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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과 배경 사이
문화, 예술, 문화예술의 개념적 고찰

최근 문화예술진흥법 개정과 함께 제20대 정부 문화 및 예술정책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문화’ 및 ‘예술’ 개념의 정의와 범주를 둘러싼
쟁점이 부상하는 계기가 촉발됐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무엇보다
두 개념에 대한 몇몇 학문적, 철학적 이해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각 개념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사유해보고자 한다.
글_심재민(한국연극평론가협회장)
문화: 통일적인 생활 방식과
예술 양식
‘문화’는 라틴어 ‘cultura’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토지 경작 및 농업,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돌봄 및 관리 등을 의미했다. 더 나아가 직업 교육 등을 가리키기도 했다. 여기서 문화가 정신적인 것의 관리와도 직결된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결국 문화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적 실천을 강조하는 문화주의는 중요하게 다가오며,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문화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의한다1. 첫째,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 과정을 말한다. 둘째,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 방식을 가리킨다. 셋째, 문화는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 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 윌리엄스의 정의처럼 문화는 결국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포괄적이고 집단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그런 가운데 예술과의 직접적인 연관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위키백과

프리드리히 니체 ⓒ위키백과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문화를 ‘한 민족의 삶의 표현 전반에 나타나는 예술 양식의 통일’이라고 규정한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실존과 더불어 고통을 겪게 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종의 쾌감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환상이라는 선택된 자극물, 곧 쾌감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문화는 선택된 자극물을 통해 실존의 고통을 극복하게 만든다. 니체가 문화를 ‘예술 양식의 통일’이라고 정의할 때도, 실존의 고통을 극복하는 자극물의 선택 내용과 방식이 특정 시대와 공간의 인간에게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를 니체는 바로 ‘예술 양식’이라고 간주한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그가 인간 실존은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만 정당화 된다’라고 역설하는 것이 이해된다.
이제 우리는 윌리엄스와 니체의 ‘문화’ 정의에 기대어 사유를 좀 더 확장할 수 있다. 무엇보다 문화를 지적이고 정신적인 활동 및 예술적인 활동, 그리고 삶의 표현 방식과 연결해 생각한다는 데서 문화와 예술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인식하게 된다. 더 나아가 문화란 한 시대 혹은 집단의 통일적인 생활 방식 내지는 예술 양식을 드러낸다는 점도 분명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서구의 문화와 구별되는 ‘한국 고유의 문화’ 또는 ‘한국인의 문화 정체성’ 같은 말을 할 때, 바로 여기서 ‘문화’ 개념의 가장 보편적인 사용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한 나라의 고유문화 속에 외부 문화가 유입돼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흡수되고,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로 정착되는 경우를 세계 역사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유문화와 외부 문화란 역사의 긴 시간 안에서 기실 끊임없이 혼합되고 착종되는 것이며, 그 안에서 최종적인 ‘자기 문화’는 결국 삶에 간단없이 다가오는 도전에 응전하는 독특한 방식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언제나 과거와 연관되면서도 동시에 ‘현재적’이어야 한다. 즉, 문화란 언제나 살아 숨쉬고 있으며 계속 변화하는 것이지, 화석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위 ‘전통문화’라고 부르는 것도 단순한 사료적 가치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현재 안에서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문화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문화와 예술 두 개념 사이의 보다 정교한 차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문화가 생활 및 예술 양식, 통일성, 집단성 등의 개념과 연관해 규정된다면, 예술은 이제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과 행동 곧 삶에 영향을 미치며 더 나아가 영감과 도취를 자극하는 정신적 및 지적인 활동에서 비롯된다.
