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정부의 풍부한 지원, 생활속의 공연문화

 

- 이 상 면   연세대 미디어아트 연구소 연구원

 

   유럽 국가들 가운데서 공연예술의 인프라 구조가 전국적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튼튼하게 구축되어 있는 나라는 독일이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풍부한 문화 후원을 뒷받침해주고 있기에 가능한데, 독일은 공연장의 시설, 운영, 재정 지원의 측면에서 모범적으로 갖추어진 극장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인구 20만 이상의 도시 어느 곳에나 있는 시립·주립극장들과 음악 연주장에서 활발한 공연활동이 펼치지고, 연극제 혹은 예술축제들이 빈번히 개최되고, 평균 관객 점유율은 70% 이상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오페라 극장이 가장 많은 나라는 독일이며, 유럽에서 오케스트라단이 가장 많은 곳도 독일이고, 서양 고전음악의 종주국답게 고전과 현대음악 연주회가 왕성하게 펼쳐진다. 이런 점에서 독일에는 ‘건실한 공연문화’가 확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공연예술을 연극에 국한시켜서 독일에서의 공연제작, 극장운영, 관극문화에 관련된 인프라 구조에 대해 살펴보자.

 

연극제작(생산)과 지원제도
연극 공연은 거액의 제작비를 필요로 하며, 비상업적인 공연을 보여주려고 할 때에 극단 측의 재정 부담은 매우 커진다. 이러한 연극 제작을 활성화해 줄 수 있는 요인은 안정된 재원(財源)의 확보이다. 각 지방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독립성을 유지했던 독일어권(독일,오스트리아)에서는 오늘날에도 지방분권제에 의해서 각 자치정부가 독자적으로 공연예술 단체를 후원한다. 그래서 독일의 후원방식은 ‘지역적 후원’ local subsidy 이라고 불리는데, 공공극장(국립.주립,시립극장)은 예산의 거의 전액을 주정부,시정부로부터 받는다.각 자치단체마다 후원율은 다르지만, 독일의 공립극장들은 1994 ~ 1996년 기간동안 연간 총지출의 75 ~ 95% 가량을 지원받았다. 또한 사설극장들도 지원금을 받는 것이 독일적 지원방식의 특징이다. 베를린의 경우, 1994~96년 유명한 샤우뷔네나 베를린 앙상블은 무려 총지출의 83~88%를 지원받았고, 여러 소극장들도 50~75% 가량 지원을 받았다. 이것은 독일어권에서 중세부터 내려온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문화 보호와 육성에 대한 통치자의 책임이 강조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문화예술은 ‘공적(公的)인 임무’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는 공적인 지원으로 인해 공연예술이 영리 목적에 치우치지 않고 상업화를 방지할 수 있으며, 국민의 정신 교육과 정서 함양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는 문화적 전통이 독일어권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에서의 연극문화는 19세기 초반이후 괴테와 쉴러 같은 문호에 의해서 확립되었으므로 공연예술기관을 교육장소라고 보는 전통이 생겨났다. 그래서 독일의 공립극장과 지원을 받는 사설극장의 연극은 교양연극 Bildungs-theater 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훌륭한 문학작품을 연극화한 문학극 Literaturtheater 이 많다. 공립극장의 연극인, 행정직원들은 준공무원의 신분을 지니며, 이 극장들은 여름 휴가 기간 두 달만 제외하고 연중 10개월 동안 거의 매일 공연행사를 진행한다. 극장들은 보통 2~3개 무대공간이 있어서 대극장 공연만이 아니라, 소극장에서 실험적 공연이나, 무용단의 공연이 진행된다. 슈투트가르트나 뮌헨의 국립극장은 규모가 특히 큰 편이어서(두 건물) 연극·오페라·무용 공연이 이루어진다.(자치단체에서 지원받는 오케스트라단의 정기 연주는 1주일에 2회씩 진행된다.) 이렇게 여러 단체를 거느린 공공 극장에 소속된 모든 인력(예술인, 스탭 및 행정직원)의 생계 보장을 마련해 주면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보장해 주려면 사실상 막대한 지원금이 소요된다.여기서 임금 수준이 높은 독일에서 공립극장 연극인의 인건비는 총제작비의 50~55%에 육박한다. 하지만 공립극장들의 재정 자립도는 11~15%에 불과하므로 이 극장들의 수익성은 매우 낮은 편이다. 그래서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공립극장에 대한 엄청난 지원금이 문제시되어 도마 위에 오른다.통일이후 90년대 초반 긴축 재정이 요구되면서 서독 지역의 각 주와 시정부에서는 문화비를 삭감하여 연극 제작이 위축된 적이 있었다. 특히, 공연장이 많은 베를린에서는 통합이후 시정부에서 동서베를린의 모든 극장들을 후원 할 수 없게 되자, 서베를린 쪽의 공연장 두 곳(쉴러 극장, 자유민중극장)에서 극단을 해체하고, 흥미 위주의 뮤지컬과 무용극 공연을 위한 대관 극장으로 전용시켰다. 또한 인구 350만의 도시 베를린에만 세 오페라 극장이 있는 것도 삭감의 대상이 되었으나, 베를린이 수도로 결정된 이후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되었다. 베를린의 다른 극장들과 타지역의 공립극장들은 90년대 후반기 들어서 통일 초기 단계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극복되면서 공연활동이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그러면, 연극제작에서 주체가 되는 연극인들의 양성은 어떠한가. 독일에서는 공연활동이 활발한 만큼 우연치 않게 유럽에서 저명한 연출가들이 여러명 배출되었고, 연기자·스탭(무대미술가 등)의 수준도 높은 편이다. 이들이 교육받는 곳은 주로 예술대학의 연극과와 전문연극학교이다. 보통 중도시 이상 규모의 도시에 하나씩 있는 이런 교육기관들도 독일에서는 국립이나 주립이므로 학생들은 등록금 부담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다.(다만 정원이 소수로 제한된 예술대학의 입학은 대단히 어렵다.)

