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⑤ 미술 |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나 세계의 주목이 되어 만난사람 : 김혜경(미술회관 큐레이터) 김혜경 : 편찮으신 가운데 이렇게 문화예술지를 위해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지난 시대에 대한 회고의 말씀을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선생님께서 그림을 시작하시게 된 배경부터 시작하여 우리 나라 현대미술의 역사에 대한 견해를 부탁드립니다. 또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워낙 유명하여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하모니즘을 창안해내시게 된 동기와 그에 따른 에피소드들을 함께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흥수 :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은 마치 사막 속을 횡단한 것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방의 어린이들에게는 보거나 듣는 일을 통해 자극을 받을 일이 거의 없었지요. 그래서 내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림 그린다고 하면 환쟁이라 하여 천대하고, 환쟁이가 되겠다고 하면 말리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 분위기였으니까요. 정말이지 그림 그리는 사람들로서는 기가 막힌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화가들은 기생처럼 술자리에서 그림 그려주고 돈 몇 푼 얻거나 술 한잔 얻어먹으면 그만이었던 시대였지요. 그래서 환쟁이라 하면 거지처럼 빌어먹는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그런데도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림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면 시간가는 줄 몰랐지요. 소학교 때 일이에요. 미술을 전공한 일본 선생이 있었는데 내가 그린 그림을 뽑아서 형태가 잘되었다고 아이들 앞에서 칭찬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크레용으로 그린 것이었어요. 사실 수채화는 잘 못했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자 적성에 맞았는지 1년도 안되어 선전에 입선했습니다. 중3때 그린 그림이 입선되자 사방에서는 천재가 났다고들 떠들썩했지만 나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집안에서는 내가 미술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아버지께서는 재능이란 혈통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 집안에는 그런 혈통이 없다고 하시면서 법대로 가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나는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꼭 미대를 가야겠다고 했지요. 결국 아버지께서는 만일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간다면 나의 재능을 인정해주겠다고 한 발 물러서셨지요. 그래서 나는 무조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연구소에 다니면서 석고데생을 열심히 공부했지요. 1년 동안 공부하고 시험을 쳤는데 지나치게 긴장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어요.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가야만 내가 하고싶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데, 주변을 보니 5수, 6수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거예요. 생각 끝에 아예 1등을 해보자고 결심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밥을 한 후 도시락 2개를 싸 가지고 연구실로 가 밤 10시까지 그리다 돌아오는 날들의 연속이었지요. 집에 돌아와서도 공부에 매달렸어요. 그러니 잠을 3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습관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나는 그 때 이후로 3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이듬해 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지요. 그러자 이젠 세계에서 제일 가는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서더군요. 그런데 일본이 내가 미술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자유주의 정책을 썼는데, 내가 들어간 이후로는 강압적인 정책, 교육을 했어요.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예술이란 아카데미즘이 아니며, 석고데생이 아닌 인간의 정신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학교에서 석고데생을 제일 잘했지만 석고데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지요. 해방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는데 6·25전쟁이 나를 바꿔놓게 됩니다.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절박한 상황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리얼리즘으로는 이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주위에서는 평화적인 시대에나 맞을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많았어요. 마침 미국의 라이프지에서 한국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싶다고 미국문화원에 의뢰해왔는데, 작가들을 추천할 권한을 가지고 있던 한 선배 화가는 달밤에 퉁소 불고있는 그림, 장미꽃 그림 등만 뽑고 현재 전쟁하는 나라에서 전쟁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고있는 나는 부르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그 선배화가에게 대들었고, 그 후 요즘 말로 왕따를 당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절대 빌어먹지 말라고 한 말을 기억하여 누구에게도 아첨이나 청탁을 안했던 것도 내가 왕따를 당했던 한 이유였지요. 김혜경 : 그래도 제1, 2회 국전에서 특선 이상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김흥수 : 제2회 국전에 「군동」이라는 사실화와 「침략자」라는 추상화를 함께 출품했지요. 1회 국전에 특선한 자에게 주는 ‘무감사’ 특전을 이용하여, 추상화인 「침략자」에 ‘무감사’ 딱지를 붙여 출품했습니다. 심사위원 중 한사람이 이를 낙선시키려했으나 불가능하자 대신 「군동」을 낙선시키려 했답니다. 「침략자」를 철회하면 대통령상을 주겠다는 제의까지 뒤로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지요. 결국 대통령상은 못 받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출세하기보다 세계에서 인정받자고 결심했지요. 