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④ 음악

2000년 이후의 한국의 음악

 

서 우 석 (서울대 교수)

한국의 100년

2000년을 며칠 앞둔 지금 우리는 다음 세기에 일어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알다시피 시간의 흐름은 연속적인 것이므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2000년이란 년대가 놀라운 경계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릴 때 새해가 다가오면 새해에는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나이가 들면 그러한 기대가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이었음을 깨닫게 되듯 문화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2000년이 뚜렷한 경계선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름다운 동심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음 세기 한국의 음악 또는 한국의 예술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버리기는 어렵다. 그것을 짐작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한국의 음악이 처해 있는 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우리는 나라를 잃었고 그 절반이 지나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곧 분단이 이루어지고 전쟁을 겪었다. 60년대부터 경제개발이 추진되었고, 그 후 민주화 투쟁으로 20년 가량을 보내면서 1990년대에 이른다. 90년대 말 우리는 세계를 향한 문턱에서 첫 시련으로 기록될 금융 위기를 겪었고 지금 우리는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

 

세계의 변화

세계가 변화해 온 좀더 긴 시간을 생각해 보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결정해 온 큰 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을 결정해 온 요인을 이념적·기술적·개인적 삶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그 틀을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념적 측면은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기저의 사상으로서 정신사적으로 그 사회를 규정짓는 여러 요인이고, 기술적 측면은 예술의 생산과 전달, 그리고 수용에 관련되는 과학기술적인 요인이며, 개인적 삶은 개인적 재능과 문화적 단위인 한 민족이 지니는 문화적 성향 그리고 예술가를 선택하는 사회적 결정의 요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이념적 관점에서 보면, 서구의 문명은 전체적으로 기독교의 이념에 의해 지배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예술을 지배해 온 그 이념적 속박이 완화되지만 문학, 음악, 미술의 실제는 이념적 속박에서 서서히 그리고 완만하게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음 세기에 기독교적 이념은 약화될 것이다.

기술의 관점에서 보면, 지속되어 오던 농경의 시대에 산업혁명이 충격을 준다. 농업시대는 인력에서 가축의 힘을 사용하는 혁명, 산업시대에는 동력 사용의 혁명, 정보시대에는 프로그래밍의 혁명을 겪는다. 산업시대의 동력이 인간 노동력의 확산과 연장으로 설명된다면, 정보시대의 프로그래밍은 인간 두뇌의 확산과 연장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품의 제작에 관여되는 자아 개념의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이든이 작곡한 교향곡은 에스테르하짜의 기호에 맞추어진 것이며, 슈베르트의 가곡은 살롱에 모인 사람들의 기호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작품의 창작과 관련해 개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0세기 이전의 그레고리안 성가와 세속의 민요에 작곡자의 이름이 첨부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인적 자아의 개념이 지금과는 달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에 도예공의 이름이 실리지 않은 것 역시 비슷한 일이다. 공개적인 연주를 거부하고 음반을 통해서만 청중을 만난 20세기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Glenn Gould (1932-1982)는 예술가에게 익명성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예술활동의 익명성은 다음 시대에 이르면 더욱 보편화 될 것이다.

   

한국 음악의 100년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서 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예술활동을 지배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념적 측면, 기술적 측면, 개인적 측면이 지난 100년 동안 우리에게는 어떻게 펼쳐져 온 것일까?  

20세기 초의 우리는 예술을 사회와 유리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서구의 예술은 경이적인 것이었고 서구의 예술은 엘리트 층에서부터 그 수용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들의 이념적 성향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술을 사회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기 보다는 이상적인 대상으로, 그리고 현실과는 무관한 어떤 것으로 바라보았던 경향은 예술적 이념을 아카데미즘의 산실인 대학 내에 수용하는 이외의 다른 방법을 택할 수 없게 하였다. 예술적 활동은 원래 대학내적인 것이 아니다. 한국 전통의 음악 풍토인 궁중의 아악이나 민속 음악이나 모두 학문과는 무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받아들인 서구의 예술을 아카데믹한 것으로만 수용하게 된 것은 20세기 내내 한국의 예술적 풍토의 건강성을 해치게 된다.  

