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 동안 한국영화는 내내 강제규감독의
<쉬리>에 관해서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매일 새로운 기록이
세우지고 있으며, 이미 이 영화는 이제까지 한국영화에 관한 모든 흥행기록을
새롭게 만들었다. 찬방양론의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그리고
미안하게도 나는 강제규의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여전히(!) 없다), 이제
<쉬리>는 국방부에서 지정한 전군 정신교육용 영화로 선정되면서
‘병역의무에 이상이 없는 신체건강한 병역미필 대한민국 남성’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보아야 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여기서 <쉬리>에 관한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일 생각은 없으며,
더더구나 이 영화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들을 들추어내는 ‘옥의
티’ 찾기 퍼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첫번째 ‘무시’에 대한
이유. <쉬리>가 냉전 이데올로기를 담고 반공 내러티브를 전개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내가 비판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강제규 자신의
표현의 자유이므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쉬리>의
텍스트 비판은 내게서 그렇게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너무나 순진해서 자꾸만 나는 이 모든 성공이 관객들과 함께
벌이는 공모(共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두번째 ‘무시’의 이유.
<쉬리>는 약점들이 너무 많아서 심지어 영화에 별로 훈련받지
않은 관객들조차 작정 하기만 한다면 그것들을 찾아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정도이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렇게 약점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눈물 겨울 정도로 이 영화를 감싸고 도는 관객들의 정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는 궁금함이다. 만일 우연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본 헐리우드 액션영화가 <쉬리>와 유사한 실수들을 보여주었다면
당신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걸 그저 한국영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까? 만일 그러하다면 문제는 훨신 더 심각하다.
헐리우드 영화를 흉내낸 이 영화를 보고 당신이 이제 우리도 헐리우드만큼
할 수 있다고 이 영화를 변호한 것이라면, 혹시 당신이 갖고있는 한국영화의
이상적인 모델은 헐리우드를 겨냥한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이제 모든
한국영화를 헐리우드와의 무모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이 문제는 <쉬리>가 가져온 한국영화시장의 변화이다.
그저 구경꾼들에게는 한국영화의 흥행이 잘 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은 그렇게 단순한 곳이 아니다. 이 놀라운
성공이 가져온 부정적인 효과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려되는 독과점 현상 우선 시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은
언제 어디서나 만찬가지로 독과점현상이다. 시장에서 공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약육강식이
벌어진다. 그런데 여기 단 하나의 강자가 나타나서 다른 모든 이들의
이익을 가져가고, 더 나아가 기회마저 박탈한다. 영화는 결국 그 영화를
만들어내는 생산의 구조가 만들어 내는 소비를 통해서 이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통되는 배급구조 안에서 이윤을 만들어내는 장사이다.
그런데 영화관은 이미 제한되어 있고, 영화는 영화관 바깥에서는 달리
유통될 방법이 없다. <쉬리>의 잘못은 아니지만, <쉬리>의
성공은 다른 한국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는 기회의 박탁의 다른
말이다. 물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쉬리>의 성공은 동시에
헐리우드 영화의 시장 점유율로 부터 영화 관을 보호하지 않았냐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매우 미안하지만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들의 지난해 쟁점사안은 스크린 쿼터제였다. 일년에 모든 영화관은
한국영화를 146일만 상영하면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제도는 한국영화를 146이상 상영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아니라, 그
반대로 최소한 146일 이하를 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다. 이 말은 한국영화를
146일만 상영하면 그 다음에는 안해도 괜찮다는 말이기도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146일간 한국영화를 146편을 상영하건 단 한편을 하건 그건
영화관의 자유이다. <쉬리>의 성공은 모든 영화관의 면죄부가
될 것이며, 동시에 다른 모든 한국영화의 저주가 될 것이다. <쉬리>가
그 스스로를 부르는 블럭 버스터(Block Buster)라는 말은 1975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죠스>로 미국에서 ‘절대 불가능한 흥행의 한계’라고
불리운 1억불의 블럭을 깨트리면서(bust) 나타난 흥행용어이다. 문제는
이 놀라운 성공은 헐리우드에서 조차 모두들 경계하는 위험한 경향을
가져왔다. 많이 벌기 위해서는 많이 투자해야하며, 많이 투자한 영화가
안전한 자금 회수를 위해 일시적으로 많은 영화관에서 개봉하는 전국
체인망방식의 상영시스템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헐리우드 영화가
메이저 영화사를 중심으로 영화관에 대한 독과점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영화 편수는 급격히 줄면서 그 다양성이 사라지고
소수의 영화들 사이의 나눠먹기가 시작되었다.
경제논리에 무너지는 문화의 진정성 말하자면 <쉬리>는 일종의 신호탄이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돈과 경쟁의 세계에로
빠져들게 만드는 게임에로의 초대이다. 이 게임은 두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 없다는 것이고, 그 두번째는
점점 더 판 돈이 경쟁하듯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결국 승자는 가장
많이 가진 자 일 수밖에 없는 도박판의 논리로 변질한다는 것이다. 만일
영화가 그저 오로지 돈만이 목표이고, 영화가 영화관에서 성공하는 길만이
세계화이며 경쟁력이라면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문화이고, 더 나아가 우리들의 삶에 관한 진정성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영화가 문화이고, 더 나아가 우리들의 삶에 관한 진정성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영화가 대중예술이라는 말처럼 우리 시대의 거울처럼
비추는 자기 반영성이라면 이렇게 자본과 협잡을 벌이도록 방치해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더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우리들의
동시대를 정확하게 비추는 거울의 모습이라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경제파산을
맞이하고, 매일 신문에서 아침마다 확인해야 하는 돈을 향한 그 끔찍한
일상생활 속의 대중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여기 이렇게 영화 시장 속에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대중적인 성공은 파시즘의 대중적인
증거이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