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문화인프라, 재정과 전문인력의 확보 과제 

 

                                                                                -이 용 우   본지 편집자문위원,고려대 교수 

지난해 정부에서 내놓은 국공립 문화기구, 교육기구에 대한 민간화 내지 민간위탁경영안은 그 시행여부를 놓고 한동안 문화예술계를 시끄럽게 만들다가 뚜렷한 결말 없이 표류하고 있다. 이 문제는 문화예술계에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본질적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꼬리를 내린 것도 아니어서 정부나 문화예술계 모두에게 큰 숙제로 잠복해 버렸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문화란 최대의 자율신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간섭받거나 방해받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이 독립적인 자율신경은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제도와 후원체제 없이는 속절없이 변방에 노출되거나 매우 연약한 것이어서 그것을 보호하고 관찰하는 인프라가 절대로 필요하다. 문화인프라는 바로 문화행동의 섬세한 자율성을 적절하게 감싸고 보호하는 유기질 같은 보호막이기 때문이다.정부가 국공립 문화시설물들을 민간화 하거나 민간에게 위탁경영 하겠다는 의지는 상당히 이유 있는 발상이다. 문화의 중앙집권화가 심한 나라에서 올바른 문화의 싹이 돋아나지 못하는 것처럼 국가행정이 문화에 시시콜콜 관여하는 것도 문화의 자율신경을 촉진시킨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문화의 관 주도방식에 대한 문화예술계 내의 비판과 질타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현실처럼 외부환경에 적극적 저항력을 기르지 못한 분야를 제도적 뒷받침이나 적절한 인프라 없이 막연하게 한데에 내놓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게 재검토돼야 한다.

 

문화시설물의 민간화에 대한 재검토 필요
정부가 문화시설물을 비롯하여 문화운영방식을 민간화하겠다는 발상은 선진외국의 민간문화와 민간참여문화의 현장을 참고한데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외국의 본격적인 문화는 정부의 간여없이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할 것 없이 전문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문제가 발생해도 민간차원에서 해결되는 운영의 유연한 폭을 갖고 있다. 문화행동의 뿌리 역시 민간으로부터 생산되며 문화의 후원도 기업에서, 그리고 문화인프라도 전문가들의 협의를 통하여 생산된다. 그러나 그것이 형성되기까지 그들이 길러온 문화의식과 제도로서의 문화인프라는 적극적으로 참고하지 않은 것 같다. 또 외국의 문화현장들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완전히 민간경영체제에 의한 별개집단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가령 미국의 문화현장들은 그 후원의 주체가 국가인지 민간인지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국가는 기업의 문화후원과 무관하게 기본적으로 문화를 보전하는 후원재정을 늘 확보하고 있다. 이 국가재정은 국립이던 사립이던 상관없이 비영리 문화행동을 지원하는 일정량의 기금을 확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공연장이나 전시장, 그리고 예술단체들은 행사를 기획할 때 한국의 문예진흥원과 같은 성격의 국가예술진흥기금NEA을 두드려본다. 이 기금은 심의위원들의 두 차례에 걸친 엄격한 심의를 거쳐 공익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예술행사에 대해서는 국립이나 사립 등을 가리지 않고 후원을 결정한다.
그리고 주요 미술관이나 오페라단체, 연극, 무용 등 공연장과 전시, 기획단체들에 대해서는 일정한 연중 후원기금을 책정하여 충분치는 않지만 행사준비와 계획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미국에는 국립예술진흥기금과 같은 공공기금들이 꽤 많이 산재해 있으며 이러한 문화재원이나 인프라들이 문화의 진흥을 위하여 넓게 포진해 있다.영국도 이러한 문화운영방식에 있어서는 유사성이 있다. 가령 국립복권기금National Lottery Fund은 예술후원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는 진흥기구이다. 영국에서 중요한 예술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잉글리시 아트 카운슬English Art Council이나 스카티시 아트 카운슬Scotish Art Council, 그리고 복권기금을 빼놓고는 생각 할 수가 없다. 복권이 주택이나 체육시설의 진흥에 우선 순위를 두는 우리와는 운영철학에서 크게 다르다. 영국의 테이트 갤러리나 대영박물관, 빅토리언 앨버트박물관, 헤이워드 갤러리 등의 대형 미술행정기구들과 로열 오페라하우스, 로열 페스티벌 홀, 코벤트 가든 등 공연단체들은 연중 예산의 주요부분을 위에 열거한 기금들로부터 확보한다.