예술을 학문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사고는 예술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뿌리깊게 드리워지게 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한국의 예술교육은 과다하게 팽창된다. 사회적 수요와 관계 없는 인력의 공급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1960년 이후 대학 교육의 지나친 팽창으로 예술적 재능, 감각, 기술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들이 음악, 미술, 무용, 연극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1990년대에 이르면 예술전공대학 졸업자의 수는 상상을 초월하게 증가한다. 일년에 3만명 가까운 인력이 예술전공자로서 사회에 쏟아져 나온다. 그 중 절반을 다른 산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기능적 성격을 가진 인력이라고 보더라도, 만명 이상이 순수한 예술활동을 지향하는 인력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은 유행하고 있는 예술활동을 세련되게 만들거나 아니면 대중의 취향를 뚫고 들어가 충격을 주고 그 허점을 노려 혁신적 작품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예술활동은 1950년 이전에는 작가의 취향이 대중에 의해 판단되기 보다는 아카데미즘에 근거한 논쟁거리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 논쟁은 결국 선진국의 예술적 사관과 지식으로 호도되었다. 그러한 성향은 아직도 남아있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프랑스에서, 독일에서, 뉴욕에서 인정받았음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 청중이나 관객의 예술적 취향의 허점을 찾아 이를 만족시켜 주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양식의 작품을 시도하기 보다는 대학의 교수가 되어 언론의 비호를 받으며 자신의 그림 값을 유지하고 연주의 수준을 인정받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변명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도전해야 할 대중적 취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20세기의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서 소비자 층은 이미 붕괴되었으며 이는 예술가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변경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분야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비자 때문에 생산자가 탄생되지 않으며 생산집단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소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순환 논리를 끊는 역할은 청중의 몫이기 보다는 예술가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뉴욕 청중과 관객의 허점을 관찰하여 성공적으로 등장한 백남준을 우상으로 받드는 일을 서슴지 않는 일이나, 윤이상의 오페라를 서울에서 공연하여 대중적 인기를 기대하는 일은 그들의 예술이 태어난 풍토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없기 때문이다. 심하게 비유하자면, 그것은 사랑방 고스톱 판에서 던져 이긴 패의 이름을 외워가지고 안방의 고스톱 판에서 같은 패를 던지므로서 돈을 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다시말해 예술작품은 현실적 여건과 이상적 가치관 사이에서 존재한다. 작품의 이상적 가치를 처음 언급한 작곡가는 베토벤이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라주모브스키 현악사중주 3번의 끝악장을 연주하던 바이올리니스트가 곡의 연주가 너무도 어렵다고 항변하며 이 곡을 연주하라고 작곡한 것이냐고 항의했을 때에 “이 곡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속으로는 아마도 잔소리말고 연주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지금 살아난다면 자신의 ‘돈 죠반니’가 상연되고 있음에 놀랄 것이라고 음악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는 그 작품이 자신의 사후 수 년간 연주된 후 공연목록에서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었다. 불멸의 가치라는 이상성과 작품은 이 사회 안의 것이라는 현실성의 두 축은 한 사회안에서 힘의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그 긴장관계가 있어야 양쪽 모두 성장한다.

예술의 생산과 전달과 감상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기술의 발전은 예술의 중심지역에 이익을 주지만 주변 지역에는 피해를 준다. 음반의 발명과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매체의 발전은 한국 예술을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이 한국예술의 체질을 약화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음반의 보급은 한국의 청중을 한국 연주자의 청중으로 만들기 보다는 런던, 뉴욕, 파리에 사는 연주자의 청중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은 문학 외에는 없다. 문학은 자국어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문학이 첨가된 음악, 즉 가사가 있는 노래가  이에 대한 강한 저항성을 지닌다.

