일 것이다. 필자는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청년 예술가 창작 지원사업을 통해 지원기관-수혜자의 관계로 처음 예술계 거버넌스를 경험했다. 처음 이 관계는 감사함으로 시작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무력감을 불러왔다. 지원기관의 요청으로 FGI 연구 인터뷰, 참여자 간담회 등에 참여했는데, 다음 연도에 사업이 폐지되거나 악화되는 방향으로 재정비돼 소위 ‘현타’가 온 적이 여러 번 있다. 이 같은 경험이 해마다 누적되면서 청년 예술가라는 ‘종’의 불안정성을 체감했다. 지금은 지원사업뿐만 아니라 ‘한국형 문화예술 거버넌스’라는 정치와 예술계 지형에 따라 매년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가 있다. 정부와 서울시 등 행정기관은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을 거버넌스(Governance)로 생각하는 반면, 현장의 창작자들은 이들을 거버먼트(Government)로 인식하는 차이를 지적한 의견이었다. 예술 행정가들은 예술가와 교집합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여러 경험을 통해 지원 조직과 기관의 정체성, 사업 운용의 유연함 여부, 예술 행정가와 예술가 두 사람의 개별적 성향이라는 여러 변수를 아예 상수로 설정해야 작업이 원활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나 기관의 제작 공모사업에 참여할 때는 예술 행정가의 역량에 따라 예술가의 작업 퀄리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론적으로 거버넌스와 거버먼트라는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에 깊이 동의하면서도, 이 차이가 과연 좁혀져야 하는 괴리인지, 혹은 이러한 차이를 차이로써 다루는 역량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예를 들어 현재 공연예술계는 장애예술 창작과 향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중 가장 본질적인 이슈인 극장의 장애 접근성은 장애인 창작자, 장애인 관객의 물리적 접근성과 심리적 접근성 모두를 고려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거버먼트 영역에서 협의, 조율되어야 할 많은 부분들이 극장의 예술 행정가들에게는 예산과 효율성 이슈로 인지돼 공연팀이나 접근성 매니저 개인이 감당해야 할 영역으로 떠넘겨진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 창작자들이 좀 더 적극적인 주체로서 거버넌스에 관심을 두고 스스로 참여하려고 했는가를 점검해보자는 의견에는 반성과 동의가 어려웠다. 필자 또한 창작에 집중하며 예술계 안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시기와 예술계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생기며 거버넌스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에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같은 청년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예술계 현장에서 종사한 기간, 창작 포지션 등에 따라 상황이 천차만별이라 뭉뚱그려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비단 청년 예술가뿐만 아니라 여성, 퀴어, 장애인, 지역, 이주민 등 다양한 소수자 예술가들이 양적으로는 얼마나 거버넌스의 (단순 수혜자가 아닌) 참여자로 들어갔는지, 질적으로는 당사자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구조인지 점검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KTS에서 경험한
소통과 집단지성의 가치
거버넌스와 관련해 필자가 경험했던 공연예술자치규약(Korea Theatre Standards) 워킹그룹 활동 사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KTS 워킹그룹은 2018년 2월 연극계 미투 운동 이후 안전한 창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연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며 시작됐다. 2019년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주최로 CTS(Chicago Theatre Standards)의 코디네이터 로라 피셔, 스웨덴의 미투 운동을 이끈 수잔나 딜버 등 해외 예술가들을 초청해 강연 및 워크숍이 열렸다. 이후 이 이슈에 관심 있던 공연예술 창작자들이 KTS 워킹그룹이라는 이름으로 2주에 한 번씩 모여 각자의 경험을 나누며 스터디를 지속했다. 국내 창작자들의 대안적 실천 사례를 수집, 분석했고, 현재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계 폭력과 성폭력 사례 조사, 창작 과정에서 지켜야 할 규약을 주제별로 논의했다. 2020년에는 토론 및 집필 과정을 거쳐 공연예술 창작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자치규약을 발표했다.
그런데 어떻게 활동가도 아닌 예술가들의 자발적 운동이 2년 넘는 장기적인 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자에게 KTS 워킹그룹 활동이 어떤 의미인지 돌아봤다. 모든 의제가 그렇지만 창작자의 이러한 자발성은 이것이 창작 활동이나 생업보다 중요한 혹은 그것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이슈로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나 역시 당시의 활동은 창작을 잠시 미뤄두거나 포기하는 게 아닌 오히려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간 접점이 없던 동료들과 작업이 아닌 형태로 만나 생각을 교류할 수 있었고, 좋은 작업이란 작품의 퀄리티를 넘어 창작자인 나를 둘러싼 창작 환경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KTS 워킹그룹 ⒸKTS 워킹그룹 공식 페이스북

