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 새천년을 위하여

 

새 천 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김 정란(시인, 상지대 교수)

 


새 천 년, 더 이상 고립된 자리는 없다.  

 새 천 년이 오고 있다. 지난 2000년 동안, 인류는 무수한 일을 겪었고, 수많은 고난과 싸워가며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해 왔다. 원시 공동체로부터 출발하여, 봉건적 제도를 만들었고, 문화적 정치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모여 민족국가를 완성했고, 그리고 지금은 <세계>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다. 그렇게 해오면서 인류는 무수한 종교와 문화, 정치, 철학을 이루었고, 눈부신 과학적 발달을 성취했다. 인류는 지금 엄청난 지적 자산과 물적 자산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언제까지나 진보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은 지금 본질적인 도전 앞에 마주서있다. 인류가 자신의 존재를 지구상에서 구현해 오면서 발생시킨 악이 더 이상 제어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새로운 천년은 인류에게 희망의 시대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두려운 재앙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인류의 물질적 행복을 위해서 얌전하게 봉사해왔던 자연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자연을 파괴해 왔던 속도로 계속 자연을 파괴해 가다간, 인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몇 년이나 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는 지금 귀를 틀어막을 수준이 아니다.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살아남으려면, 빨리 무엇인가 해야 한다. 그것도 전지구적 차원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금 지구에 닥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류 전체에게 해당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금 지구 한구석에서 나비 한 마리가 한 날갯짓이 어떤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힘의 장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러한 강요된 불안정성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특성이다. 지구의 어떤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소한 문제가 인류 전체를 공멸의 길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천 년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느 한 민족의 번영과 전망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의 운명에 대해 숙고해 본다는 의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는 지금 한 덩어리가 되어 돌아가고 있다. 어떤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고립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민족은 서로 대화해야 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류는 <자존>과 <자립>의 자리에서 <상생>과 <공존>의 자리로 움직여가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자리잡기는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만 요청되는 것은 아니다. 새 천년에 인류는 자아와 공동체, 여성과 남성, 이성과 영성, 있음과 없음, 신화와 역사 사이의 끊어진 다리를 복원해야 하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관계를 청산해야 하며, 지구와 우주 사이의 관계에까지 마음을 써야 한다.   이제 전혀 다른 시대가 온다. 그 시대는 그 자체로 어떤 희망도 절망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인류 전체가, 각 민족 국가가, 그러나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고립된 자리는 없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새로이 정의되고 의미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고독은 이제 유약한 자들의 퇴행의 표지에 불과하다. 존재의 골방은 부서졌다. 골방에서 나와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한다. 이제 존재는 사방으로 터져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새 천 년 준비 위원회>에서도 <평화>와 <희망>이라는 기본 개념을 정하고 이런 저런 구체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이 기본 개념은 아주 적절하게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처럼, 새 시대는 <상생>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서구 강대국들이 볼거리 위주로, 따라서 관광 사업 용 이벤트 중심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 데 반해서, 새 천 년의 메시지를 주체적으로 제시하겠다는 확고한 문화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새 천 년>이라는 계기는 사실상 물리적 시간 구분에 불과하다. 새 천 년이 닥치는 기원  2000년이라는 시점이 그 자체만으로 무슨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계기를 만났을 때, 어떤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삶을 재충전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새 천 년>의 도래는 사람들의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아주 훌륭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필요가 있다. 우선은, 이런 저런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으며, 그 볼거리를 세련된 방식으로 구성해서 세계인들에게 우리 문화의 매력을 자랑할 필요가 있다. 또 기왕 많은 돈을 들여 벌이는 행사라면, 그것에서 발생하는 관광 수익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문화적 볼거리는 언제나 자본을 창출해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무엇 때문에 굳이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런 저런 볼거리들을 제공하는 이벤트들을 외면할 수 없고, 또 외면해서도 안되겠지만, 이러한 행사만으로는 대중으로 하여금 새 천 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할 수 없다. 볼거리를 위주로 하는 행사들은 아무래도 일회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화려한 볼거리를 보면서, 대중은 그때 당장 축제의 분위기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효과는 느릴지 모르지만, 보다 항구적인 방식으로 문화적 지반을 다지게 해줄 행사를 동시에 추진시킬 필요가 있다. <새 천년의 도래>라는 물리적 계기를 지속적으로 우리 문화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문화적 계기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프트하고 문화적인 접근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훨씬 더 본질적이며 인문학적인 접근 방식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접근 방식이 종래처럼 아카데미에서 학자들끼리 나누는 고담준론의 형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벤트성 행사처럼 불특정한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의식 있는 상당수의 대중이 함께 호응할 수 있는 방식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매우 전문적인 방식으로 새 천 년을 준비하는 학문적 노력은 별도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적 성과를 대중과의 만남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성과로 육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빼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박물관 안에 진열되어 있는 유품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본질은 확고하고 깊게 가지되, 그것을 매개하는 방식은 부드럽고 친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새 천 년> 도래의 의미는 담론 생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새 천 년>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공유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질과 새 천 년

