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지킴이

 

 
국악계의 '팔방미인'

인간문화재 정철호 선생

                       

신영란(르포라이터)                    

 

 
 현재 전라남도 도립국악단 상임지휘자 겸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정철호(76)선생은 '국악계의 팔방미인'으로 통한다.  일찍이 국창(國唱) 임방울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익혔고,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아쟁산조 창시, 2만여 곡에 이르는 판소리와  민요 작창, 게다가 내노라하는 명창들의 북채잡이까지, 국악에 관한 한 선생의 활동영역은  두루 거칠 것이 없다. 그러니 선생을  두고 국악계의 팔방미인 운운하는 것도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열 세살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홀홀 단신의  몸으로 판소리에 입문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살아온 내력을 귀기울여 듣노라면 얼핏 가슴을 후벼파는 것처럼 처연한 아쟁산조 가락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우리 전통악기 가락 중에서 아쟁만큼 애절하게 심금에  와 닿는 악기 소리도 드물다. 장중한 우조 가락에서 구슬프고 애조 띤 계면조를 오가면서 까닭 없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한의 소리...... 아쟁산조는 바로 그런 가락이다.

 

 그런데 이 한의 소리, 우리네 인간의 가슴 밑바닥에 응어리로 내려앉은 슬픔을 자극하고 끄집어내며, 끝내는 한바탕 실컷 울고 난 뒤처럼 삶에 찌든 영혼을 개운하게 씻어 내주는 그 소리에 민속악인 산조가락을 얹어 대중에 널리 보급한 창시자 또한 선생이다.  본래 아쟁은 궁중에서 아악을 연주할 때만 쓰이던 악기였다. 선생이 아쟁이라는 악기를 처음 접해본 1945년경만 해도 일반인들은 좀처럼 그 소리를 감상해볼 기회가 없던 터였다.
 "그때가 아마 22살 되던 해였던 것  같습니다. 여성국악동우회가 '햇님 달님'을 공연하는데 아쟁이란 것을 그곳에서 처음 봤지요. 소리를 한번 듣고는 단박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설움이 많던 시절이라서 그랬는지 애절한 가락이 그후로도 오래 토록 뇌리에서 떠나질 않더군요." 설움 많던 시절, 선생이 태어난 1923년 무렵의 시대 분위기가 그랬고, 열 세살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여읜 개인사적 연대기 또한 설움 많고 한도  많은 세월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돌봐줄 형제도 없고, 변변한 유산 한푼도 없이 홀로 남겨진 선생이  가진 거라곤 핏줄로 이어 내려온 광대기질, 그것뿐이었다.  선생의 가문은 남도에서도 이름난 세습 광대 집안, 증조부와 조부는 기악의 명인이었고, 부친 또한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았다. 적어도 '소리'에 있어서만큼은  배냇짓을 할 때부터 익숙하던 터에 어느 날 임방울 명창이 목포에 왔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숙소로 찾아간 것이 선생의  열 네살 때였다.

 

 임방울 명창이 누구인가.  이른바 '소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임명창의  소리를 들어본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소리는 못 듣는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득음의 소유자요, 이미 1930년대부터 판소리 '최후의 보루'로 통하던
인물이었다.  선생은 그런 대가 앞에서 떼를 쓰다시피 해서 부친에게 배운 판소리 한 자락을 불렀고, 그 즉시 임명창의 문하생으로 받아들여졌다.그후 4년간을 소리공부에 전념하던 선생은 이후 명창 정응민선생의 문하에 들어갔고,1947년 남원명창대회에서 1등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때부터 '소년 명창' 소리를 들으며 이름도 꽤 알려졌지만 도무지 그 명성이라는 것이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가난, 외로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리꾼의 설움, 어쩌면 그런 모든 것들이 선생의 가슴 깊은 곳에 한으로 맺혀졌던 것일까? 한창 청춘의 패기와 열정으로 넘쳐날 시기에 하필 아쟁의 처연한 가락에  마음을 빼앗긴 그 속내를 헤아려보는 일 또한 어렵진 않으리라.그 한이 어찌 선생 혼자만의 것이겠는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한은 질곡의 역사를 지나온 우리민족의 핏속에 저마다흐르고 있는 유전인자 같은 것이 아닐까?

 

  선생은 그러한 우리민족의  한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소리를 아쟁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1948년 꼬박 3백일을 두문불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아쟁산조라는 민속악의 새 장르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궁중에서 쓰는 것 같은 제대로  된 아쟁은 구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주변에 만들 줄 아는 사람도 없었지요. 궁리 끝에 가야금을 뜯어  줄을 덜어내고 아쟁 비슷한 걸 만들어냈습니다. 그걸 갖고 판소리 가락에서 음을 따온  아쟁산조를 만들어 창시발표회를 열게 된 겁니다." 사실 선생이 아쟁산조의 창시자가 된 데에는 무엇 보다고  가난이 큰 몫을 했다. 판소리만 해서는 '아무래도 굶어죽기 십상일 것 같아서' 삶의 방편으로 기악을 택하게 된 무렵에 바로 아쟁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극단이 크게 인기를 끌던  때였다. 국극단에 들어가 반주라도 해서 배고픔을 면해보고자 했던 선생에게 아쟁과의 만남은 또한 국내 최고의 판소리 작창가로서 명성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 들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성국극단치고 선생의 작창곡을 쓰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만리장성' '선화공주' '단종과 사육신' '견우와 직녀' '무영탑' 등 선생의 작창극은 진경여성국극단, 여성국악동우회, 조선창극단 등의 주요  공연작이었다. 게다가 요즘도 국립창극단의 창극 중 90%는 선생의 작창극으로 채워질 정도라 하니 실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2만여 곡에 이르는 선생의 작창극  중에는 유난히도 '안중근 의사'  '권율장군' '녹두장군 전봉준' '성웅 이순신 장군' 등 순국선열들을 기리는 작품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93년도에는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신작 판소리를 발표하기도 했고, LA 흑인폭동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한.흑문화축제'에도 참가하는 등, 국악인으로선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사 문제에도 폭넓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판소리 다섯 마당은 내용이 추상적일 뿐 아니라  소재 또한 중국 것이 대부분입니다. 옛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조국이 있게  한 애국선열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정기를 일깨우는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이 전국의 초등학교에 자신이 작곡한 '열사가'를 음반으로 보급하며 어린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했다면,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판소리  작창은 당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한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에게도 아직 치유되지 않은 한이 한 가지 있다. 다름 아닌 스승 임방울 선생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임방울 선생의 유일한 생존 제자로서 그 법통이 끊어지고 있는 현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크나큰 아픔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무형문화재 지정제도가 실시되기 이전에 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승의 판소리 유파가 계승되지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처사라는 게 선생의 생각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계승시키지 못하는 인간문화재제도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합니다."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스승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임방울류 적벽가를 완창, 음반으로 보급하는 등, 안간힘을 써온 선생으로선 당연한 항변이리라. 그리고 그것이  비단 선생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