어느날 미술가들이 많이 모이는 다방에 갔는데 타임지 마지막 페이지 문화난에 파리에서 추상회화가 유행되고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러자 이를 접한 작가들이 “우리도 이젠 추상을 해야겠구먼”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을 하던 사람들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그 자리에서 내가 일어나 “우리가 이제껏 일본 것을 모방해왔는데 이제는 서양 것을 모방하려 하느냐. 우리는 우리 것을 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했지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우리 것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마침내 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쿠르베는 객관을 객관으로, 고갱이나 고호는 객관을 주관으로, 달리는 주관을 객관으로, 칸딘스키는 주관을 주관으로 표현했음을 깨닫고 나는 주관과 객관을 합쳐서 그리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을 모두 알아야 하는데 나는 객관(리얼리즘)은 알지만 주관(추상)은 모르므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 무렵 반도호텔 3층에 미국사람이 그림 장사를 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지요. 「한국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을 그려 가져가니 즉석에서 구입코자 하므로 3,000달러를 요구하여 이를 받아 파리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파리에 가 내 그림을 놓고 보니 그렇게 촌스러울 수가 없는 거예요.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문제는 색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정확한 색감을 익히기 위해 큐비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화면 분할한 면들을 색들로 채워나가는 연습을 한 것이지요. 1년간 이러한 공부를 하고 나니 내 그림에서 촌스러움이 점차 없어지고 오히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전시회에 내면 2,000여 개의 작품 중 평론가가 열댓 개의 작품을 집어내어 평을 해주는데 내 그림은 항상 뽑혀 설명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또 파리의 한 화랑이 내 그림을 모두 사겠다고 제의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개인적으로 판매하였는데 이게 완전히 매진된 것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자 어디를 가던 사람들은 나를 “위대한 화가”라고 소개해 주더군요. 우리 나라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남을 “위대한 사람”으로 높여서 소개하는 경우가 없으므로 많은 감명을 받았지요. 남을 칭찬해야겠다는 것을 여기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시 주로 반추상화를 그렸는데, 그것은 내 그림을 점차 변형시켜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반추상화가 인기가 많아 매우 잘 팔렸어요. 그런데 한 화상이 와서 내 그림을 보더니 “이 이상 더 추상화로 가면 잘 안 팔리게 되니 여기서 더 추상화시키지 말라”고 주문하더란 말입니다. 이 말이 나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주관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파리로 왔던 원래의 목표를 생각하고 여기에 더 머물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어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오자 기성 작가들은 내 그림을 보고 그림이 더 나빠졌다며 코웃음을 쳤지요.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에콜드파리의 그림이 왔다면서 매우 환영했고 내 그림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했지요. 김혜경 : 하모니즘은 미국에서 초빙교수로 일하시면서 창안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도미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김흥수 : 서울에 6년간이나 있었으나 나를 오라고 하는 학교가 없었어요. 파리까지 다녀왔으니 이제 후학을 양성해야겠는데 갈 데가 없더라는 겁니다. 어떤 제자가 그러더군요. “선생님, 취직하실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 각 대학의 교수들이 선생님께서 나타나실까봐 모두들 겁내고 있답니다.” 라고요. 그래서 마침 미국의 펜실베니아 무어 미술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와달라고 해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아마 67년도 일거예요. 하모니즘은 학생들 전시에서 아주 사실적인 그림과 완전 추상인 작품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순수한 내 감각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김혜경 : 당시 미국은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이 강세를 떨치고 있던 시대인데, 그 당시 미국 화단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주십시오. 김흥수 : 한 때 파리가 미술의 중심지였는데 요즘은 뉴욕이 미술의 중심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뉴욕과 파리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파리는 화가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세계미술의 중심이 되었지만 뉴욕의 미술은 화상들과 국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각 주마다, 도시마다 미술관을 세우는 정책을 썼고 이 미술관들을 미국작가의 작품들로 채우도록 규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미술관들은 소규모의 예산으로 대규모의 콜렉션을 단시일내에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유럽스타일의 진지하고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림보다 가볍더라도 단시일 내에 거대한 화폭을 메울 수 있는 값 싼 스타일의 그림이 크게 각광을 받았지요. 이렇게 미국의 추상미술은 화상들과 작가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져 탄생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그림들이 당시에는 새로웠기에 나 역시 좋다는 느낌을 가졌으나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지금 전혀 좋은 느낌을 받고있지 않습니다. 김혜경 : 선생님께서 작품활동을 해오시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셨다면 하나만 말씀해주십시오. 김흥수 : 이것은 일종의 영적 체험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이런 체험을 처음 한 것은 동경미술학교에 합격하던 날이에요. 합격자 발표를 오후3시에 한다고 하여 학교에 갔더니 6시로 미뤄 졌다더군요. 