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방의 도시’ 속에서 건축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지극히 진부한 상태를 면하지 못해온 한국의 일상건축을 조명한다. ‘방의 도시’는 이성과 감성의 합일을 지향하는 건축가들의 독자적 세계와, 산만하고 혼돈스럽지만 공간실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일상적 공간구축과 행위’ 사이의 괴리와 긴장을 과감히 인정하고 이런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또한 전세계 도시건축이 안고 있는 보편적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과 모색의 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도시의 건축적 일상경관은 거주지로서의 집과 각종 근린생활 영역으로서의 방들, 그리고 도시 전체의 공간적 조직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내지 못한 채 각종 변종들의 탄생과 이행들로 얽혀져 있다. 그중 특히 눈에 뜨이는 비디오방, 피씨방, 노래방, 놀이방, 전화방, 찜질방, 소주방들은 주거문화의 일부 요소들을 새로운 형태로 분화, 탈바꿈시켜 한국도시 공간의 일상성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것은 한편 전통사회와 후기 근대성 사이의 단절성을 메꾸는 모호한 모색공간들이기도 하다. 예컨대 노래방은 도시문화의 한복판에서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의 모든 감각기를 열고 분출하는 원시동굴의 축제다.

 

찜질방은 집단과 개인, 일상과 일탈, 프라이버시와 관음의 경계를, 신체를 반쯤 드러내고 만나는 도시의 휴게실이자 조용한 축제의 대합실이다. 이렇게 태어나는 방들은 집과 도시의 신체화이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주거영역과 제도화된 공간 사이를 곡예한다. 혈통과 언어의 동질성, 초고밀 도시공간, 폭발적 인터넷 사용의 조합은 방의 도시화를 가속시킨다. 일견 열린 것처럼 보이는 온라인방의 네티즌들은 오프라인 방에서 에밀 뒤르카임의 닫힌 기계적 연대를 재생산해낸다. 소외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동질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방과 성스러운 방이 압축되면 한국도시만의 풍경이 만들어진다. 지하 노래방, 1층 패스트푸드점, 2층 피씨방, 3층 성형외과, 4층 학원, 5층 교회... 도시의 뒷면을 병풍처럼 두른 방들은 간판으로 다시 스스로를 뒤덮는다. 방은 새로운 타이폴로지를 생성하지도 않고, 불확정적 공간과 타협하지도 않는다. 진부한 타이폴로지 속에서 끊임없이 변신한다.

 

삶의 방식과 건축형식 괴리는 건축가와 도시계획가의 통제를 벗어난다. 방의 도시는 농경사회의 마을에서 근대와 탈근대도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보시대의 도시로 도약한다. 유기적이고 연속적 도시공간은 불연속적 방들의 네트워크로 대체된다. 건축가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단순히 무시하거나 거부해야 하는가? 건축가들의 작업은 여기서 어떤 의미의 지점을 확보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도시”를 지나온 마르코폴로는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지옥은 우리 일상과 같이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에게 쉬운 길입니다. 지옥을 더 이상 보지 못하도록 우리가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길은 위험이 따르고 끊임없는 각성과 긴장을 요구합니다. 지옥 한가운데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고 그들이 지옥을 견뎌내게 하고, 그들에게 공간을 주는 것입니다.”

 

한국관을 꾸미는 세 건축가는 ‘방의 도시’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새삼스럽게 확인시키기보다는 방의 도시에서 배제된 것, ‘보이지 않는 것’ 을 찾아내는 공동작업방식을 택한다. 방의 변이와 변종을 추적하고 분류하고 계보를 만든다. 계보는 건축가의 상상력을 매개로 하나의 신화로 태어난다. ‘방의 도시’는 결국 거대도시에서 정주와 일상의 의미, 그리고 그것을 담는 건축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실험이다. 이런 의미에서 ‘방의 도시’는 현재화된 미래이자 건축의 새로운 텍스트 쓰기다. 세 건축가의 공동작업은 개성적인 표현과 공동체적인 어울림, 그리고 부조화 속의 조화로 현대도시의 현실을 대립시키고 혹은 화해시키는 즐거운 몸부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