예술: 개별성과 구체성
예술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예술을 통해 인간의 삶은 어떤 변화를 경험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먼저 예술 철학 내지 미학이 아름다움과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런 맥락에서 예술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주요한 흐름을 짚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예술’ 개념이 더욱 구체적으로 단순한 생산 미학의 차원을 넘어 수용 미학, 더 나아가 오늘날 수행성의 미학에까지 확장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오늘날 예술은 언제나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소통을 전제하며, 양자의 상호주체성의 토대 위에 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예술에 대한 몇 가지 대표적인 견해를 알아봄으로써 ‘문화’ 개념과의 차이를 보다 명료하게 알게 될 것이다. 우선 플라톤(Platon)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와 현상 세계에 대해서 가졌던 견해를 생각해 보자. 그는 참된 진리의 세계인 초감성적 이데아 세계와 달리 감성적 현상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는 가상(假象)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하나의 가상이며, 예술은 이러한 가상을 모방, 곧 미메시스(Mimesis)함으로써 결국 ‘가상의 가상’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특히 비극예술과 서사시가 시민을 현혹하고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점을 내세워 이른바 ‘시인추방론’을 주장하고, 같은 맥락에서 ‘연극정치’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다. 플라톤에게 예술은 말하자면 도덕성의 고취에 복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미는 선과 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신의 저서 『시학』을 통해 미메시스의 긍정적 의미와 함께 ‘행동의 모방’에서 출발하는 비극예술의 또 다른 가치를 인정한다. 인간의 ‘모방 본능’이 갖는 인식론적 의미를 통찰한 그는 비극이 철저히 개연성과 필연성의 맥락에서 파악돼야 한다고 내세운다. 또한 포보스(Phobos)와 엘레오스(Eleos)를 통한 카타르시스가 미치는 영향에 힘입어 세계의 신적 질서가 회복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비극예술을 바라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상반된 입장을 통해 ‘예술적 가상’이 주는 의미의 한 단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예술과 아름다움은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미와 관련해서 “무관심한 만족”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제기한다. 여기서 칸트의 미적 대상은 먼저 자연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미를 ‘도덕성의 상징’이라고까지 규정한다. 그가 아름다움을 무관심한 만족으로 정의하는 것은 결국 도덕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즉, 미의 문제에 어떤 감각적 만족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면서 동시에 미와 관련된 ‘취향’ 내지 ‘취미’의 문제를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적이라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미를 궁극적으로 선과 진의 문제로 확장한다. 미에 대한 칸트의 생각은 자연미와 예술미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잘 드러난다. 칸트에게는 자연미가 예술미보다 앞서는 것이다. 칸트의 입장과 관련해서 우리는 철학자 헤겔(Georg W. F. Hegel)의 관점을 도외시할 수 없다. 예술미와 자연미의 관계는 헤겔에서 역전된다. 자연은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이며, 오히려 예술은 진리를 감각적으로 외화(外化)한다. 즉 헤겔에게 아름다움은 오직 정신의 산물이다.
서구 이천 년 전통 형이상학의 역사를 해체하려는 의도 하에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니체는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더 나아가 칸트와 헤겔의 이론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한다. 니체에게 아름다움은 칸트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된다.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칸트가 ‘무관심한 만족’을 내세운다면, 니체는 오히려 관심과 행복을 중시한다. 그러니까 충동의 이상, 곧 ‘행복한 것’에 일치하는 것만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처럼 니체는 아름다움을 도덕적인 것과 연관하려는 시도 자체를 오히려 무화시키며, 나아가 예술을 전통적인 이성을 넘어서 몸과 감각의 차원에서 파악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예술을 도취와 생명력과 힘의 상승을 느끼게 해주는 능력과 연결시킨다. 그가 특히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을 통한 도취의 경험을 중시할 때, 이는 궁극적으로 예술이 인간의 리미널리티(Liminality) 및 변신 경험에 이르는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 예술이 바로 고대 그리스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의 예증을 통해서 명료하게 드러난 니체의 예술 철학이 20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도취 경험과 생명력의 고양이 단순히 예술가의 생산미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이른바 ‘수행성의 미학’을 통한 생산자와 수용자의 상호주체적 교감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에 그려진 도자기에 그려진 사튀르극(Satyr Play)을 준비 모습 ⓒLiterary Ocean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 그려진
사티로스극(Satyr play) 준비 모습 ⓒLiterary Ocean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예술이 가진 새로운 역할과 기능을 생각해 볼 가능성을 얻는다. 플럭서스 운동(Fluxus)과 연관된 요젭 보이스(Joseph Beuys)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말을 통해서 현대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확장된 예술 개념’을 통해서 인간 행위 자체가 예술 행위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제기한다. 그의 이러한 예술관은 ‘우리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설파한 니체의 사상적 영향 하에 있다. 결국 수행성의 미학에서도 확인되듯이 오늘날 예술은 더욱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생산자와 수용자의 상호주체적 교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문화의 퍼포먼스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더 나아가 미디어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본래 ‘기예’의 개념에서 출발한 ‘예술’ 개념이 확장해 간다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예술의 경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에 방점이 찍힌다면, 문화는 집단적이고 통일적인 양식의 차원에서 움직인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구체적인 예술 장르는 이러한 개별적 경험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화는 집단 전체의 어떤 통일적이고 양식적인 지적·정신적 활동 자체를 종합적으로 일컫는 개념인 반면에, 예술은 인간의 삶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변화를 이끌어내는 경우를 말한다.
문화예술: 문제 제기와 성찰,
비판의 힘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문화예술’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화와 예술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때, 그 함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간의 활동과 삶에서 특히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영역과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화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 분야가 자신의 분명한 활동 영역 안에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정당화하고 그와 관련된 일과 사건들에 대해 노골적인 관심을 기울인다면, 문화예술은 오히려 그러한 이기심과 욕망 분출 자체가 인간 집단의 삶에 어떠한 문제를 야기하고 비인간적인 파급 효과를 생산하는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통제하며, 감시하는 쪽에 몰두한다. 곧 인간의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욕망의 충돌 자체를 긍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다른 영역들과는 달리, 문화예술이라는 포괄적이면서도 다소 배타적인 영역은 그러한 욕망의 발생과 관련된 인간 사유와 감정 자체의 문제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천착한다.
