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QUARE

지난호 보기

  • ∙VOL.10 [2024.05]
  • ∙VOL.09 [2024.03]
  • ∙VOL.08 [2024.01]
  • ∙VOL.07 [2023.11]
  • ∙VOL.06 [2023.09]
  • ∙VOL.05 [2023.07]
  • ∙VOL.04 [2023.05]
  • ∙VOL.03 [2023.03]
  • ∙VOL.02 [2023.01]
  • ∙VOL.01 [2022.11]

SQUARE

부활한 ‘책임심의관제’,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예술 지원 공모사업
심의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경력 10년 이상의 내부 직원이 참여하는 ‘책임심의관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지난 2010~2014년에
운영했던 ‘전문심의관제’의 부활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책임심의관제에 관해 2024년 4월 초까지 발표된 내용을 바탕으로,
예상되는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해 짚어 본다.
글_최해리(무용역사기록학회 명예 회장)
‘책임심의관제’ 재도입에 대한
현장의 기대와 우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는 4월 8일 자 공지사항을 통해 ‘2024년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 추가공모-전담심의제 시범운영 안내 및 전담심의원 명단 사전 공개’를 게시했다. ‘전담심의제’1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2023년 12월 말에 공식 발표한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의 시행을 예비한 것이다. 이 ‘10대 핵심과제’ 중 하나가 ‘책임심의관제’의 도입이며, 예술위, 예술경영지원센터 등 주요 기관의 공모 사업 심의에 경력 10년 이상의 내부 직원이 참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여러 차례의 인터뷰에서 ‘책임심의관제’는 예술지원사업에서 심의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일 수 있으며, 예술지원사업을 혁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전담심의제 시범운영 안내 및 전담심의위원 명단 사전공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담심의제 시범운영 안내 및 전담심의위원 명단 사전공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인촌 장관은 제17대 이명박 정부 시절에 예술위를 중심으로 ‘전문심의관제’를 도입한 이력이 있다. 따라서 ‘책임심의관제’는 예술위가 2010~2014년에 운영했던 ‘전문심의관제’의 부활이라고 여겨진다. ‘책임심의관제’는 내부 직원 1명과 외부 전문가 4명의 체제로 이루어져있으며, 외부 심의위원을 통해 전문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내부 직원이 책임심의관으로 참여함으로써 기관의 책임성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2
그런데 책임심의제의 재시행에 대한 예술계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예술지원정책이 시행된 이래 계속 논란이 된 ‘불공정성 시비’를 비켜나갈 방안이 ‘책임심의제’에서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2014~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에 예술인은 공공기관의 예술지원 심의제도를 크게 신뢰하지 않으며, 특히 ‘공정성’ 문제에 대해 예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체부의 책임심의제 부활은 공정성 회복을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그러나 심의제도라는 틀을 개선해도 심의를 위한 명확한 원칙과 구체적인 내용이 여전히 부재하다면, 심의하는 주체에 따라 심의 결과는 천차만별로 나뉘며 예술인의 불신만 커질 뿐이다.
2014년에 예술위의 책임심의위원으로 참여할 당시에도 심의 원칙과 판단 기준의 부재로 최종심의 단계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책임심의제는 합의제가 강점인데, 합의해 나갈 원칙과 기준이 없으니 관점이 다른 위원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많았다. 지원서를 건성으로 읽고 오는 불성실한 위원, 그리고 본인이 밀던 지원자가 탈락하면 지원 당사자에게 연락해 동료 심의위원의 탓을 하는 비윤리적인 위원을 제재할 어떠한 규율도 부재했다.
또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예술인들은 좁아진 취업문과 줄어든 공연 기회로 과거보다 더 공공예술기금에 의존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예술기금 지원서 1장을 쓰기 위해 수없이 고민하고, 1개월 내지 수개월에 걸쳐 지원서를 작성한다. 그런데 우리 예술생태계에는 여전히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 보니, 어떤 장르에서는 심사자들이 같은 부류에 속한 지원자들의 지원서는 밀어주고 적대 관계의 지원자가 낸 지원서는 외면하는 일들이 일부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예술계의 변화나 흐름에 익숙하지 않은 전문가나 지원서를 읽을 틈도 없는 예술인이 심사위원 후보군(Pool)을 통해 심사자로 참여하여 지원자를 부당하게 탈락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장르의 전문성을 이유로 심사 판정 기준을 심의위원의 가치관과 양심에 맡기고, 기관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인이 제도와 기관을 불신하며 좌절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는 2014년 전후로도 여러 지원기관의 심의에 참여했던 심사자로서, 또 최근까지 지원심의에서 무수히 탈락했던 지원자로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인들이 바라는 예술지원제도의 혁신, 예술생태계를 안정화하기 위한 변화는 예술 지원 체계의 공정성을 구축하고 심사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심의위원의 선발과 관리 방법부터 심의 과정에 적용될 규정과 판정 기준, 평가의 원칙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세세한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해외 사례를 통해 살펴본
책임심의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
예술지원심의제도와 관련한 불공정 문제가 사회적으로 쟁점화될 때마다 정부와 지원기관에서는 제도적 보완 및 개선을 위해 정책연구를 하는 등 다각적으로 노력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문화예술 진흥기금사업 지원심의제도 개선방안 연구」(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체계 개선 연구」(서울문화재단, 2019년), 「공연예술분야 공모・지원사업 공정성 제고 방안」(국민권익위원회, 2021년), 그리고 작년에 시행한 예술위의 문화예술기금 공모사업 전면 개편과 올해 시범적으로 시행되는 ‘전담심의제도’이다.
예술위는 ‘전담심의제’가 “지원심의의 전문성 및 심의기준의 일관성 확보를 위하여 심의위원이 보조사업 선정부터 평가, 모니터링까지 연속 수행하는 제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입 배경은 “지원체계 개편에 따른 다년 지원 확대, 단계별 지원구조에 따른 지원단체, 프로젝트에 대한 연중 지속 관리 필요성 확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전담 심의위원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위원 후보단(2023. 10. 발표)’에서 7개 분야별 4인을 위촉하고, 사무처 직원 공모를 통해 분야별 전담 심의관 1인을 선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담 심의위원 선발에 적용한 특별한 규준이나, ‘전담심의제’를 통해 심의의 전문성과 책임성이 어떻게 확보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예술위 홈페이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심의를 위한 원칙이나 기준 등을 담은 매뉴얼이 공시되지 않았으므로 심사자의 선의와 양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체제다.
그렇다면 ‘전담심의제’가 기존의 심의제도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올해 선발된 심의위원이 공모사업의 심의를 한시적으로 전담한다는 것 외에 종전의 심의 방식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심사의 공정성을 파악하려면 심사자의 객관성과 중립성, 심의 과정의 투명성과 평등성, 심의 결과의 정보 제공, 심의에 적용되는 법(또는 규정)과 원칙 등이 필요하다. 이런 원칙과 매뉴얼이 부재한데 어떻게 책임심의제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사실 심사는 선택받은 소수자가 행하며 그들의 지식, 배경, 경륜 그리고 심사 환경이 판정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사회일수록 심사자의 편견으로 인해 심사받는 대상자가 차별과 불이익을 받지 않게끔 보호하는 엄격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캐나다예술위원회와 호주예술위원회의 사례를 살펴보자.
캐나다예술위원회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심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원칙과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단계마다 세부 절차와 심사자의 역할과 범위를 명시해 두었으며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면 마우스 커서로 이동해서 더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관련 정책은 PDF를 내려받을 수 있도록 첨부했고 연관 정보는 커서를 통해 별도의 홈페이지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특히 지원 정책과 심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명시해 둔 것이 인상적이다.