 

극장과 축제행사의 운영
인구 8,000만의 독일 전역에는 160개의 공립극장(국립/주립/시립극장)을 포함하여 600여 공공 공연장과 180여 사설극장, 120여 음악극(오페라·뮤지컬) 공연장이 있으며, 146여개의 직업 오케스트라단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극장들이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독일에서는 역사적으로 지방분권제의 전통이 있어서 각 지역의 중심 도시에 유수한 극장들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 베를린 외에도 함부르크, 뮌헨, 슈투트가르트, 드레스덴 등의 지방의 중심 도시에서도 수준 높은 공연들이 제작된다.
문화의 중앙집중화를 피하고 지방 분산을 통해서 수도권 바깥 지역의 시민들도 얼마든지 훌륭한 공연예술 문화를 향수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극장들과 연중 10개월 동안 공연이 진행되는 극장을 운영하려면 극장 내에서 여러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문화행정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그에게는 예술적 안목과 시대감각, 공평무사한 태도, 행정능력이 요구된다. 보통 독일의 공립극장은 예술감독(보통 연출가)의 권고로써 고전과 현대작품, 그리고 최근 작품들로 주된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나머지 시간은 실험극, 이벤트 공연 및 행사, 외부 단체 초청 공연으로 채워진다.문화행정가는 이들 프로그램 가운데에서 자기 지방 극작가와 연출가를 배려하기도 하며, 자기 극단의 성공적인 작품을 갖고 타지역으로 가는 방문공연도 기획한다. 또한 외부에서 초빙된 연출가에 의한 객원 연출도 있어서 다양한 공연을 보여주도록 노력한다. 예를 들어, 저명한 미국 연출가 로버트 윌슨은 80년대 중반 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독일의 여러 극장에서(함부르크의 탈리아 극장, 베를린의 샤우뷔네 등) 객원 연출로 활동하면서  독특한 연극미학을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으며, 베를린의 헵벨 극장이 그에게 거액을 투자하며 작품을 위촉한 좥파우스투스 박사 빛을 밝히다좦(1992)는 성공을 거두었고, 외국 순회공연까지 이루어졌다.정기적인 공연행사 외에도 연극제, 예술축제행사 같은 문화적 이벤트가 연극문화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한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는 각기 특색있는 축제가 거행되는데, 3년마다 도시를 바꾸어 가며 열리는 ‘세계연극제’Theater der Welt,  2년마다 열리는 유럽 최신 희곡·연극축제인 ‘본 비엔날레’Bonner Biennale, 그리고 매년 열리는 행사들로는 지난 1년 시즌 동안 독일어권 무대에서 화제작·문제작을 초청하는 ‘베를린 연극제’, 독일어권에서의 주목받는 최신 희곡들의 공연축제인 ‘뮐하임 연극제’와 ‘뮌헨 오페라 축제’ 등과 같은 연극행사들이 있다. 음악 연주회를 중심으로 무용, 연극공연이 곁들여지는 종합적인 축제행사들로는 ‘베를린 축제’, 서부 지역의 ‘루르 축제’, 남동쪽 호숫가에서의 ‘브레겐츠 축제’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잘츠부르크 축제, 비엔나 축제주간 등이 열려서   그리고 특별히 축제행사가 거행되지 않는 관광지, 휴양지(하이델베르크, 바덴바덴 등)에서도 수시로 그 지역의 무명 연주자들이나 예술대학생들의 여름 음악캠프 연주회, 혹은 연극공연이 있어서 시민들은 어디가나 손쉽게 공연행사를 접할 수 있다. 음악과 연극은 그들 주변 가까이에 와 있으며,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관객, 관극 문화관객은 공연예술의 수용자이자 소비의 주체이다. 