여기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 개념에 대한 ‘비유적 이해’를 통해 필자가 규정하려는 ‘문화예술’ 개념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통해서 지배 계급의 이른바 ‘도덕적·지적 리더십’을 설명한다. 위에서 말한 정치, 경제, 사회 분야 등에서 인간의 욕망에 입각한 강압적 리더십을 넘어 지적이고 도덕적인 설득력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는 것이 바로 헤게모니인 것이다. 이 헤게모니의 리더십은 결국 필자가 규정하려는 ‘문화예술의 힘’에 대한 하나의 비유가 된다. 즉 인간의 지적·정신적 활동 능력과 관련해서 문화의 통합적이고 양식적인 측면에 예술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측면이 가세해서 ‘문화예술’로 나타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일방적인 욕망과 이기심의 발현에 대한 경계와 성찰을 통해 보다 높은 수준으로 인간 존재를 고양할 수 있는 능력과 직결돼야 한다. 그러므로 그람시를 다시 인용해보자면 지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리더십을 조명하고 문제 제기하며, 비판하는 힘을 발휘해야 하는 것도 문화예술의 진정한 고유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결국 ‘문화예술’ 개념을 통합적으로 사용할 때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활동 자체가 주는 ‘문화의 양식성’과 함께 ‘구체적인 개별성을 드러내는 예술’까지도 포괄하는 사안을 대상으로 하며, 더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영역과 구별 및 비교하는 가운데 비판적인 성찰의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정책 현장에서 구별해야 할
‘문화’, ‘예술’, ‘문화예술’
이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홈페이지에 나온 ‘설립 목적’을 간단히 살펴보고 앞에서 정립한 개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점검하고자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훌륭한 예술이 우리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이가 창조의 기쁨을 공유하고 가치 있는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현장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위원들이 중심이 되는 합의제 의사결정기구로서, 민간이 공공영역의 의사결정에 참여한 결과가 정책으로 환류되는 동시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일방적인 수혜자였던 문화예술인들이 정책의 입안자이자 수행자로 진입하는 것으로, 관행적인 문화행정 체계를 혁신하고 급속히 변화하는 문화예술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문화예술이 처한 각종 환경에 대해 실효성 있고, 구체적인 대안 생산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문학, 시각예술, 공연예술, 전통예술, 다원예술 등 문화예술계 안팎에서 합의하고 있는 기초예술 분야와 문화산업의 비영리적 실험영역을 대상으로 창조와 매개, 향유의 선순환 구조 확립과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역점을 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술 생태계의 자생력을 신장시키고, 창조를 견인하며, 예술시장의 생산력을 확보하여 궁극적으로 국민 모두가 창조의 기쁨을 공유하고, 가치 있는 삶을 누리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설립 목적을 살펴보면 실제로 ‘문화’, ‘예술’, ‘문화예술’ 세 개념이 때때로 두루뭉술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장에서 사용된 ‘문화예술진흥’ 은 모호하다. 오히려 ‘문화 및 예술의 진흥’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다 분명한 의미 맥락을 드러낼 수 있다. 문화를 통일성과 양식성의 의미에서, 예술을 구체성과 개별성의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문장에서 두 번이나 사용된 ‘문화예술’ 역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문화 및 예술’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문화행정’도 구체적인 맥락에서의 ‘예술행정’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 문장에서도 ‘문화예술계’를 ‘예술계’로 바꾸어야 한다. 여기서 열거한 각 영역은 구체적인 예술 장르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매우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이 용어는 원래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대중문화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을 위해 처음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예술활동’이라는 용어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설립 목적만 간략히 살펴봤지만, 실제로 우리는 ‘문화’, ‘예술’, ‘문화예술’이란 용어를 혼용해서 모호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필자의 짧은 글이 이런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글은 존 스토리(John Storey),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박모 역, 현실문화연구, 1999, 13p에서 재인용
심재민
심재민(한국연극평론가협회장)

연세대학교 독문과 졸업.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독문학 철학 독어학을 수학하고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천대 일반대학원에 재직하며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한국연극예술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Werden und Freiheit. Carl Sternheims Distanzerfahrung in der Moderne und sein Bezug zu Nietzsche』, 『연극적 사유, 예술적 인식』, 『니체, 철학 예술 연극』, 『배우와 연기를 보는 여섯 개의 시선』(공저·신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공저) 등이 있으며 2009년 여석기연극평론가상, 2018년 한국연극예술학회 KOTASA학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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