“캐나다예술위원회의 심의 결정은 동료평가를 핵심으로 하며 지원금 결정의 투명성, 무결성 및 완전한 책임을 중시하고, (중략) 의사결정과정, 우선순위, 지원금 분배 원칙을 우리의 운영 초석으로 삼는다.”

캐나다예술위원회는 심의 과정마다 적용되는 원칙과 전략도 뚜렷하게 공시해 두었다. 예를 들어, 지원금 결정과 배분에 있어서는 ①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 ②공적자금 관리(Stewardship of public funds), ③동료평가(Peer assessment), ④서로 존중하는 작업환경(Respectful Workplaces), ⑤토착민의 문화적 자기결정(Cultural self-determination of Indigenous peoples), ⑥공정성 및 다양성(Equity and diversity), ⑦공용어(Official languages), ⑧비교평가(Comparative assessment, ⑨결과 기반 접근법(Outcome-based approach) 등 9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캐나다예술위원회의 예술지원제도가 철저하게 예술인을 중심으로 고안되고, 심의제도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다양한 보고서와 매뉴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토착민 예술인을 위한 지원서 작성법이 매뉴얼로 제작되어 있으며 2021~2026년의 지원정책을 미리 공개해서 예술인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계획을 세우고 안정적으로 지원하도록 배려해 두었다.
심의 원칙과 심의 과정 소개 Ⓒ캐나다예술위원회

