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QUARE

지난호 보기

  • ∙VOL.10 [2024.05]
  • ∙VOL.09 [2024.03]
  • ∙VOL.08 [2024.01]
  • ∙VOL.07 [2023.11]
  • ∙VOL.06 [2023.09]
  • ∙VOL.05 [2023.07]
  • ∙VOL.04 [2023.05]
  • ∙VOL.03 [2023.03]
  • ∙VOL.02 [2023.01]
  • ∙VOL.01 [2022.11]

SQUARE

시련을 극복할 연대의 힘,
문화예술 거버넌스

블랙리스트 사태, 미투 운동 등으로 문화예술계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과거 사태를 통해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 많은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그리고 또다시
문화예술 거버넌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정치권력이나 행정 제도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문화예술 현장에 산적한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_이원재(문화연대 상임집행위원장)
국정과제 이면
거버넌스에 관한 정부의 태도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지난해 문화예술계에서 화제가 됐던 말이다. 자수성가한 사장님 특강이 아닌 제20대 정부의 법정문화도시 정책 설명 과정 중에 언급된 말이라 더욱 충격적이었다. 오직 돈밖에 모르는 초국적 자본조차 겉으로는 과정과 본질을 강조하며 물건을 파는 시대에, 정부 공공정책에서 당당하게 ‘과정보다 결과’라니. 세상에 ‘과정 없는 결과’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말은 문화예술계에서 빠르게 회자되며 조롱의 대상이 됐다. 그 말이 적절하지 않고 시대착오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말의 숨은 뜻을 사람들이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새로 집권한 제20대 정부의 문화정책에서 ‘문화민주주의’, ‘시민 주도’, ‘ 거버넌스’ 등은 더 이상 강조하지 말라는 노골적인 경고였다. 그렇게 지금, 문화예술계에서는 ‘거버넌스’가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됐다.
제20대 정부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국정과제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제20대 정부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국정과제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제20대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국정과제 목표는 ‘따뜻한 동행, 모두가 행복한 사회’이다. 동행(同行)이 ‘같이 길을 가다’라는 뜻이니, 문화 분야 국정과제의 목표가 거버넌스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정부의 문화예술 분야 국정과제 목표와는 다르게 6개 세부 국정과제에서 거버넌스 차원의 접근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정부의 문화 분야 6개 국정과제는 ‘일상이 풍요로워지는 보편적 문화복지 실현’(국정과제56), ‘공정하고 사각지대 없는 예술인 지원체계 확립’(국정과제57), ‘K-콘텐츠의 매력을 전 세계로 확산’(국정과제58), ‘모두를 위한 스포츠, 촘촘한 스포츠 복지 실현’(국정과제 60), ‘여행으로 행복한 국민, 관광으로 발전하는 대한민국’(국정과제 61), ‘전통문화유산을 미래 문화자산으로 보존·가치 제고’(국정과제 62)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이고 혁신적인 거버넌스 혹은 협력 체계가 필요한 시대인데, 이를 위한 국정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6개의 국정과제 세부 내용조차 최근 정책이나 사업 흐름과는 달리 개별 사업 중심, 성과 중심으로 계획돼 당혹스럽다.
정부의 부재한 거버넌스 정책을 주무 부처 세부 업무를 통해 보완해주길 기대했지만, 상황은 심각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도 업무계획 6대 중점과제는 ‘K-콘텐츠, 수출 지형을 바꾸는 2023년 관광대국 원년’, ‘예술, K-컬처 차세대 주자’, ‘문화로 이끄는 지역균형발전’ , ‘약자 프렌들리로 모두가 누리는 문화’, ‘다시 뛰는 K-스포츠’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핵심 업무계획에 등장하는 용어만 봐도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라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장애인·약자 정책에서조차 ‘최초’와 ‘스타’가 중요하고, 관광은 ‘대국’을 꿈꿔야 하며, 대부분의 사업 앞에는 접두사 ‘K-’가 습관처럼 붙어 있다. 다양한 문화 현장과 국민 참여형 거버넌스는 업무계획 자료 전문을 찾아봐도 발견하기가 힘들다. 오히려 ‘K-거버넌스’, ‘K-협치’ 같은 사업이 없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쉴 뿐이다.
거버넌스의 퇴행은
이미 시작됐다
현 정부의 문화 분야 거버넌스의 궁핍함이 국정과제나 문화체육관광부 업무계획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정부는 ‘정부 위원회 246개를 폐지·통합해 약 3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절감하겠다’라고 밝혔다. 전체 정부 위원회 636개 중 39%에 이르는 위원회를 없애겠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행정 개혁이 중요한 시대에 필요성이 감소하거나 운영 실적이 저조하고, 기능이 중복된 위원회를 조율해 예산을 절감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개혁 방향이다. 문제는 방만한 정부 운영의 핵심적인 원인을 행정 개혁이나 조직 혁신이 아닌 마치 방만한 거버넌스 때문인 것처럼 몰아간다는 점이다.
정부의 위원회 폐지·통합 과정이 거버넌스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오직 예산 절감이라는 성과만을 목표로 추진되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정부의 거버넌스 제도가 과잉되거나 방만하게 운영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거버넌스 정책의 가치와 효과에는 무관심한 채 예산 투입 자체만을 낭비로 몰아가는 태도는 더 큰 문제다. 실제로 <동아일보>에 따르면 허리띠를 졸라매겠다며 각종 정부위원회 축소 방침을 밝힌 정부가 정작 출범 후 신설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 2곳에 약 200억 원의 예산을 새로 편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방만한 정부 운영을 개혁하겠다며 ‘38개 위원회가 폐지되면 약 200억 원의 예산 삭감 효과가 있다’고 발표해 놓고, 정작 정부가 신설한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와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에만 191억 5,900만 원이라는 예산안을 편성해 언론과 여론의 비판을 받은 것이다. 