그래서 영화를 한 편 보고 학교로 돌아오는데, 저 멀리 교문 앞 게시판의 합격자 명단 중 내 이름이 갑자기 점점 커지더니 눈 앞까지 커다랗게 다가오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하도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니까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어요. 길 가다가도 지나가던 한 여인이 갑자기 커다랗게 보이면서 눈 앞으로 다가오면 그 여인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그림은 반드시 걸작이 되었지요. 한번은 파리에 갔는데 모나코에 들러 카지노에 갔었지요. 돈을 1불 바꿔서 빙고를 하는데 갑자기 13이라는 숫자가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다 놓았더니 30배가 나왔어요. 그런데 1불을 놓았으니까 30배 되어봤자 30불밖에 안되더라고요. 만일 100불을 놓았으면 3,000불이 되었을 텐데 말이지요.(웃음) 예술가들은 정신적인 생활을 해야된다는 것이 이런 데서도 나타나는 것 같아요.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름, 얼굴 등의 기억은 잘 들어오지 않지만 순간 순간의 느낌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김혜경 : 요즘 미술계를 바라보면서 느끼시는 점을 말씀해 주시지요. 김흥수 : 조선시대에는 중국을 사대했고 일제시대에는 일본을 사대했는데 이제는 미국을 사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우리의 것을 표현해야 하는데 다들 강대국 쫓아가기에 바쁘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하면 평생 아류신세를 못 면하지요. 중국에는 중국화가 있고 일본에는 일본화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한국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것을 찾으려면 중국의 문인화가 아닌 민화에서 찾아야 해요. 민화라고 하면 고구려 고분벽화가 그 근본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양반들은 벽이나 무덤 속에 그림 그리는 일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수묵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인화만 인정했고, 그 영향으로 우리 미술이 낙후되었지요. 또 그들이 색깔 표현을 천시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색 감각이 형편없게 되었어요. 김혜경 : 앞으로 우리 미술계를 이끌어갈 젊은 미술인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한 마디 해주시지요. 김흥수 :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 너무 유행에 민감하고 미국적인 것만 좇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또 예술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불변의 재료를 써야 하는데 이러한 재료 연구에 요즘 사람들 너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는데, 가장 중요한 기초는 바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혜경 : 선생님의 최근 근황, 그러니까 작업계획이라던가 진행하고 계시는 일 등을 알려주십시오. 김흥수 : 예술의 전당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어린이 영재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감각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빈 독과 같으므로 새로운 물(곧 감각)을 계속 부어줄 수 있으나 그 내부가 이미 차버린 어른들은 이같이 하기가 힘들지요.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영재교육을 하여 정확한 감각을 익힐 수 있게 해주는 일은 우리 나라의 미래를 위해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잘못된 감각을 가르치면 커서도 감각을 되찾기 어렵습니다. 우리 문화가 발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성세대들의 감각이 너무 낙후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배우는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아마 놀라실 겁니다. 아이들은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바로바로 효과가 나타납니다. 다만 처음에는 부산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와서 배우고 하였는데,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니까 돈이 너무 들어간다고 생각했는지 점차 줄어들더라고요. 지방 아이들이 서울 아이들에 비해 많은 기회를 못 가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김혜경 : 개인 미술관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김흥수 : 네. 그렇습니다. 미술관 설립 역시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데, 좋은 감각을 키우려면 우선 예술작품을 많이 감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유럽의 경우 미술관마다 어린이들이 와서 그 유명한 명화들을 직접 보고 또 따라 그리곤 합니다. 그 자체로서 훌륭한 영재교육이 되는 것이지요. 또 미술관마다 어린이와 학생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들을 갖추어놓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그런 시설이 너무나 부족하고, 또 있다 하여도 제대로 운영되고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럴 때 나 라도 미술관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와서 감상하고 또 많은 느낌들을 얻어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혜경 : 미술관을 준비하시는데 어려움은 없으신지요? 김흥수 : 사실 미술관을 설립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있습니다. 우리 나라 법이 미술관을 짓는 사람들을 전혀 도와주고 있지 못해요. 저는 돈이 별로 없습니다. 아주 젊었을 때부터 나는 위대한 화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미술관에서 보게 하리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림을 팔지 않았어요. 내 그림 값이 한창 나갈 때도 나는 그림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지금 그림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대신 돈은 없어요.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국가적으로 행정적으로 너무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문예진흥원에서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웃음) 김혜경 : 몸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장시간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루 빨리 감기 나으시고 또 추진하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