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리뷰  - 문 학

한국 소설의 건강한 전통  - 함께 행복하게 살기

 

하응백(문학평론가)

 

90년대 한국 소설에서 파편화된 개인 욕망의 분출은 가장 즐겨 다뤄지는 소재 중의 하나였다. 혼자 사는 주인공이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매진할 때, 주인공들 사이에는 욕망의 상호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90년대 여성 소설에서 이혼이나 불륜이 난무하고, 남성 소설에서 혼자 떠도는 외로운 영혼의 인간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상호 욕망의 의사 소통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휴대용 개인통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소설에서 창조된 인물들은 대부분 ‘너’에게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가고 싶지만 상충되는 욕망으로 인해 가지 못한다.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을 포기하고 혼자 살아가기로 작정한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그 욕망은 대부분 주인공을 파멸시킨다. 이것은 90년대의 소설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끼리 모여 살아야 한다는 상식을 역설적으로 확인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도식화한다면 80년대까지의 소설이 ‘우리는 공동체니까 함께 모여 살자’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면, 90년대의 소설은 ‘혼자 사니까 외롭고 심심하다’에 해당할 것이다. 둘 다 결론은 ‘장애물을 치우고 함께 살자’로 귀결된다.

 

박상우-운명의 창조를 통해...

 1999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박상우의 「내 마음의 옥탑방」과 동인 문학상 수상작인 하성란의 「곰팡이 꽃」도 ‘혼자 사니까 외롭고 심심하다’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내 마음의 옥탑방」의 주인공 남자는 10여년 전 자신과 잠깐 연애한 주희라는 여자를 생각한다. 그녀는 모든 물질이 화려하게 모여 있는, “화사한 물질의 바다”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인 백화점에서, 뭇 고객들의 시선을 받는 이른바 “백화점의 꽃”이라는 안내사원으로 근무하는 여자였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달동네의 옥탑방에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어머니는 갑자기 돌아가셨고, 소아마비를 앓는 동생은 시골 이모집에 맡겨 놓은 상태다. 그녀의 겉은 화려하지만, 그 화려함을 받쳐줄 물질적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 남자는 형집에 얹혀 살며 레포츠 회사 판촉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형의 아파트 17층과 백화점 레포츠 매장 11층은 그에게는 있고 싶지 않은 내려오고 싶은 공간이다. 형과 형수는 그가 떠나기를 바라고, 실적을 강요하는 자신의 직업에 그가 진절머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두 사람은 만난다. 주희가 보다 나은 물질적 풍요를 위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옥탑방에서 지상으로 내려 오고 싶다면, 그는 지상에의 안주를 위해 지상으로 내려 오고 싶어 한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정을 갖고 있지만, 그리고 둘 다 지상으로 내려오고 싶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다. 주인공 남자는 주희의 물욕을 채워 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안주(安住)를, 여자는 물질에의 욕망을 각각 꿈꾸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헤어짐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주희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그것의 주 원인은 이른바 욕망의 크로스인 셈이다. 이 여자가 택한 길은 그야말로 통속적일 것이다. 그녀의 잦은 외박이 그것을 말해 준다. 작가는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주희는 매춘을 하고 있을 것이다. 6, 70년대의 매춘이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 시대」에 나오는 영자와 같이 생계형 매춘이라면, 90년대에는 이처럼 욕망형 매춘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남자는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왜 옥탑방의 여자를 떠올렸을까? 그것은 지난 10년 동안 지상의 세계에서 안주하고 있었다는 각성 때문이다. 이때 옥탑방은 시지프들이 바위를 밀며 올라가는 도로(徒勞)를 아끼지 않았던 산정(山頂)으로 비유된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결국 산정에 도달하지 못할 운명에도 불구하고 산정을 향해 끊임없이 노역(勞役)을 지속하고자 하는 그 의지에 있다. 그 의지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부과한 형벌을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노동), 세상을 인간적인 것으로 가득차게 한다. 그것은 운명의 수임(受任)이 아니라 운명의 창조다. 박상우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은 이것이다. 박상우는 운명의 창조를 통해 ‘너에게 가고 싶어 한다.’

 

하성란-진실을 찾아...

하성란의 「곰팡이 꽃」은 한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독신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지은 지 15년 되는 15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남자는 종량제 실시 이후 주민들의 ‘습격’을 받는다. 쓰레기를 그냥 버렸다가, 쓰레기 내용물을 추적하여 찾아 온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것이다. 그 쓰레기 속에는 그가 짝사랑하는 회사 여사원에게 보낸 미완의 편지도 들어 있다. 그것이 그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그런데 그 여자는 후배와 결혼해 버렸다. 자신이 보기에는 그 후배는 결점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여자는 후배의 코발트색 와이셔츠가 마음에 들어 그와 결혼했다고 한다. 남자는 여자가 결혼 후에도 “후배의 실체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무엇으로 사람의 진심을,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일까?

‘가볼러지 Garbageology’ 라는 신종 사회학이 있다.

쓰레기를 통해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남자는 학문적 연구의 수준은 아니지만, 쓰레기를 통해 아파트 주민들의 실체를 자세히 알아보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새벽에 버려진 쓰레기 봉지를 남 몰래 집으로 가지고 와 욕조에 펼쳐 놓고 내용물을 자세히 분석한다. 남자는 장기간에 걸쳐 100개가 넘는 쓰레기 봉지를 뒤진다.

남자는 어느 날 밤 술에 만취해 아파트 호수를 착각한 사내의 방문을 받는다. 사내는 100kg에 가까운 거구다. 사내는 남자의 옆집 여자를 사랑한다. 혼자 사는 옆집 여자는 오랫 동안 아파트를 비우고 있다. 사내는 장미꽃을 주며 남자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제 남자의 관심사는 옆집 여자의 쓰레기 봉지다. 그가 쓰레기 봉지를 조사하여 알아낸 것은, 옆집 여자는 저열량의 음식을 선호한다, 생크림 케이크의 경우 위에 얹힌 과일만 먹고 케이크는 손도 대지 않고 버린다 (그래서 케이크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다) 지리산 쪽으로 등산 여행을 다녀 왔다 등이다. 사내는 다시 한 번 남자를 방문해 여자가 부재중 이라며 생크림 케이크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이사해 버린다. 남자는 그들 사이에 틈이 생긴 원인을 여자의 쓰레기 봉지를 조사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이 찾아 낸다. 여자가 증오하는 것은 사내가 아니라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사내의 몸집일 뿐이다. 여자는 남자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억지로 먹어 주는 데 지쳤고, 남자는 여전히 여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믿어 버린 데서 생긴 오해가 그들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하성란의 이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미세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사소한 오해와 잘못된 정보가 인간 관계를 곡해한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의사 소통 구조 속에서 진실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진실은 어디 있는가. 쓰레기 더미에서밖에 찾아질 수 없는 것이 현대 사회의 인간 관계의 진실인가. 진실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그러나 하성란의 소설은 진실을 찾아 ‘너에게 가고 싶다’고 애써 말한다.

박상우와 하성란의 소설은 세기말에도 여전히 ‘함께 행복하게 살기’에 몰두한다. 세월이 가도 이러한 소설의 흐름은 쉽게 변할 것 같지 않다. 이것이 바로 한국 소설의 건강한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