심의 원칙과 심의 과정 소개 Ⓒ캐나다예술위원회

심의 절차와 규정에 대한 상세 설명 Ⓒ캐나다예술위원회

심의 절차와 규정에 대한 상세 설명 Ⓒ캐나다예술위원회

토착민 예술인을 위한 지원서 매뉴얼 Ⓒ캐나다예술위원회

토착민 예술인을 위한 지원서 매뉴얼 Ⓒ캐나다예술위원회

2021~2026년 예술지원정책 보고서 Ⓒ캐나다예술위원회

2021~2026년 예술지원정책 보고서 Ⓒ캐나다예술위원회

호주예술위원회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심의제도에 관한 갖가지 설명은 탄복을 자아낼 만큼 섬세하며 창의적이다. 심사자가 되는 방법, 심의를 위한 매뉴얼, 현재 심사자의 활동, 과거 심사자의 인터뷰 등 심사자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볼 수 있다. 심사자, 지원자, 지원제도 담당자 등 심사제도에 참여하는 다양한 사람과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서는 호주예술위원회 심의제도의 전문성과 책임성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해충돌(Conflicts of interest)’처럼 심사자가 심의 현장에서 부딪히게 될 문제를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제시해서 심사자의 윤리성을 강화해 주는 것도 흥미롭다. 지원제도 담당자를 위한 피드백 정책도 마련되어 있는데, 지원제도와 서비스 개선을 위한 호주예술위원회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동료평가를 위한 심사자 매뉴얼 Ⓒ호주예술위원회

