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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의 소용돌이 속
지켜내야만 하는 토대와 뿌리

기술 발전이 거듭되면서 IT부터 스포츠, 관광, 서비스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융복합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문화예술에서도 융복합이 주요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이 현상이 오히려 문화예술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으로
문화예술의 정의 규정이 바뀐 가운데, 시대의 흐름인 융복합을
문화예술계가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고민해본다.
글_고명철(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외연 확장이
문제는 아니다
어느 시기나 사회·문화적 우세종을 점유하면서 파급력을 미치는 언어들이 있다. ‘융복합’이란 단어는 시기적으로 언제부터라고 특정할 수 없으나 한국 사회의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해 사용되면서 그 위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게 됐다. 특히 문화예술의 경우, K‒컬처 붐이 서구 문화의 지배적 영향력에 압도당하는 것을 넘어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문화예술 지평에 새로운 균열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의 범세계적 보편 감각을 구축하면서 K‒컬처가 지닌 융복합 속성이 주목받게 됐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각적이고 집중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가볍게 넘겨볼 수 없는 사안이 있다. 문화예술의 융복합이 우리 시대의 주요 논의로 떠오르면서 흡사 블랙홀인 양 융복합 관련 사안으로 문화예술을 인식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문화예술 정책을 수립 및 집행함으로써 오히려 문화예술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징후가 지난해 9월 국회에서 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이하 문예진흥법) 중 제2조 제1항 제1호 문화예술 정의에서 드러난다.
“문화예술”이란 문학, 미술(응용미술을 포함한다),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 국악, 사진, 건축, 어문, 출판,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및 뮤지컬 등 지적, 정신적, 심미적 감상과 의미의 소통을 목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 또는 타인의 인상(印象), 견문, 경험 등을 바탕으로 수행한 창의적 표현활동과 그 결과물을 말한다.
기존 문예진흥법 속 문화예술 정의와 다른 것은 게임, 애니메이션, 뮤지컬을 추가하고 이 세 분야가 추가된 데 따른 부연 설명이 덧붙여진 점이다. 시대의 사회 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문화예술 정의와 그것의 창조적 실현(창작과 향유)은 얼마든지 수정과 보완이 가능하다. 아무리 오랫동안 문화예술의 장에서 확고부동한 제도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문화예술 본연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레 문화예술사에서 소멸할 수밖에 없다. 대신, 현실에 대한 창조적 상상력의 힘을 북돋우는 문화예술이 출현한다면 그것이 새로운 문화예술의 상징 자본을 획득하는 데 딴지를 걸 필요는 없다. 게다가 이 새로운 문화예술은 기존 문화예술의 외연을 창조적으로 확장할 터이다.
2022 콘텐츠임팩트 쇼케이스 〈벙커 프로젝트〉 ⓒ한국콘텐츠진흥원

2022 콘텐츠임팩트 쇼케이스 〈벙커 프로젝트〉 ⓒ한국콘텐츠진흥원

생태계 파괴의 주범
무지각한 시장 만능주의
그런데, 이와 관련해 엄밀히 검토해야 할 사안이 있다. 지금의 문화예술 지평에서 문화예술 외연이 확장되는 것 자체가 앞서 언급한 융복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적시해둘 필요가 있다. 이 융복합이 문화예술의 층위에서 다양한 내용 형식으로 이뤄지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무엇보다 장르 간 경계를 횡단하면서 각 장르가 지닌 문화예술의 특장(特長)을 섭취함으로써 전위적 예술의 새 지평을 모색하고, 동시대 문화예술의 감각과 교호함과 동시에 대중의 문화의 예술적 향유를 심화하고 확산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사례를 목도하곤 한다.