음반이 예술의 전달 즉 유통에 혁명을 가져 왔다면 컴퓨터와 통신의 혁명은 음악의 창작과 감상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작곡은 전통적 방법으로 악보에 음표를 그려 관현악단에 의해 연주되는 형식을 취하건 아니면 직접 컴퓨터에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택하건 간에 이미 컴퓨터에 의해 이루어져 가고 있다. 작곡은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듯 대중화되고 보편화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작곡을 ‘어두운 방에서 그림 그리기’라고 한다면 컴퓨터를 사용한 작곡은 ‘밝은 방에서의 그림 그리기’이다. 자신이 악보에 그려놓은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작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전달 역시 음반을 통하는 방법에서 직접 디지털 자료를 전송하는 방법으로 서서히 변화되어 가고 있다. 최근에 나타난 MP3의 매체가 이를 말해준다.  

한 사회가 예술가를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가 선정되는 방법이 무엇이며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방법은 어떻게 변화되어 온 것일까? 여기서 잠시 유럽의 경우를 요약해 보자. 중세 이후 예술가는 교회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후 선택은 봉건 영주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면 시민사회가 참여하게 된다. 20세기 초 미국은 대학이 작곡가를 선택하고 이들의 삶을 후원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아 그것이 미국 음악계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문화산업이 그 선택을 대신한다.

그러나 예술가를 선택하고 그들의 삶을 후원하는 몸체가 교회, 귀족, 시민사회로 옮겨 왔으나 그 판단의 기저에는 예술적 감각 또는 미적 취향이 엄연히 존재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예술에 대한 판단 또는 정의가 변화된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예술작품은 제도적으로 결정되려는 강한 경향을 지니게 된다.

다시말해 이 소리가 음악이냐 아니냐 또는 이 물체가 미술품이냐 아니냐 하는 결정이 교회와 귀족과 시민의 소박한 그러나 건전한 미적 감각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예술가 그룹, 평론가, 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맥락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대중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예술로서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실의 발단을 보통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 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소변기를 「샘물」 fountain (1917)이라는 표제로 전시함으로서 예술 작품의 제도적 정의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야유적으로 들어낸다. 존케이지 John Cage (1912-1992) 는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서 침묵을 지킨 후에 퇴장한다. 평론가들은 이 침묵을 「4분 33초」(1952)라는 작품으로 인정한다. 예술이 제도적으로 정의됨으로써 20세기 초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창작음악에서의 작곡가와 청중과의 결별은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우리의 경우 예술가는 어떻게 선택되고 있는 것일까? 대체로 학벌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50년 이후 미술계에서 학벌의 연줄없이 등장하는 화가들이 몇 명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의 경우는 그러한 예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주는 국내에서 사사한 선생의 이름과 함께 외국 유학의 경력이 프로그램에 표기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작곡의 경우 미술계처럼 대학 학벌이 없이 등장한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0년간 작곡가의 양성을 위한 장치가 빈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곡가는 청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미국과 유럽의 작곡가들이 그곳의 현실과 도전한 결과로서 이루어진 음악적 취향과 기법을 공부하여 그것을 한국에서 시도하는 일로 일관하였다. 간혹 그와는 다른 시도를 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그 역시 우리의 현실을 감안한 것은 아니었다. 국악의 경우 많은 시도가 시행착오로 기록될 것이다. 국악관현악단이 그렇고 산조 등을 오선보로 기록하려는 노력이 그렇다. KBS에 소속된 국악관현악단의 모습이 그러하듯 서양음악의 관현악단을 모방한 방식의 국악관현악단은 그 한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서양관현악단의 소리를 지향한다는 자체가 시행착오을 전제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편성 역시 문제를 제기한다. 가야금이 주류를 이루는 관현악의 편성은 마치 서양관현악단의 바이올린과 첼로 등의 현악기를 기타 guitar로 바꾼 것과 같은 것이다. 활을 쓰는 악기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내지만 기타는 단절된 소리를 내므로 관현악단의 주된 소리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래서 서양의 관현악단에서는 활을 쓰는 바이올린 가족의 악기가 바탕을 이루게 된다.