동료평가를 위한 심사자 매뉴얼 Ⓒ호주예술위원회

각 부문 참여자가 설명하는 심의제도 Ⓒ호주예술위원회

각 부문 참여자가 설명하는 심의제도 Ⓒ호주예술위원회

이해충돌의 사례를 설명하는 애니메이션 캡쳐 Ⓒ호주예술위원회

이해충돌의 사례를 설명하는 애니메이션 캡쳐 Ⓒ호주예술위원회

국내에서는 2021년 예술위의 ‘다원예술 지원사업’에서 ‘블라인드 방식 동료집단 심의’가 다소 논란이 있었고3 이로 인해 동료평가에 대한 예술인의 오해가 크지만, 캐나다예술위원회와 호주예술위원회 등 서구권 예술지원제도는 동료평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캐나다예술위원회는 동료평가제도를 운용하는 이유를 첫째로 뛰어난 능력과 예술적 가치를 식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고, 둘째로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 그리고 다양한 전문 지식을 수용하는 의사결정과정에서 이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셋째로 높은 책임감과 공정성 및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동료평가 심의위원회 구성의 원칙은 ①다양한 직업적 전문성, ②예술 활동의 다양성, ③인구통계학적, 원주민 및 문화적, 공식 언어 및 지역적 다양성 등 여러 동료 예술가를 대표할 수 있는 평가자를 선발하는 데 있다고 공시해 두었다. 또한 특정 연도의 동료평가 심의위원회가 특정 시기 캐나다의 모든 측면을 대표할 수 없지만 캐나다예술위원회는 심의위원회가 동료평가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전문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있다.
캐나다예술위원회는 예술지원금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포괄적이며 건강한 예술생태계를 형성하기 위한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기금 운용에 있어서 공공의 가치와 최고 수준의 윤리 기준을 적용해야 하며 누구나 윤리강령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장르의 전문 예술인들이 심사자로 선발되어 동료의 지원서를 평가하므로 우리나라 예술심의제도도 동료평가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외의 동료평가제도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심사자에게 동료평가를 위한 어떠한 매뉴얼도 제공하지 않은 채 심의를 위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만 실시하고 바로 심사에 투입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예술지원제도가 공정성 시비의 쳇바퀴를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윤리강령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동료평가를 가장 윤리적으로 활용하는 분야는 학술 영역이 아닐까? 학술지가 한국연구재단의 등재지로 인정받기 위해 중요한 평가 항목 중 하나가 동료평가다. 그래서 학술지를 발행하는 학회에서는 연구윤리와 심사제도에 관한 엄격한 규정을 명문화해서 홈페이지에 게재하고, 회원을 대상으로 동료평가와 연구윤리에 관한 특강을 정례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특히 학술지의 편집위원장은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연구윤리 온라인 강좌를 이수하고 수료증을 발급받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현재 모든 공연장이 안전교육 수료증을 발급받는 사람만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예술 영역에서도 앞으로 예술 기금 심사에 참여하는 모든 참여자가 윤리강좌를 이수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보면 어떨까 싶다.
앞서 2021년에 ‘블라인드 방식 동료집단 심의’로 한 차례 논란이 있었던 만큼 이 용어를 재도입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책임심의제를 동료평가의 대안 제도처럼 혁신적으로 운용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우선 심의위원에게 ‘책임심의’라는 개념이 예술 기금의 공공 가치 실현을 위한 봉사 정신과 자신이 속한 장르와 동료의 발전을 위한 헌신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원자의 창조력과 현재의 예술 환경을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를 책임심의위원으로 선발해야 한다. 심의위원이 지원서를 한 번 검토한 것만으로 지원자가 구현할 미래를 똑같이 상상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글쓰기에 취약한 예술인의 경우 그들의 잠재력이 딱딱한 문서에 갇혀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책임심의위원이 지원서를 평가하고 대상을 선정하여 모니터링하는 역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속 장르와 동료 예술인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그들의 지식, 경력, 지혜를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이 심의위원 명단은 공개하지만, 심사의 공정성을 이유로 예술인에게 접촉 금지를 요구하는 것은 심의위원을 고립시키는 등 부정적 측면이 더 커 보인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전담 심의위원제도가 좋은 예시를 제공해 줄 것 같다. 프랑스 문화부는 장르마다 경륜과 안목이 높은 전문가를 전담 심의위원으로 선발해서, 기금 신청을 고려하는 예술인이 신청서 내용을 심의위원에게 사전에 검토받도록 권유하고 있다. 신청서 제출 여부에 대해 판정을 받거나, 컨설팅을 통해 수정을 제안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국내 책임심의제도 심의위원이 모든 지원서에 대해 짧게라도 피드백을 제공하게 하면 어떨까? 또한 심의가 종료되면 지원기관의 사후 공청회에 참여해서 해당 심사에 적용한 기준을 설명하며 피드백을 종합적으로 제시해 줄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탈락자의 구제 방안에 대해서도 별도의 컨설팅 시간을 갖는다면 책임심의제를 혁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외에도 책임심의제 시행을 위해 미국의 국립예술기금, 영국예술위원회를 참조할 만하다. 영국예술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예술지원제도의 표준으로 삼고 있으며, 책임심의제도의 모델 또한 영국예술위원회에서 도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해외에서 도입한 예술지원제도가 번번이 실패하거나 시행착오를 겪는 이유는 제도가 배태된 환경과 역사를 무시하고, 제도에 내포된 철학과 미학도 외면한 채 제도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특히 시행 방법의 디테일을 놓치고 있으니 제도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정성 시비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예술위, 예술경영지원센터 등 책임심의제를 시행하는 기관들은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기에 앞서 해외의 예술지원심의제도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한국연구재단, 한국과학재단 등 국내 공공기관의 엄정한 심의 체계를 벤치마킹하여 상세한 규정과 매뉴얼부터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지원기관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시하는 예술지원사업 정보, 공모사업 신청만 받는 국가문화예술지원시스템, 예술지원사업 정보통합 안내 플랫폼 ‘아트누리’ 등 예술인 지원제도 정보 사이트들을 통합하거나 관련 사이트들이 연동되도록 플랫폼을 재구축해야 한다. 이에 더해 지원제도와 심의과정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각종 규정과 매뉴얼을 미리 공시하는 등 공정성 구축과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의로운 책임심의제 도입을 위해
공정성과 자긍심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예술심의제도에서 요원했던 ‘공정성’을 다시 한번 짚어 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도대체 ‘공정성’이 무엇이기에 실현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공공정책에서 공정성은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①특정인에게 유리한 규칙 없이 투명하게 경쟁이 이루어지는 ‘절차적 또는 과정적 공정성’, ②성과를 타인과 비교했을 때 적절하다고 느끼는 ‘결과의 공정성 또는 분배의 정의’, ③초기 조건과 배경을 고려한 ‘기회의 공정성’이다(서울연구원, 2021:13).
예술 심의에서 공정성 시비는 주로 절차의 공정성 영역에서 불거진다.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인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특정인에게 유리한 규칙이 적용되지는 않았는지 또는 심의가 투명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따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 정의론의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한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의 사회정의론에 따르면, 롤스는 “초기의 조건의 영향을 배제하고 분배 규칙 결정에 대해 자유롭고 공정한 참여가 이루어지면 분배의 결과가 불평등하더라도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서울연구원, 2021:13 재인용).
존 롤스 ⒸHarvard file photo