 

  그렇다면 어떤 행사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벌일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새 천 년 준비 위원회에 달린 문제이다. 1988년 올림픽 부대 행사를 눈부신 성공으로 이끌었던 이어령 전문화부 장관이 주도하는 행사인만큼, 전체적인 구성 방식이나 행사 내용에 대해 큰 근심은 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까지 인문학적 접근방식을 택한 별도의 행사 준비에 관한 소식은 별반 들리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 감은 있다. 이제 와서 이러한 행사를 새삼스럽게 준비하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친 건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행사를 꼭 2000년에 맞추어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 이런 저런 볼거리들에 파묻혀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도 없다. 또 졸속으로 준비했다간, 예산만 낭비하는 결과가 올 수도 있다. 지속적으로 인문학적 관심을 제고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좀더 늦어도 상관없다고 본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행사는, 오히려 행사라기보다는 사업이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기는 한데, 새 천 년의 도래를 맞아 우리의 사상사를 한번 총점검해보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회성 행사로는 어림도 없고, 연속적인 심포지움 형식이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시대 별로 나누어도 좋겠고, 주제나 분야 별로 나누어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이런 행사를 제안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가 물적 여건의 불비함만도 아니고, 제도적 모순의 누적만도 아닌, 훨씬 더 근원적인 층위에서 논해야 할 문제들이기 때문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미래를 개척할 수 없을 만큼 지적으로 천박한 사회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부터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대대적인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일은 어떤 한 개인이, 그리고 어떤 한 지적 그룹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범국가적 차원에서 모든 지적 논의들을 수용하고 묶어서 스펙트럼화해 주는 계기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본래 천박한 사회가 아니었으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권 옆에서 거센 도전을 받으며 5000년 동안 자존을 지켜온 아주 특이한 능력을 지닌 사회이다. 우리는 당당한 지적 유산과 발달한 정서를 지닌 독특한 성정의 민족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물질만을 좇아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으며,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심성의 소유자들이 되어 가고 있다. 전통은 사라지고, 도무지 어느 나라 것인지 알 수 없는 괴상한 문화가, 그것도 발생지에서와는 달리 아주 천박한 판본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상황 안에서 단순 소박하게 전통적 민족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상황은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하다. 개항이래, 우리 사회에 비집고 들어와 이미 심층 깊은 곳까지 내려앉아 있는 외래 사조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분명한 리얼리티인 것이다. 그것 역시, 무조건 <우리 것이 아니다>라고 물리치기에는 우리의 삶 안에 들어와 삶의 엄연한 일부가 되어 잇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어떤 계기를 통해서건, 우리 민족이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근거로 삼았던 모든 사유의 틀을 점검해 보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切脈의 비극적인 상황에 던져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분명한 현실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외래 사조와의 연속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하나의 장> 안에서 검토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새 천년 준비>라는 기회는 이런 행사를 하기에 아주 맞춤한 기회라고 생각된다.  포스트모던 사회는 지식과 정보의 사회이다. 그러나 아무 지식이나 아무 정보나 다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질이 높은 지식과 정보만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그런 지식과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맥락을 결한 단답형의 퀴즈식   앎으로는 어림도 없다. 전체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그리고 삶의 구체성 안에서 주체적으로 파악한 앎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정보의 획득이 문제가 아니라, 정보의 창조가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동안 대중을 훈련시키고, 사회 전체 안에 정보 생산이 가능해지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새 천년을 단발성 행사로 기획해서는 안돼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