아무리 훌륭한 공연이라도 관객이 없으면 공연의 성과는 미미해지므로, 오늘날에는 관객 유치를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이 개발되고 있다. 독일의 공립극장들은 공공 지원을 받으므로 입장권 값이 저렴한 편이고(7,000~20,000원), 재정 수입을 입장권 판매에 의존하는 비율이 매우 낮으므로(10% 이하), 관객을 확보하는 전략도 다른 나라와 다르다. 독일에서는 극장(연주장)마다 회원 예약제Ab--onnement 같은 방법이 일반화 되어 있는데, 이것을 구입하면 한 시즌(1년) 동안 10~12편의공연을 좋은 객석에서 관람할 수 있다. 물론 이 회원권은 가격 면에서도 혜택이 있는데, 독일에서는 이 제도를 통한 관객이 평균 절반 가량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독일의 극장들은 공연 때마다 요란하게 광고를 해서 예매를 촉진하고, 매일 저녁 매표소에서의 판매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는 않는다. 이런 회원권을 그렇게 많이 구입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흔히 전통적으로 교양 시민계층으로 대변되는 식자층 관객이다. 어려서부터 연극문화에 익숙해 온 이들 고정 관객층은 여가시간을 공연 관람으로 보내고, 공연장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관극 문화가 몸에 배인 계층이다. 이런 배경에는 역시 학교에서의 문화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공연예술 관람을 하면서 여가 선용을 하는 생활문화가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학생과 연금생활자(노인), 경찰, 실업자 등에게는 할인제도가 적용되어서 이들에게 입장권은 30~50% 가량 더 할인이 된다. 공공지원 제도가 없는 나라들(미국, 일본, 한국 등)에서는 입장권이 비싼 편이고, 극단에게는 공연수익이 중요하므로 관객은 그야말로 손님이지만, 독일에서 관객은 오히려 그 지역 자치정부의 문화비 혜택을 받는 수혜자들이다.

 

독일식 공연예술 인프라 구조에서의 문제점
독일 공연예술 문화에서 인프라 구조의 특징은 자치정부의 지원제도, 지방분산적인 공립극장의 활발한 활동, 다양한 예술축제의 개최, 고정 관객층의 형성이라고 지적될 수 있다. 전국적으로 폭넓게 퍼져 있는 공연장과 고정 관객이 모범적인 연극문화를 조성하고 있으며, 편리한 교통시설, 여유있고 개인주의적인 일상 생활이 이러한 공연문화를 즐기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독일의 직장인들은 보통 오후 3~4시경에 퇴근하고, 회식이나 동창회같은 집단적 모임이 별로 없다) 그런데 독일에서 같은 공연예술의 인프라 구조는 복지국가에 도달한 중북부 유럽 국가가 아닌 나라에서는 모방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경제적 부유함이 공연활동 후원의 근본 토대가 되어 있기 때문이며, 경제적 여유가 있더라도 그들의 관극 문화는 시민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200여년간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풍부한 재정 지원이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재정적 안정성이 극장의 재정 자립도와 상품(작품)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연극인은 실험정신이 약해지고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치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인해 예술적 자율성이 압박되어서 정치·사회비판적인 공연이 나오기는 어려운 점이 있어서 ‘무난한 작품들이 순응적 시민 관객의 교양 형성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