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뷰 - 문 학


 문학을 통해 본 한자 병기 문제

 우리사회의 미래를 어떤 사회로 두느냐는 문제와 관련

 

서경석(대구대 국문과 교수)

 

  한자 병기(漢字 倂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찬반  양론이 한창이다. 그런데 대개 이 논의를 그 실용성 여부라는 잣대로 판단하는 것 같아서 의아스럽다. 차라리 우리말의 역사와 현실을 짚어 보면서 이를 토대로 언어 정책의 방향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점은 우선 순 우리말과 글로 언어생활을 할 수 있는 곳까지 다가가자는 주장에서부터 한자어를 사용하되 한자 병기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에까지 걸쳐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공통적인 입장은 민족 주체성, 언어의 국적성 등에 모아지는 듯하며 현재의 우리 언어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듯하다. 반면  한자 병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말에서 한자가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현실적 위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한글과 한문이 독립적으로 공존하던 때가 있었다.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부터 개화기 전까지의 시기가 그러할 텐데 이 시기의 한문이 주로 사상적 측면을 감당하는 언어였다면 한글은 정서적 측면을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우리 한글에는 외국어와는 달리 감각이나 정서에 관한 어휘가 많다거나 개념어가 거의 없다는 사정도 이 점에 기인하다. 그러나 양반 계급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언어였기  때문에 그리고 생활 현장에서 쓰인 언어였기에 한글은 풍부한 언어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자는 사상적인 측면을 담당했었기에 그 깊이에 있어서는 한글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두 언어의 장점을 통일시키려 했던 것이 아마도 국한문 혼용체 문장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일제의 식민지 언어정책으로 한글 도태

그 시도가 유길준은 {서유견문}이라는 책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깊이와 폭을 함께 감당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드러난 저작이라 할만한데 이러한 노력은 1908년 일제의 식민지 언어정책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조선내의 모든  관보가 일본식 국한문 혼용체로 대체되어 출판되면서 우리식 문자 행위는 어려운 국면을 맞이한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요즈음 유행하는 국한문 혼용체가 전부 일본식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과 중국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한자어의 쓰임새에 있어 중국보다는 일본  쪽에 우리가 훨씬 가깝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개화기에 {독립 신문} 같은 순 한글 신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서구의 영향  속에서 토론이나 시사 설명에 치우친 것이어서 우리 언어 생활의 폭을 모두 감당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사실 식민지 당시 지식인들은 대개 일본 유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일본식 국한문 혼용체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일제하 신문에 흔히 보이는 일본식 어투는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춘원은 그의 [사랑인가]를 일본어로 발표했으며 이상 역시  그의 대표작 [오감도]를 일본어로 먼저 발표했었다. 김동인은 자신의 창작의 어려움을  "일본어로 구상해 놓고 한글로 바꾸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그 뿐인가. 염상섭은 그의  [표본실이 청개구리]에 아예 드러내 놓고 일본 한어 어휘를 구사하고 있다.

 

홍명희의 「임꺽정」, 시대적 응전

사정이 이러했을 때  홍명희의 {임꺽정}  같은 작품은 그 의미가 새롭다.  조선적인 정조를 드러내려 노력했다는 그의 언급 속에서도 확인되듯이 이 작품은 그 내용 뿐 아니라 그 표현 형식에서도 조선적이다. 이 때 조선적이라는 점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한 평론가가 지적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즉 이 작품은 눈으로 읽기보다는 낭독했을 때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에 들어있는 수많은 대화와  간결한 문장들은 낭독에 하기에 훨씬 손쉬운 것이었다는 점, 더 나아가 우리말의 특징 자체가 실생활과 결부된 살아있는 대화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주어의 생략이나, 문장 자체의 완결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행간의 맥락에서 풍부하게 암시되는  그 의미망들은 우리말만의 장점이라  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일제하 조선어 말살정책기의 전야에 이런 작품을 쓴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대한 강력한 응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유어의 세계가 그  후 어떤 국면에 처해있는지는 모두가  추측할 수 있다.

 

고유어와 혼용어의 대립

말하자면 토착어의 세계, 즉 고유어의 세계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던 위의 혼용체의 세계의 대립이 표면화된다. 해방 후 영미 번역문의 영향을 받은 문체가 다시 등장하면서 이런 언어 습관은 다시 우리 고유어, 민족어의  세계와 대립한다. 문학 작품으로 한정하자면  사투리를 많이 구사하는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고유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사투리를 구사하는 작중 인물들의 역할이나 생각은 암시되는 것이지 언어로  표명되지는 않는다. 도시 생활에 물든 현대인들의 여러 사고나 감수성이 우리의 고유한 한글로는 표명되지 않기에 이런 고민에 빠진 작중 인물들은 대개 '인공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최근 들어 젊은 작가들의 문체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른 바 사이버 세대인 이들의 언어는 국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국적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내적인 필요에 의해서이다. 자신들의 언어적 상상력을  표명하는 도구로는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이제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있다. 더구나 중고등학생들이 쓰는  말들에 귀기울이다 보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다른 차원에 이미 도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위한 정책의 필요
이런 맥락을 보자면 한글, 즉 우리의 고유어가 지니는  의미는 현상적으로는 과거보다 많이 퇴색한 것 같다. 즉 일제하처럼 고유어와 외국 문체의  대립자체가 민족적인 것과 외세와의 대립이라는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대립,  혹은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처럼 보일 지경이니 말이다.따라서 현재 언어 정책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이 단지 한자 병기의 문제에 한정된다고 보는 것 자체가 편협한 시각의 산물일 수 있다. 그간 한문이나 외래어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했던 역할이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움에  응전할 수 있는 인공적인 언어를  모두 염두에 두는 언어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정책들은  물론 실용적인 잣대에 의해
결정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떤 사회로 두느냐 하는, 방향성의 문제와 긴밀히 관련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