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음악

 
 
개혁에서의 문화예술계의 소외, 스스로의 반성

 

우광혁(음악평론가)

 

 
아직도 진행중인 정부의 구조 조정과 개혁은 그 시인이 제시된 지난 날 초부터 우리나라를 후끈 달궈놓고 있다. 큰 눈으로 보면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기획 조정 기능과 그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왜신 기능이 어디에 놓여지는가의 문제가 되겠지만 자세하게 보면 그속에도 수많은 기관과 기능의 **이 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그래서 개혁 시인에 찬성하는 사람이나 결사 반대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개혁적인 입장으로 배도되거나 밥그릇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그 복잡한 현장에서는 예술인들의 목소리도 높았다. '21세기  문화의 세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대형 현수막이 도시에 휘날리고 있고, 또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21세기를 위한 개혁의 중심에서는 문화예술계를  소외시켰다는 이야기다. rrjt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개혁안에 대한 공정회의 토론자 명단만 보더라도 경제계 인사와 법적계, 행정계통의 인사들로만 구성되었고 심지어 공청회의 시안 발제자는 문화와 관련된 부분을 읽지도  않고 넘어가 버렸다. 시안을 발췌하여 읽다가 문화부문에 가서는  '두 페이지 넘겨서'라고 하면서 다음 부분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21세기  우리나라의 문화는 그 '두  페이지 넘겨서'라는 말 한마디로 개혁작업을 끝냈고, 양식있는 예술인이라면 그  한마디로 사형선고를 들은 것보다 더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구조조정과 개혁에서 소외된 문화계
시안 작업에서도 문화예술계 인사는 소외되었고, 그 시안을 놓고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소외되었으며, 시안 발제에서는 아예 읽을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취급받은 것에 대해 예술계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가.  누구에 대한 분노인가. 대통령인가. 장관들인가. 아니면 공청회에 나왔던 토론자들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분노하는 것은 문화예술계이지만 그 분노의 대상도 결국은 문화예술계이다.

 

문화계 스스로가 원인제공

이 말은 무슨 뜻인가.구조조정과 개혁작업을 하는 입장에서 정부가 문화예술계 인사를 참여시키고 그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정도의 기본 전제가 있어야 한다. 첫째는 문화예술계가 평소에 무게있는 말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게가 있되,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무게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무게가 있어야 한다. 흔히  일반사람들은 '예술가들은 고집이 세고, 단순하고, 예민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이 말 자체는 그다지 좋은 뜻을 담고 있지 않지만 그 말을 쓸  때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예술가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예술 창작 작업의 성격이 워낙 일상사들과는 다르므로, 그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본외 아니게 예민해지기도 하고 단순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술가의 고집은  예술에 대한 소신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술가들은 그들의 기행마저도 이해받을 수 있었고 그런 흐름에 편승해서 비양심적인  예술가들은 때로 오만함까지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예술가들의 날은  '자기 입장에서만 말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말하는 사람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무게있게 말하지만  듣는 사람이 보기에는 어느정도의 단순함과 고집과 예민함이 배어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의 시점에서 예술가들의 말은 '반드시 들어두어야 하는  중요한 말'이 되지 못하는  것같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개혁의 시점에 있다면 자기 주장만 앞세우고 단순하고 예민한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일 것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일 것인가. 그리고 일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예술가 우리들의 책임이 아닌가.둘 째로는 개혁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이 문화와 예술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아마추어 예술가가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예술의 속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술을 보존하고 부흥시키고 전파시키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것이고, 그것이 개혁의 시안에서 반영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추어일 망정 예술가라고 불러줄 만한 수준의 주도급 인사가 현실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우리나라처럼 전업직장이 일반화된 나라에서 일을 한다는 말
은 '자기 시간이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 실제로 직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남는 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입과 관련되지 않은 것들로부터 소외당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르되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고 게다가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반 직장인들은 수영장이나 테니스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음악회장이나 무용 공연장으로부터는 더욱 멀리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 소외현상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심하다 중요한 만큼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바로 그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움직여 나간다. 그러니까 문화예술이 그 사회의 개혁과정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그러나 그것이 이* 본인들의 책임인가. 그들이라고 악기 하나라도 다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보지 않았겠으며, 아름다운 시처럼 멋진 글을 쓰고 싶지 않았겠는가. 아무  종이에나 그려대도 멋진 그림이 그려지는 솜씨를 갖고 싶지  않았겠는가. 합창단에 들어가 아름다운 소리로 화음을 맞춰 노 래불러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문제는  누가 쉽고 바르게 가르쳐준 적이 없었고, 또 아무데서나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이 문제로 역시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우리에게 화살이 돌아오게 된다. 문화예술에 대한 교육과 사회적 보급의 문제에서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예술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개혁의 주체자들이 예술에 관심을 갖게 해야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개혁을 이끌어 나가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문화예술의 중요성과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일하기에 바빠 시간을 못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달리 취미활동을 할 만한 시간이 없었고, 개인의  취미를 즐기고 있기에는 그들에게 맡겨진 사안이 너무도 중요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예술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것을 예술가들은 그동안 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을 다그치고 있다. 예술을 모르고 있다고...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말이 있다. 그러다 보니  우물을 파면 목이 마른가보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세상에는 남의 목이 마를까봐 우물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예술가들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우물을 파서 남의 목을  축이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