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정부와 민간의 효율적인 분업체계
 

 

장 원 재  런던대학 로열헐러웨이칼리지 연극과 박사과정

 

세계 제 1의 연극도시
영국 런던이 세계 연극계의 메카라는 주장에 대해 유럽 평론가들 중 대다수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런던 시내에는 약 300여 군데의 공연장이 있고, 최소한 150편이 넘는 연극이 매일밤 무대에 오른다. 공연장의 숫자나 제작 편 수가 유럽이나 세계의 여타 도시를 압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이 런던을 세계 제 1의 연극도시라고 평가하는 기준은 아니다. 런던 극장가의 진면목은 다양한 면면의 작품들이 매일밤 무대에 오른다는 데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부터 낭만주의 시대의 연극이나 현대극, 그리스 고전으로부터 각종 전위극이나 실험연극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형태의 공연이 런던의 무대를 다채롭게 수놓는다. 아무리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관객이라도, 적어도 입맛에 맞는 레퍼터리를 찾을 수 없어서 극장을 가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런던의 극장가는 극장의 규모나 운영방침에 따라 대략 셋으로 나뉜다. 500석 이상, 연중 무휴 공연을 원칙으로 하는 웨스트앤드극장과 그보다 다소 작은 규모로, 기획공연 위주로 운영되는 오프 웨스트앤드극장, 그리고 맥주홀 2 층이나 다락방 같은 공간에서 저예산 연극을 주로 공연하는 프린지극장이 그 면면이다. 이 세 부류의 극장은 상호간 인적·물적 교류의 물꼬를 트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예술적 지향점이나 대상 관객층이 몹시 다르다. 논점을 단순화시켜서 이야기하자면, 웨스트앤드는 대규모투자-대규모수익이라는 상업논리가 지배하는 곳이요 오프 웨스트앤드는 고급관객을 위한 고급연극의 공연이라는 예술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며 프린지 극장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실험논리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경향은 본질적으로 혼재한다. 웨스트앤드에서도 전위적인 실험극이 공연되는 일이 있으며, 프린지 극장가에서도 나름대로 상업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다양한 종류의 연극이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적 저력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논의의 초점을 웨스트앤드의 극장들에  한정해 놓고 이야기를 진행해 보자.  소유주체와 공연 레퍼터리를 중심으로 분류할 경우, 웨스트앤드의 극장은 민간소유 상업극장, 민간소유 공공극장, 정부단체 소유 공공극장으로 잘게 나뉜다. 대부분의 웨스트앤드 극장은 민간소유 상업 극장이다. 이 곳의 주 레퍼토리는 뮤지컬이다. 민간 상업극장이 뮤지컬을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타 연극 장르 중 뮤지컬의 기대이익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 관객을 대상으로 흥행을 할 수 있고, 몇 년 동안의 장기흥행을 통한 안정적  수입 확보를 꾀할 수 있는 연극장르는 뮤지컬이 유일하다.

 

민간 극장, 지속적 이윤의 창출

민간 상업극장을 움직이는  핵심주체는 프로듀서다. 이들은 연극을 '기타공산품보다는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끊임없이 판매하여 이익을 남겨야 하는 상품'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프로듀서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지속적인 이익의 창출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작품의 성공이란 경제적 성공을 의미한다. 뮤지컬은 대규모의 자본투자가 선행되어야 하는 장르이므로,'물건을 제대로 뽑아내지 못할 경우'엄청난 재정적 손실과 회사의 파산이라는 위험부담을 감수하여야 한다. 한 번의 흥행 대실패는 프로듀서의 능력과 신용도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대재앙이다. 프로듀서에게 기업가적인 경영마인드 외에 예술가적 안목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뮤지컬 제작에 있어서 예술적 완성도는 핵심논의의 대상이 아니며, 예술적 논의는 보다 나은 상품을 만들기 위한 기술적 차원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웨스트 앤드 뮤지컬의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연기력이나 무대장치, 배우들의 가창력 등이 상당수준에 도달해 있지 않는 한, 불특정 다수의 관객으로부터 지속적인 호응을 받는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관객들로부터 지속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는 한, 대규모 투자를 통한 대규모 이익의 창출이라는 뮤지컬의 제작의의를 실현할 길은 없다.민간소유 공공극장은 웨스트앤드극장 중에서 비상업적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을 말한다. 민간소유 상업극장보다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관객에게 초점을 맞추고, 흥행수입 외에 민간단체나 기업으로부터 스폰서를 받아 수지타산을 맞춘다. 근현대의 화제작들을 주로 공연하는 개릭극장이나 18~19세기의 고전과 근현대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윈드햄극장, 평론가들로부터 '국립문예극장'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부여받은 로열코트극장 등이 대표적인 민간소유 공공극장들이다. 위 극장들은 뮤지컬을 공연하지 않는다. 극장의 이미지 관리에도 문제가 있고, 본질적으로 상업적 장르인 뮤지컬을 공연하면서 사회적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민간소유 공공극장 중 가장 괄목할 성과를 올린 곳은 로열코트극장이다. 로열코트극장은 1956년 개관 당시부터 '새로운 극작가를 발굴하고 새로운 연극적 성과를 무대화한다'는확고한 기치를 내걸고 공연 레퍼터리를 선정 해왔다. 전후 영국연극의 새 장을 열었다는 존 오스본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비롯, 아놀드 웨스커, 데이빗 헤어, 에드워드 본드, 데이빗 에드거, 카릴 처질 등이 로열코트극장을 통해 신작을 발표하고 극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베케트나 이오네스코, 숀 오케이시의 말년 작들은 물론, 소잉카나 무스타파 마츄라, 아돌프만 등의 제3세계 극작가들도 로열코트 무대를 통해 유럽에 알려졌다. 피터 부룩의 문제작 <마하바라타>의 초연 무대도 로열코트극장인데, 아홉시간이 좀 넘게 걸리는 이 공연의 문화적 의의를 인정하고 기꺼이 무대를 내 준 극장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로서는 하나의 경이였다. 로열코트극장은 1980년대 초반 웨스트앤드의 듀크 오브 요크극장을 인수, 공연 레퍼터리 중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을 이곳에서 장기 공연하는 이원집정체제를 완성하였다. 최근 소유 주체가 바뀐 올드 빅 극장의 향배도 주목의 대상이다. 한 때 국립극장으로 쓰이다 민간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었던 이 유서깊은 극장은, 소유주가 누적 적자를 견디다 못해 건물을 다른 용도로 개조한  뒤 매각할 예정이라고 발표,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었다. 연극 평론가와  연출자, 배우들은 '올드 빅 살리기 협의회'조직, 전방위적 캠페인을 전개한 끝에 '유서깊은 극장을 본래 용도대로 사용하는 것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최선의 방안'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올드 빅은 현재 연극인들이 중심이 되고 각종 사회단체가 참여한 콘소시엄 형태의 법인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극장의 소유권을 인수하고, 연출가 피터 홀에게 극장운영의 전권을 위임한 상태이다. 자본과 상업논리에서 한발짝 물러선 이 초유의 실험이 과연 얼마만한 연극적 성취를 일궈낼 수 있을런지를 런던연극계 전체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공공극장, 연극을 상품이 아닌 문화적 공공재로 인식

