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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산책 - 9월의 문화인물
한 성 준
한말의 명고수이자 근대 전통춤을 집대성한 한성준(1874-1941)은 충남 홍성을 고향으로 두었다. 그의 선조는 원래 청주한씨로 양반이었으나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신분하락과 함께 집안 전체가 몰락했다고 한다. 7세때 할아버지 백운채로부터 춤과 장단을 익힌후 당시 광대로 유명했던 서학조를 거쳐 수덕사에서의 독학에 이르기까지 한성준은 춤과 장단의 기본기를 익히는데 주력하였다. 유년기과 청년기를 고향에서 보낸 한성준은 홍성과 서산, 태안 일대에서 연행되는 각종 굿과 민속예능 등을 폭넓게 접한다. 이러한 체험은 후에 전통춤을 재구성하고 집대성하는 과정에 있어 훌륭한 참고자료가 돼주었다. 20대 중반 아내와 사별한 후 상념에 빠진 한성준은 전국 유랑길을 떠난다. 전국 각 지역에서 접한 민속예능과 권번의 기방예술은 그의 기량과 예술세계를 더욱 알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무대에 등장한 후에는 명고수로 이름을 얻는다. 원각사, 광무대 등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당대 최고 명창들의 북장단을 도맡아 치면서 고수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간다. 또한 고종으로부터 참봉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아 궁중어전에 나가 기예를 선보일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등 신분적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이후 송만갑 협률사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한일합방으로 단체가 해체되자 권번의 춤선생으로 소일하거나 부유한 집안의 사사놀음에 참가하기도 한다. 한편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거나 판소리 명창들의 음반 취입에도 참여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1930년대는 한성준의 예술활동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1933년 국악인들의 모인체인 조선성악연구회에 참여한 경험을 살려 1938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남은 여생을 바친다. 조선음악무용연구소는 근대 전통춤 교육의 산실로서 오늘날 전통춤계의 기라성같은 인물을 낳고 키운 곳이다. 한편 1930년대 말에는 무려 40여종에 이르는 전통춤을 재구성하고, 극장무대화하는 작업을 펼치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다. 1941년 작고하기 몇 달전에 수상한 조선예술상은 바로 이러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결과였다. 한성준은 한말에 태어나 한일합방을 지켜보았고 일제강점기를 통과하는 역사적 격변기를 살았다. 전국각지를 유랑하며 전통예능의 현장을 두루 체험하였고 기방예술의 총본산인 권번을 접하면서 실로 다양한 전통예능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생 후반기에는 전통춤을 재구성 하거나 집대성하여 무대양식화하는 작업을 도모하였고 더불어 오늘날 전통춤계의 우뚝한 위치에 있는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판소리 명창들의 장단을 도맡아 치는 등 명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성준을 명고수이자 명무로 칭하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을만큼 그는 진정한 광대이자 전통예인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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