 

재정적 후원자 입장에서 문화양육을...
우리의 현실은 국립기구나 공립기구들이 직접 국가재정에서 예산을 받아쓰도록 기구화 되어 있어 국가도 그 만큼 힘들었고 문화예술기구들이 국가의 종속형태를 면할 길이 없었다. 지금까지 국가는 이러한 문화기구의 국가종속 문제를 방치하거나 움켜쥐고 인사권을 행사하는, 문화를 국가의 하부기구화 하는데 역할을 해온 셈이다. 그 결과 문화는 국립생산품처럼 관료화, 비효율화, 탈대중화, 고립화의 길을 재촉해왔던 것이다. 또 국가의 문화기구들을 책임지고 있는 이른바 전문인들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현장의 전문인인가를 의심케 하는 인사정책들이 꼬리를 물고 의심을 받아 왔다. 정부의 국가문화기구에 대한 민간화나 민간위탁경영의 문제가 나왔을 때 한편에서 환영을 받았던 것도 이와 유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와 연결하여 더욱 중요한 과제는 문화의 속성상 결여되어 있는 재정적 자생력이나 인프라의 뒷받침에 관한 것이다. 정부가 문화운영을 진정으로 민간화하는 방법은 문화를 문화인의 손에 맡기고 재정적 후원자 입장에서 양육하는 것이다. 정부가 문화에 대하여 예산지원을 끊고 죽든 살든 자활하라고 주문한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고의적 문화죽이기 밖에는 되지 않는다.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함께 등장한 각 도 단위의 문화예술회관의 건립 붐은 한편으로는 문화공간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고무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인프라 없이 공간만 세워놓은, 문화인프라와 문화경영의 중요성을 실감케 하는 좋은 예이다. 지금 각 시도가 갖고 있는 문화예술회관은 국가의 재정적 지원 없이는 한치도 움직일 수 없는 각박한 현실에 부닥쳐 있다. 외국의 지역문화공간이 지역적 자립도는 물론 국제적 행사기획에서 중앙무대와 동일한 질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에 비교한다면 격차가 너무 심각한 형편이다. 우리에게도 하드웨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던 시기와 하드웨어가 곧 문화로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가 갖는 고유한 속성을 좀더 직시한다면 다양한 형태의 참여를 동반한 문화유입정책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재정과 전문인력의 확보와 활용이 과제
문화예술의 인프라는 그 동안 다양한 형태로 설명되어 왔다. 재정, 관객, 정부, 소프트웨어, 시설, 프로그램, 정보, 그리고 환경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공립 문화시설물의 문화인프라를 위해서는 재정과 전문인력의 적절한 확보와 활용이 최우선 과제이다. 정부는 국립박물관과 같은 재정적 순환능력이 전무한 기구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지원체제를 유지해야 하며 미술관이나 무용, 연극, 영화와 같은 프로젝트와 프로그램 개발능력이 있는 단체나 기구들은 기업과의 연계를 적극 주선하거나 후원기금의 확충을 통하여 상당한 기간을 두고 서서히 민간화와 민간위탁경영을 기획하여야 한다.외국의 문화예술기관이 사회간접 인프라가 충분히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후원체제 확보에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은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공립 문화예술기관장들도 자력운영을 위한 후원처 확보에 솔선수범해야 한다. 외국의 미술관이나 공연단체장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蹈탕侵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 역할이 행사기획을 위한 후원기금 확보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술관장이나 주요 공연기관의 대표들은 최고의 기획자이면서도 최고의 비즈니스맨을 겸한 유능한 인재들로 공개채용된다. 우리처럼 단체장들이 대표자리를 명예직 정도로 인식하는 풍토에서, 또는 국가나 관이 특정인물을 보호하는 식의 인사정책을 가지고는 자본주의 문화경영과는 한참 뒤떨어진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는 첫째, 문화예술기관의 이사기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사들은 실제로 예술행사를 위한 기금을 출연해야 하며 기관장을 임명, 해임할 수 있는 인사권을 가진 문화예술기구의 실질적 운영자들이다. 외국의 이사시스템은 국립은 물론 공립, 사립문화예술기관에 전면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제도이다. 가령 대영박물관의 운영은 국립이라 할지라도  국가가 직접 보조하는 형식보다는 아트카운슬이나 로터리기금을 통하여 후원을 받도록 되어있으며 주요 전시가 있을 때는 기업 등 사설후원기구를 통한 기금조달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관장의 선임은 물론 이사회의 고유권한이다.  둘째, 예술행사를 위한 기금모집에서 국가나 지방자치정부가 최대한의 융통성을 발휘하되 간섭하지 않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국공립 문화시설물들은 법에 묶여 입장료조차 조절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입장료는 1인당 1천원 이하이다. 이에 비하여 뉴욕현대미술관은 전시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평균 14불, 즉 1만7천 원이다. 10만 명이 입장하였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는 1천만 원인데 비해 미국은 1억7천만 원이 되는 셈이다. 이 금액은 중요한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는 액수이다.셋째는 대중 수용을 위한 편의성의 개발이다. 여기에는 프로그램의 개발에서부터 시설물을 이용한 관객서비스, 접근방법의 용이성, 적극적 감상문화의 제공 등이 그것이다.정부의 이번 안은 문화계의 다양한 가능성을 위한 훌륭한 발상의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문화와 현실, 그리고 문화인프라의 미묘한 성질을 보다 근본적으로 파악한 뒤 과감한 조치와 후원방식을 겸한 생산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본다. 특히 문화의 고고학적 가치를 다루는 기관이나 교육기관의 재정적 민간화 방침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