존 롤스 ⒸHarvard file photo

위의 공공정책에서의 삼차원적 공정성에 대한 논의와 롤스의 정의론에서 두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예술심의제도에서의 절차적 공정성은 심의 주체 또는 이해당사자인 예술인이 참여해서 만드는 (심의 규정과 매뉴얼 등이 포함된) ‘공동 규약집’으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원자의 배경과 조건을 고려해 다각도에서 기회의 공정성을 제공해야 한다. 앞으로 시행될 책임심의제가 두 가지 측면을 정비해서 정의롭게 시행된다면 예술 지원 체계의 혁신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부와 지원기관은 책임심의제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실천 전략을 세우고, 심의위원의 선정에서부터 심사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예술인이 책임심의제의 가치와 지원 맥락을 수긍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주길 바란다. 나아가 다양한 피드백을 통해 책임심의제가 더 나은 제도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것을 기대한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예술지원체계의 혁신을 바란다면 지원정책의 비전을 좀 더 세련되고 명료하게 다듬어야 할 것 같다. 2023년 당시 프랑스의 문화부장관 리마 압둘 말락(Rima Abdul Malak, 2022. 5. ~ 2024. 2.)은 예술과 공예에 대한 새로운 지원정책을 발표하며 “프랑스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예술과 공예는 세심한 주의력과 인고로 창조되며, 작품에는 그 지역의 역사성이 스며 있다. 대량 생산과 일회용품이 범람하는 시대에 예술 장인들은 미래에 대한 믿음과 가치를 전달하고 있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제20대 정부의 문화정책 비전인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에는 예술인에 대한 존중과 자국 예술에 대한 자긍심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참고자료
· 김소연(2024.03.05.), ‘왜 책임심의관제는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책으로 둔갑했나’, “웹진 문화정책리뷰”.
· 문화체육관광부 보도자료(2023.12.28.),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
· 신재우(2024.01.24.), ‘유인촌, 책임심의제 무조건 시행…올해 기관 간 칸막 없애겠다’, “NEWSIS”.
· 이은정(2023.12.20.), ‘유인촌 장관, 상생하지 않으면 새로운 변화 올 때 망한다’, “연합뉴스”.
· 정광렬(2021.11.25.), 문화예술 지원사업 심사의 구조와 방향, “예술경영”, 476호.
· 정석류(2021.12.17.), 예술지원 심사의 신뢰성: 흔들리는 저울, ”공진단 블랙“, 9호.
· 조권중, 최지원(2021.02.28.), 공정성 담론과 서울 공정도시지표, “서울연구원 연구보고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2018.10.), 문화예술 진흥기금사업 지원심의제도 개선방안 연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정책연구”.
· 한국문화예술위원회(2024.04.08.), ‘2024년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 추가 공모-전담심의제 시범운영 안내 및 전담심의윈원 명단 사전 공개’.
· 홍태림(2024.04.14.), ‘블랙리스트 망령 떠올려지는 유인촌표 ‘책임심의제’, “민들레”.
· KTV국민방송(2023.10.30.), ‘유인촌 장관 “‘책임심의제’ 도입···콘텐츠 환경 반영”’
· 미국 국립예술기금 홈페이지(2024.04.10.접속), https://www.arts.gov/
· 영국 예술위원회 홈페이지(2024.04.10.접속), https://www.artscouncil.org.uk/
· 호주 예술위원회 홈페이지(2024.04.09.접속), https://creative.gov.au/
· 캐나다 예술위원회 홈페이지(2024.04.09.접속), https://canadacouncil.ca/
  1.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책임심의관제’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전담심의제’로 표기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각 기관의 공식 발표를 인용하는 경우에는 해당 기관의 표기를 따르되, 두 심의제를 통틀어 지칭할 때는 ‘책임심의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려고 한다.
  2. 한국문화예술위원회(2010.03.25), ‘ARKO, 2010년도부터 책임심의위원 제도 시행!’
  3. 김지연(2022.01.27.), ‘나의 동료는 누구인가’, “연극in”
최해리
최해리(무용역사기록학회 명예 회장)

1995년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민족무용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공연 현장에 뿌리내리며 예술 행정, 공연 기획, 국제 교류, 학술 연구, 정책 개발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다. 2010년부터 현장 경험을 용해하여 ‘공연 기획과 제작’, ‘공연 콘텐츠 리서치’, ‘논문 작성법’ 등을 강의해 왔다. 현재 ㈔한국춤문화자료원 이사장과 무용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의 발행인으로 일하며 이론과 현장을 매개하는 실천적 연구에 관심을 쏟고 있다. 2014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책임심의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