KTS 워킹그룹 ⒸKTS 워킹그룹 공식 페이스북

KTS 워킹그룹은 구체적 결과나 기한을 상정하지 않고 일단 모임 자체에 목적을 두고 출발했다. 자연스럽게 기관과 협회라는 공식 조직이나 문제 해결에 목적을 둔 연대체와 다른 프로세스로 운영됐다. 모임의 규칙, 진행 방식 등도 누군가가 주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가 발언하며 상당히 느린 속도로 구체화해 나갔다. 이는 늘 시간에 쫓겨 효율성을 추구했던 창작자들이 기존 작업 방식과는 다른 관점과 태도를 체화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두드러졌던 지점 또 한 가지는 고정 멤버 없이 격주로 일요일 오전 10시에 가능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개인적인 사정이 있거나 창작 활동 시기와 겹치면 자유롭게 빠질 수 있었다. 덕분에 참여자들은 부채감, 희생 의식 같은 감정적인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정부 조직, 기관이나 협회, 단체 예산을 지원받지 않은 점도 짚고 싶다. 여러 후원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멤버들이 총회를 통해 신중하게 논의하고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경제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두 가지 활동을 진행했다. 먼저 2020년 상반기에 약 2년 동안 축적된 집단지성의 산물을 예술계에 공유하자는 목표가 생겼고, 이를 위해서는 좀 더 조직화된 방식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KTS 워킹그룹 내에서 집필진을 모집했고, KTS 홍보 및 확산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활용하기로 했다. 약 3달여 간 집필진이 기록물을 정리하고 집필하는 과정을 거쳤다. 2020년 9월 초,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PDF 파일을 업로드해 공개했고, 시민과 공연예술계 종사자 219명의 크라우드 펀딩을 받았다. 2020년에는 연극의 해 기치에 따라 ‘연극의해 집행위원회’에 참여해 예산을 분배받아 문화체육관광부의 관련 사업 예산을 분배받아 KTS 전국 워크숍을 진행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열린 워크숍은 ‘안전한 창작 환경’이라는 주제 아래 지역 예술인, 지역 문화재단 예술 행정가 등 여러 거버넌스 주체의 창작 과정과 협업에 대한 고민을 듣는 귀중한 기회였다.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 ⒸKTS 워킹그룹 공식 홈페이지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 ⒸKTS 워킹그룹 공식 홈페이지

앞서 KTS 워킹그룹이 상당히 느린 속도로 운영 됐다는 언급을 했는데 일례로 멤버들은 KTS를 발간하기 직전까지 이름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그룹원 대부분이 연극인인데 공연 예술이라는 범 장르적 용어를 사용해도 될지, ‘자치규약’, ‘행동강령’ 등 여러 개념 사이에서 어떤 것이 적절한지 등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 KTS라는 타이틀을 결정하기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제일 앞의 ‘한국’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무게로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KTS 전국 워크숍 초반에 지역 예술인들로부터 이러한 기획이 서울 중심주의라는 한계를 내포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 과정은 KTS를 지역에 보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KTS라는 하나의 참조 사례를 매개로 지역 예술인들과 안전한 창작 환경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목표를 재확인하게 했다.
다양한 주체들의 안전한 창작 환경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장애예술 네트워크와 분리된 비장애 공연예술계의 현실처럼 KTS 워킹그룹 내에 장애인 당사자는 없었다. 그룹원들 다수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30~50대의 배우, 연출가 포지션의 여성 창작자들이었다. 장애예술인들로부터 자문 받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KTS 전국 워크숍 기획 및 실천을 통해 KTS 워킹그룹의 구조를 점검하면서 지역과 장애라는 두 가지 특성을 고민해나가야 한다는 내부 과제가 발견된 셈이다.
멈춤의 당연한 이유,
행정과 어울릴 수 없는 현실
현재 KTS 워킹그룹은 2021년 하반기부터 휴지기를 갖고 있다. KTS 업데이트 등의 과제가 있지만 이전과 같은 추동력으로 모임이 재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러 함의를 갖는다. 공연예술계 현장에 더 이상 KTS가 필요 없을 정도로 안전한 환경이 구축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동력을 잃고 소진된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경우 우리 조직에는 맞지 않아 적용하기 어렵다고 효용성을 평가한 후 KTS를 읽은 것만으로 조직 혹은 예술 행정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거나, KTS 워킹그룹을 예술 행정기관/조직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러 온 사람처럼 대할 때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또한 조직이나 기관 내부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들과 일하는 예술가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워크숍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는 의심이 들 때 힘이 빠졌다. 예술 행정가와 예술가 양쪽 모두가 변화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예술가에게 시달리는 행정가 vs 행정가 때문에 창작을 못하는 예술가 구도)만 적나라하게 노출된 셈이다. KTS 워크숍을 마치 법정 필수 교육을 받듯이 비자발적이고 수동적 태도로 임하는 참여자들을 마주할 때면 활동의 취지와 본질을 이해받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이런 워크숍 실패 사례를 세팅과 진행방식의 문제로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그때는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가장 크게 다가왔던 문제의식은 KTS가 대화와 갈등 해결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법전 혹은 처벌 매뉴얼처럼 서로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는 사례에서 생겼다. 나의 활동 역량을 초과하는 문제로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커지기 전에 활동을 잠시 쉬어야겠다고 판단했다. 풀어놓은 이야기는 모두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으로 예술 행정가나 동료 예술가들이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글은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TS)을 좋은 혹은 실패한 거버넌스 사례라고 결론짓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례를 통해 거버넌스란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하는 과정을 공유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 지점에 대해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강보름
강보름(연극연출가)

연극연출가, 접근성 매니저. 2017년 연극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연극을 시작했고, 프로젝트 레디메이드라는 1인 극단으로 동료들과 협업한다. 웹진 연극人 편집위원(2019~2021)과 KTS 워킹그룹 멤버로 활동하면서 거버넌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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