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문제와 변화,
개인의 꿈, 욕구, 갈등 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 연극의 현주소에
대한 실망과 불만의 대안으로 "새로운 연극, 새로운 제작방식"을
표방한 변방연극제 그 첫 회의 막이 2월 24일부터 3월 14일까지 아리랑
소극장에서 올려졌다. 이 연극제에는 40분 안 밖의 공연시간을 갖는
여덟 작품이 참가했다. 이 연극제는 관객 마케팅에도 적극적이어서 무료공연,
낮 공연의 입장료 할인, 패키지 티켓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21세기 주역이 될 젊은이들의 연극제 연극은 그 속성상,
쉽게 비교되는 영화에 비한다면 발전이 느리다. 이 점은 연극이 살아있는
인간을 재료로 하는 것이기에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 연극을
보면 실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이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소재는 거의 고갈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복잡하고 신기한
영상매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한 편의 연극에 담긴 어떤
내용도 새롭거나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고민, 즉 형식의 실험이 필연적인 귀결일
것이다. 이미 1900년경의 연극 개혁 운동과 1960년대를 분수령으로 한
서양의 연극 실험과 같은 시대는 아직도 우리에게 오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서양인들의 행위나 방법론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곧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우리 연극은 여러 면에서 고뇌하고 반성해야
하리라고 본다.
제 1회 변방연극제
그런 의미에서 이번 변방연극제는
결과의 성공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그 시도만으로도 매우 신선하다. 참여자들이
모두 아직 큰 이름을 얻지 못한 젊은이들이고 이들이 결국은 21세기의
주역이 될 것이므로 더욱 그렇다. 이번 경우는 오프닝이기 때문에 그
준비 관계로 특정 대학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다음 회부터는
누구든 "새로운 방법"으로 연극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나이와 출신을 불문하고 오픈 하겠다는 것이 예술 총감독
최치림교수의 말이다. 참여자들의 젊음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고, 이번 연극제 출품작들이 갖는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언어를
가급적 배제한, 신선하고 풍부한 상징기호의 사용, 그림과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실험성에 있다 하겠다. 실험연극이 갖는 관객과의 교감
면이 많이 고려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애써 전후를 설명하거나,
메시지를 억지로 주입하려 하지 않았던 점이 이 연극제 공연작들의 가장
큰 덕목이었다. 소재로는 주로사회 문제, 개인의 문제, 개인간의 관계의
문제 등이 등장했다. 인상적이었던 공연 몇 편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선함과 새로움의 실험극 일 나간 부모를
열쇠가 채워진 지하 셋방에서 기다리다 화재로 죽음을 당한 어린 오누이의
실화를 소재로 한 [우리들의 죽음](엄국천작/김성환연출)이 사회 문제를
다룬 것으로는 유일한 작품으로 가수의 노래와 해설, 그리고 연기가
작품의 틀을 이룬다. 붉은 조명 아래 놓인 붕어 어항과 인형 두 개는
갇힌 오누이의 상징이고, 널어놓은 빨래같이 늘어뜨려진 휘장은 넋전을
연상시켜 오누이의 죽음을 예견시킨다. 오누이의 연기는 투명막 뒤에서
이루어짐으로써 그들의 갇힘을 뚜렷이 한다. 이 막은 또한 현란한 광고,
정치가들의 모습을 슬라이드로 비추는 데 이용된다. 슬라이드로 투영된
사진들로 해서 어린 오누이의 상황은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이 부각되며 소외된 계층을 의식 못한 채 살고 있는우리들을 일깨운다.
화재는 가수가 재털이에 있는 것을 태우는 대유법으로 상징되고, 오누이의
죽음은 두 인형을 안으로 들고 들어가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30분도
채 안되는 시간을 노래와 해설, 절제된 상징으로 채운 좋은 공연이었다.
딱히 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보기는힘들지만 바깥세계와 만나기
이전 자기만의 공간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야!?](작,
연출/권선오)이다. 무대엔 팔각형의 투명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배우(황승현)는
그 속에서 마임의 연기를 한다. 음악과 조명, 절규하는 몸짓은 분열된
자아를 형상화하고, 자신의 옷으로 요모조모 궁리해 인형을 만들어 가고
그것을 가지고 놀며 만족해하는 모습은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원형을 보여준다. 인형과 함께 배우가 잠이 들자 무대는 암전된다. 깨어난
후 들리는 노래소리에 배우는 관객을 본다. 타인을 의식하고 인식하는
순간이다. 객석이 환하게 밝혀지자 배우는 자기만의 팔각형 공간에서
나온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심리치료사인 도날드 위니캇의 정서 발달
이론을 바탕으로 했다는 이 작품은 개인의 발달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작은 욕심만으로도 인간의 원형적 모습을 보인 보편성을 얻은 수작이었다.
특히 아이같은 천진성을 띤 황승현은 매우 좋은 캐스팅이었다. [너
- 생각되어진다](장은미작/김종우연출)와 [상처와 풍경](작, 연출/위성신)은
개인간의 결국 해결할 길 없는 소외를 다룬 작품들이었다. [너 -...]는
얼굴에 얼룩이 있는 여자와 마음속에 얼룩이 있는 남자를 설정함으로써
둘 사이의 영원한 불연속선을 분명히 한다. 무대는 물론 객석까지도
흰 천으로 싸고, 그런 무대에 길게 늘어뜨린 작은 등들의 꺼짐과 켜짐으로
두 사람의 내면의 변화를 형상화한 점, 무대의 흰 벽에 손놀이의 그림자로
나타내는 두 남녀의 유희 등이 간헐적인 대사의 여백을 충분히 메운다.
붉은 옷의 여자와 검은 옷의 남자를 비롯해 무대 위 여러 형상물들의
콘트라스트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인의 - 그것을 꼭 남녀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 소외를 잘 형상화한 공연이었다. [상처와
풍경] 역시 비슷한 작품이었으나 그 터치가 경쾌해서인지 관객의 호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었다. 여러 종류의 수많은 술병, 음료캔 등 두
남녀의 만남의 흔적들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 과거의 이야기들을 반추하는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은 특히 전반부의 음악이 좋았고 질펀하게 늘어놓은
병들과 마른 꽃, 그리고 강물을 대유법으로 나타낸 비닐 물통 등이 던져주는
상징적 기호가 매우 친근했다. 그러나 사랑의 상처를 인스턴트
식품 속에 갇힌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낸 것은 문명의 현실을 어떻게든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감의 소산인 것 같아 쉽게 공감하기 힘들었다.
남자로 분한 김철홍의 능청스런 연기가 작품에 편안함을 더해준 요소였다. 연극의
길을 가고 있는 젊은이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콘서트 -
두 개의 가면을 갖는 댓가](작,연출/강화정)는 관객을 배우로, 때로
배우를 관객으로 만듬으로써 실험극이 가져야 할 미덕은 갖추었으나
보편성을 찾기 힘든, 마치 마스터베이션의 일면을 본 것 같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다른 공연들에 비해 해석의 다양함을 제공했고 배우들(정성호,
김현아)의 크기가 무대를 어느 정도는 압도했던 공연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