정부단체 소유의 공공극장은 테임즈 강 둑에 자리잡은 국립극장과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런던 본기지인 바비칸 센타 등이 있다. 정부단체 소유 극장의 특징은 연극을 문화적 상품이 아닌 문화적 공공재로 보고 공연을 제작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들 극장은 민간극장들에 비해 입장료를 낮게 책정한다. 그리고, 민간극장으로서는 도저히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는 고전이나 대작들을 주로 공연한다. 연극 교과서에 언급되는 역사적인 작품들을 런던에서 심심찮게 관람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단체 소유의 극장을 움직이는 핵심주체는 예술감독이다. 예술감독은 작품의 선정과 기획, 연출가 선정과 배우들의 오디션에 이르기까지연극 제작과 관련된 제반 업무를 모두 관장한다. 프로듀서에게는 대차대조표라는 성적표가 있지만, 예술감독에게는 예술평가위원회라는 준엄한  판관이 있다. 연극평론가, 관객대표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와 사회 문화적 공연의의에 초점을 맞추고 예술감독의 작업을 평가한다.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된 압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대신, 예술감독은 자신의 명예와 신용을 담보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는 것이다. '실패한 작품'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작품에 참여한 연출가나 배우들의 예술적 신뢰도에 금이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은 물론, 작품의 제작 지휘를 맡은 예술감독의 안목 자체가 불신임 받았다는 뜻임으로 그 파장이 적지 않다. 정부소유 공공극장에도 나름대로의 냉혹한 경쟁논리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기능과 역할의 배분
싼 값에 양질의 공연을 제공하는 외에, 정부단체 소속 공공극장이 아니면  수행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들이 있다. 연극교육, 관객조직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사업이 그것이다. 정부단체 소유 공공극장들의 작품들은 거의 단 한 편의 예외도 없이, 런던 공연을 마치고  지방을 순회한다. 지방 도시들을 순회하는 이외에, 상주인구나 문화적 배경으로 보아 최소한도의 운영비조차 기대할 수 없는 산간벽지나 도서지방까지 들어가 런던에서 공연한 것과 꼭 같은 프로그램을 상연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면단위까지 들어가 공연을 하는 셈이므로, 순회공연기간이 일 년을 넘어서는 일이 다반사이다.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경우, 장기적으로 바비컨 센터의 공연을 현재의 절반 정도로 줄이고, 잉여 역량을 순회공연에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공연경비나 투자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다수의 관객에게 연극을 제공하고 미래의 관객을 조직하는 일은 정부단체 소유 공공극장의 신성한 의무라고 선언한 것이다. 정부단체 소유 공공극장은 민간극장에  비해 턱없이 소수이지만, 그 문화적 기능과 역할은 런던 연극계를 떠받치는 양대 산맥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연극을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제도로 존치시키고, 민간소유 공공극장의 유지·운영을 측면지원하는 연극적 저변이기도 하다. 정부단체 소유 공공극장과 여타 민간극장은 따라서 상보적으로 공생하는 문화기관이다. 런던을 세계연극의 메카일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종류의 공연이 동시다발적으로 무대에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원동력의 핵심은 정부단체 소유 극장과 민간극장의 이같은 이상적 양립에 있다. 그리고  행복한 역할분담에 의한 이러한 이상적  양립이야말로 연극 자체를 살찌우고 문화발전에 창조적으로 기여하는 가장 효율적인 분업체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