정부의 위원회 폐지·통합과 예산 절감 효과는 애초부터 무관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9월 7일 보도자료를 통해 “위원회 주관 부처별로 거의 모든 부처가 당초 목표로 정한 ‘30% 이상’ 정비를 초과 달성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농림수산식품부(65%), 해양수산부(54%), 환경부(52%), 국토교통부(49%), 교육부(46%), 국방부(46%), 국무조정실(43%), 문화체육관광부(41%) 등의 정비 실적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라고 밝혔다. 정부의 각 부처 위원회들이 정치권력이 교체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적 토론 과정도 없이 불과 2개월 만에 일방적으로 폐지·통합된 것은 결코 성과가 아니다. 이는 정부의 위원회 폐지·통합 정책이 매우 일방적이고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증거에 불과하다. 위원회 정책에서조차 사회적 소통과 거버넌스는 부재한 채 오직 부처별 성과 경쟁만이 과열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는 국가 문화정책의 맥락에서 거버넌스를 더욱 강화해야 할 지역문화협력위원회, 문화예술교육지원위원회 등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기로 해 비판받고 있다. 해당 위원회의 폐지 근거와 대안의 정책적 검토와 토론은 고사하고, 지역문화협력위원회의 경우 새로운 위원들을 위촉 후 불과 1개월여 만에 정부 요구로 폐지를 결정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제20대 정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민관 협력을, 거버넌스 정책을 어떤 태도로 접근하고 있는지 민낯이 드러난 사건이다. 정부의 거버넌스 정책에 대한 전문성 없는, 일방적인 추진 과정이야말로 거버넌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다.
정치권력을 넘어서는
거버넌스를 위해
제20대 정부의 거버넌스 정책에 대한 철학과 정책 전문성이 부재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치권력이 교체될 때마다 거버넌스는 ‘리셋’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또는 거버넌스가 결과적으로 정치권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일까. 제20대 정부는 아마도 거버넌스 정책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거버넌스 정책의 본질이자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 시민사회, 정치‧행정 관련 제도 개혁 등에 있어 철학도, 전문성도 부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거버넌스 정책에 대한 비판에 매달리거나 머물러서는 우리 사회 거버넌스 정책의 다음 단계를 상상하고 축적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는 5년 임기의 개별 정치권력을 넘어 거버넌스 정책의 기본적인 준거점과 전략을 다르게 재설정해야 한다.
첫째, 민주공화국에서 거버넌스는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자 운영 원리다. 거버넌스는 행정의 성과 달성을 위한 방법이 아니고 국가(민주공화국) 운영의 정체성이자 목표이다. 시민을 민원인이자 소비자로 규정해 동원하거나 서비스하는 것은 거버넌스가 아니다. 거버넌스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둘째, 현실에서 거버넌스는 관료화된 정부와 행정을 개혁하는 과정이다. 거버넌스는 시민들이 공무원과 행정 제도에 친절하게 협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료주의를 경계하며 감시·개입하는 민주주의의 실천 과정이다. 현재 한국의 정부 구조와 행정 제도에서 과잉된 것은 민간 참여 거버넌스가 아니라 정치권력과 관료주의다.
셋째, 거버넌스는 정책의 혁신과 대안을 찾아가는 집단 지성과 협력의 방법론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성장주의와 경제 발전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도 아니다. 기후 위기, 고령화, 기술 과잉, 불평등, 지역 분권 등 사회적 위기는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해졌으며, 이는 위대한 개인 지성이나 말 잘 듣는 공무원 조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다양한 상상력과 협력을 위한 인류 생존의 기술이 바로 거버넌스다.
넷째, 거버넌스는 국가와 행정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주도하는 것이다. 거버넌스의 역사는 언제나 시민의 역사, 현장의 결과물이었다. 거버넌스 정책의 새로운 가치와 방향은 앞으로도 정치권력이나 관료 사회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당사자, 전문가, 직업인의 활동 속에서 탄생할 것이다. 다양한 시민의 힘을 기르고 시민의 성찰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정부‧행정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거버넌스의 본질이다.
문화예술 거버넌스를
위한 숙제들
특정한 시기, 특정한 정치권력을 위한 거버넌스가 아닌 문화예술 현장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거버넌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미 문화예술 현장은 블랙리스트 사태, 미투 운동 등을 통해 많은 상처와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 많은 대화와 협력 만이 대안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문화예술 거버넌스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권력이나 행정 제도에 요구하고 기대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문화예술 현장 스스로 다양한 사회적 토론과 논의를 진행하고 협력해 민-민, 민-관 거버넌스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와 행정은 바로 문화예술 현장의 활동에 경청하고 수용할 수 있는 거버넌스 환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에서부터 문화예술 거버넌스 정책을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문화예술 현장과 맞닿아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지역문화진흥원 등 지원 기관부터 문화예술 현장과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거버넌스 장치와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서계동 복합문화공간 건립 계획에 반대하는 연극인들Ⓒ한국연극협회