가야금을 중심 악기군으로 씀으로서 국악관현악단은 관현악으로 성립될 음향학적 근거를 위배한 것이다. 다음 세기에는 이러한 모습의 국악관현악단은 북한의 경우처럼 아쟁류의 악기가 가야금을 대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바람직한 것은 현행의 국악관현악단은 없어지고 삼현육각의 합주단이 생겨야 할 것이다.

가야금 산조의 경우 예를 들어 김죽파류의 가야금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 역시 우리의 연주 관습이지만 김죽파가 자신의 산조를 만들었듯이 새로운 산조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 우리 음악의 흐름이다. 이런 유동적 생명성보다는 악보를 출판하여 유동성을 말살하고 음악을 고착시켜버리려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산조를 비롯한 한국의 음악은 비록 ‘류’라는 단어로 작곡자의 명칭이 남아 있지만 작곡자가 설치고 나대는 음악이 아니다. 1950년 이후 국악의 활동은 작곡 개념이 잠재되고 대신 연주 개념이 앞에 나타나는 동양음악의 근원을 감추려는 익명성을 내내 죽여온 셈이다.

그러나 국악은 워낙 널리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음악이므로 그 작곡 개념 부재의 익명성, 다시 말해 근원을 감추는 사상은 살아날 것으로 보인다.

 

미래의 전망

이미 미래에 대한 언급이 시작되었듯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바람직하게 발전될 경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말할 수 있다. 나는 다음의 몇가지를 바람직하게 변할 다음 세기의 모습으로 보려고 한다.

먼저 대부분의 예술교육기관이 축소될 것이다. 음악의 경우 많은 음악대학이 없어질 것이다. 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의 수는 지금의 20분의 1 정도로 줄 것이다. 실기 교수는 연봉 금액과 근무 년수가 명기되는 계약제 강사로 바뀔 것이다.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작곡가는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겠지만 보수적인 작곡가가 새로이 등장할 것이다. 이들은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들로서 민요을 편곡하고 축제적인 관현악곡을 작곡하며 영화 음악 등을 작곡할 것이다.

다음 세기에 이르면 국악 작곡이라는 개념은 없어질 것이다. 작곡가와 지휘자는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과 같은 모습의 국악관현악단은 없어질 것이고 그 대신 지휘자가 없는 삼현육각의 소규모 합주단이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연주자가 다시 작곡가가 되는 새로운 국악의 풍토가 나타날 것이고 쓸데없는 악보 출판은 사라질 것이다.  판소리는 널리 감상될 것이고, 판소리의 명인은 여러 기관의 지원을 받아 조선조 말에서처럼 긍지를 갖는 음악가의 생활을 할 것이다.

자신의 ‘류’를 가진 가야금 거문고 연주자, 대금과 아쟁의 산조, 소규모 합주단의 아악은 외국에서 많은 환호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판소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이상의 환영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가사 때문이다.

서양음악의 관현악단은 아마도 동양에서는 최고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은 이들의 공동시장이 될 것이고, 인력 역시 세 나라를 자유롭게 드나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관현악단은 음악활동의 모체이므로 피아니스트, 성악가, 그 외의 독주자 모두 세 나라를 활동무대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음악교육에 대해 전망해보자. 예술종합학교 등 전문가를 위한 음악교육에 많은 노력과 투자가 있겠지만 음악교육의 중심지는 뉴욕과 런던과 비엔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학생이 그곳에 유학하는 일은 지방에서 서울 유학하는 일만큼 쉬워질 것이다. 작곡, 지휘를 지망하는 학생들도 어린 나이에 그곳에서 교육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