하지만, 이 융복합의 움직임들을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여기에는 문화예술 생태계에 둔감하든지, 이 자체를 경시하든지, 아니면 생태계를 중시하되 적자생존 정글의 법칙에 충실한, 문화예술 생태계에 대한 편견과 오류를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의 융복합 과정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물이 대중적 향유와 쉽게 연동되는 문화산업 중심으로 치우칠 경우, 시장 만능주의의 유혹은 문화예술의 융복합을 산업예술 일변도에 예속시킬 공산이 크다. 그래서 이러한 시장 만능주의와 산업예술 일변도의 융복합을 경계하기 위해 기초예술에 대한 래디컬(radical)한 인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기실, 문화예술에 대한 기초예술로서의 인식은 새로운 것이 결코 아니다. 매우 안타깝게도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된 지 1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2004년 4월 2일 ‘기초예술살리기범문화예술인연대’(이하 기초예술연대)가 출범하면서 기초예술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됐고, 이 용어가 함의한 문화예술 생태계의 중요성을 통해 당시 신자유주의 시장 질서에 한층 강하게 결속돼 가는 문화예술 현장의 위기를 응시하고, 이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에 문화예술계 안팎의 토론이 집중된 적이 있었다. 잠시 기초예술연대의 출범 선언문의 핵심을 음미해보자.
한국의 기초예술은 현재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중략) 지금은 의미 있는 작품이 출현했을 때 응당 있어야 할 반향과 사회적 공명의 틀마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술에 대한 우리 시대의 감식안 자체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현상이 빚어낼 결과란 비단 문화적 재앙에 그치지 않습니다. 한 사회의 문화 체계 안에서 가장 원초적인 생명 활동인 예술이 위축되면 문화 생태계는 파괴되고 문화적 자원도 고갈됩니다. 예술의 성장 없이는 인문학의 발전도, 문화산업의 성장도, 지식 정보 산업은 물론 일반 제품 업계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략) 사실 외세의 지배 속에서 근대를 맞고 개발 독재와 함께 부강해진 나라가 특별한 계기 없이 기초예술의 부흥을 구가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에 시장이 발달하면 문화적 황폐화는 더욱 가속화됩니다. 뿌리와 줄기가 취약한데 열매는 많이 수확하려 들면 나무가 고사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2004년 발표한 기초예술연대의 출범 선언문 속 문제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기초예술 현장이 겪고 있는 절박한 위기는 진행 중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도 이어지고 있지만, 문화산업의 비약적 성장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각종 정책은 경제 성장주의와 맞물려 기초예술의 환경과 제도적 지원은 제자리걸음을 걷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21세기 들어 제15대 정부부터 지금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문화예술 환경과 이것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인식, 정책적 대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2004년 이후 기초예술연대가 출범해 문화예술 생태계의 측면에서 기초예술을 위한 튼실한 제도적 기반 구축의 중요성과 그것의 사회적 합의를 토론하면서 기초예술의 ‘사회적 공공성’의 가치를 얼마나 강조했던가. 여기서 기초예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덜하고 무심해 기초예술의 대지가 튼실하지 않을 경우, 이것을 융복합한 수준 높은 문화예술의 성취에 이를 수 있을까? 무엇보다 K‒컬처의 붐을 주도하고 있는 문화산업의 결과물을 산출하기 위해 기초예술을 ‘융복합의 대상’으로만 간주할 수 있을까?
기초예술이 숨 쉬고 자라나는
건강한 생태계를 꿈꾸며
따라서 이번 국회에서 개정된 문예진흥법에서 시행하고자 하는 문화예술의 외연 확장은 기초예술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문화산업에 대한 맹목적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스포츠, 관광, 서비스, IT 계열의 융합 콘텐츠, 문화산업 등에 대한 문화예술의 성격과 그 정책적 지원을 무작정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급변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경제 만능 중심주의 논리에 매몰된 채 경제적 부가 가치를 극대화할 수 없는 기초예술에 대한 정책적 고려가 관심 밖인 경우가 허다한데 이것이 바로 문제다. 기초예술이 문화 생태계의 뿌리이듯, 앞서 기초예술연대의 출범 선언문 중 ‘한 사회의 문화체계 안에서 가장 원초적인 생명 활동인 예술이 위축되면 문화 생태계는 파괴되고 문화적 자원도 고갈된다’라는 것을 거듭 상기하고 싶다. ‘문화예술의 시대’라고 너나 할 것 없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나, 우리는 정작 문화예술의 고부가 가치를 끌어내는 데 혈안일 뿐 문화예술의 제반 영역을 기름지게 할 수 있는 기초예술의 토양을 튼실히 다지는 데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기초예술에 대한 지원과 산업예술에 대한 지원은 구별이 모호하며 균등한 정책적 지원을 하면 그만이라는, 대단히 비예술적 정책 지원에 자족할 뿐이다.