서계동 복합문화공간 건립 계획에 반대하는 연극인들
Ⓒ한국연극협회

문화예술 거버넌스 정책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다양한 공공기관, 전문기관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행정 조직은 비전문가인 정치인, 공무원이 전문가인 문화예술인에게 충고하고 지시하는 것이 일반화된 괴이한 세계다. 전문성이 필요해 만든 전문기관을 전문성 없는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이 산하기관으로 관리, 통제해 오히려 퇴행시키는 것이 주요 업무로 작동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일의 전문성이나 시민의 권리보다 대통령, 장관, 국‧과장님들의 심기 의전을 위한 사업의 가시적 성과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의 문화예술 거버넌스 정책에 있어 중요한 것은 특별한 위원회나 제도가 아니라 문화예술 전문기관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행정 조직 개혁을 통해 수평적 협력 체계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첫째, 문화체육관광부 부처별로 전문기관과 중복 업무가 발생하거나 불필요한 관리‧감독을 하지 않도록 문화체육관광부 조직을 혁신하고 중복 업무를 전문기관에 이관해야 한다. 둘째, 문화체육관광부와 전문기관 사이의 전문기관 책임 운영제, 수평적 업무 체계를 위한 거버넌스를 제도화해야 한다. 셋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전문기관장들 사이의 실질적인 권한과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의체 상설화 등을 추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 정책 차원에서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연결할 수 있는 거버넌스 정책이 시급하다. 지구적인 차원에서 사회 문제 해결, 경제적 가치,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등을 위해 문화예술 정책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문화예술 분야의 지원 정책 수준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국가, 지구적(행성적) 차원의 정책이다. 우리 사회 역시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응하고 삶의 질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을 국가와 도시 정책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연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➀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국정과제 관리 차원이 아닌 국가 정책의 문화적 연계와 가치 확산을 위한 거버넌스 체계 확립(국가 단위 위원회 설치 등), ➁문화체육관광부 내에 사업별 거버넌스를 넘어서는 문화정책 거버넌스 체계 확립(문화정책비전위원회, 전문기관장 협의체, 지역문화위원회 등), ➂문화예술 거버넌스 관련 형식화된 위원회의 수는 줄이고 실질적인 권한과 역할을 실행할 수 있는 거버넌스 제도화 등이 필요하다.
이원재
이원재(문화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서울 성북과 전북 고창에서 아내 육끼와 함께 서식한다. 문화 연구, 로컬 기획, 사회운동 등을 연결하며 ‘문화연대’, ‘공유성북원탁회의’, ‘제철수박’, ‘경희사이버대학교’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의 차원에서 사회정책, 로컬리티, 기후위기, 커먼즈 등을 연구하고 실천한다.

함께 읽으면 좋을,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