그렇다면, 문화예술의 융복합이 더욱 활성화되는 문화예술 환경에 직면해 기초예술의 대지를 어떻게 하면 튼실히 다질 수 있을까? 이것은 기초예술의 존재 가치를 숙고하는 데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모든 문화예술을 융복합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할 수 없듯이, 기초예술을 융복합 함으로써 문화산업의 부가 가치를 배가해야 한다는 천박한 실용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대중적 관심이 높고 그것의 경제적 성취로 환산돼야만 하는 문화예술에 대한 시장 만능주의와도 결별해야 한다. 그러면서 사회적 공공성의 가치로 인식한, 비유컨대 ‘기초예술이 물과 공기의 역할을 수행한다’라는 대사회적 인식이 정책적 노력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입과손스튜디오’ 〈완창판소리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입과손스튜디오’ 〈완창판소리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탐스러운 열매를 수확하는
농부의 노력처럼
그러므로 기초예술에 대한 정책을 수립·집행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은 ‘회수성’ 차원의 정책 지원이 아닌 ‘투자성’ 차원의 정책 지원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당장에 어떤 달콤한 열매를 수확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알맹이가 꽉 여문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실수의 뿌리가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도록 토양을 기름지게 해야 하고, 그러한 토양에 뿌리가 스스로 튼튼하게 뻗어 내려갈 수 있도록 인내를 갖고 보살펴야 한다. 그렇게 뻗은 뿌리에 지탱한 채 과실수가 건강히 자랄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 바칠 때 비로소 과실수는 농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를 수확할 때까지 농부는 땀을 흠뻑 흘리며 아낌없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자신이 지닌 온갖 유무형의 자본을 투자해야 한다.
기초예술의 정책적 지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책 담당자와 예술인, 예술을 향유하는 모든 이들이 인내를 갖고 기초예술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초예술은 사회적 공공성을 지닌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기초예술의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정립될 때, 기초예술을 위한 정책도 이에 종사하는 문화예술인만을 위한 게 아니라 사회의 문화예술적 토양도 기름지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이다. 따라서 문화예술 정책이 융복합의 과정과 그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 문화예술의 성취를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관심과 참여, 사유와 성찰이
바꾸는 문화예술의 미래
기실, 이러한 문화예술 정책은 특정 국가의 문화산업과 같은 산업예술을 활성화함으로써 문화적 재부(財富)를 축적하는 문화 강국을 추구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 문화예술의 외연은 확장하되,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건강한 문화예술 정책은 국민 국가의 정치체를 더욱 굳건히 하는 차원과 전혀 다른, 국가의 개별 구성원들이 자율적 심미적 주체의 하나로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창의적으로 발견하는 과정에서 근대 국민 국가의 정치체 바깥 너머를 과감히 상상해야 한다. 국민으로 하여금 근대 국민 국가적 일상에서 창조적으로 벗어나는 미의 가치와 한데 어우러져 자연스레 탈근대의 세계를 꿈꾸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예의 문화예술 정책이 국가의 다른 정책의 전반에 스며든다면, 우리가 꿈꾸는 탈근대의 세계가 문득 실현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예술인의 적극적 관심을 요구한다. 개정된 문예진흥법에서 첨가된 게임, 애니메이션, 뮤지컬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정책이 이후 어떤 구체성을 갖는지, 때로는 정책 입안자로서 때로는 정책 수행자로서 때로는 정책 수혜자로서 그 몫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예술 현장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진 융복합의 결과물과 경제적 성취에 따른 시장 만능주의가 한국 문화예술 생태계를 파괴하고 문화예술의 대지를 불모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예진흥법 개정 전 문화예술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정책이 과거 정부에서 ‘정책’이란 이름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자행된 사례가 있듯, 그 어느 때보다 기초예술에 대한 래디컬한 사유와 문제의식을 문화예술인 스스로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기초예술의 튼실한 토양 없이 문화예술의 외연 확장에 따른 융복합의 문화예술적 성취의 길은 요원하다.
고명철
고명철(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했다. 웹진 디아스포라 『너머』 편집위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학페스티벌 조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이다.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으며,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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