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출판

시대 정서와 토착적 감수성에 맞는 우리시대의 영웅을 찾아서

한강희 문학평론가, 중앙M&B 출판대학팀

하늘도 무심하다. 구제금융 한파 속에서 온 국민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늘에 구멍이 날’ 정도로 비가 엄청나게 왔다. 인위적인 구조조정인 IMF를 수마(水魔)라는 자연재해를 통해 확인, 검증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하늘은 우리의 살림살이도 문제였지만 살림터에도 많은 허점이 있음을 무섭게 지적하고자 했음일까. 어차피 시정해야 할 일이라면 살림행위 뿐만 아니라 그 근거지로서의 살림터인 사회간접자본을 총체적으로 구조조정하는 게 마땅할 터이지만 가혹한 형벌을 한꺼번에 감당해야만 하는 형편이어서, 그것도 가장 건강한 삶의 현장인 농토와 공장이 피해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안타깝기만 하다. 하여튼 구제금융시대를 맞아 드러날 대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취약성(혹은 극대화한 속물성)을 자연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셈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20세기라는 휘황했던 한 천년(밀레니엄)이 황혼으로 접어들고 있다. 언제나 문제의 주인공이 자신일 수밖에 없듯 우리의 경우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문명과 구각(舊殼) 사이에서 격변을 치렀던 근대 100년이 서서히 걷히고, 한시도 격동이라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굴곡이 끊이지 않았던 현대 50년이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서고 있다.

그런데, 아직 새 천년에 대한 기대나 설렘보다는 회한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최근 들어 지난 천년 동안 공들이며 쌓아 올린 과학과 합리로 무장한 가공할 만한 정보의 질서보다는, 지난 어느 세기에나 그랬던 것처럼 ‘말세는 역시 말세’라는 세기말 신드롬이 우리네 의식 저변에 문화현상으로 속속 감지되고 있다. 온갖 역학서·귀신괴담·신이론·도참비기·기철학서, 혹은 이를 기본 모티프로 각색된 혹세무민의 가공 담론이 전파를 타고 안방극장에 버젓이 흘러 들고 있다. 또한 알 수 없는 종교들이 저자거리와 산간 오지, 토굴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난립하고 있다. 하기야 지구촌의 이상 자연현상인 엘리뇨·라니냐를 과학으로 설명할 수는 있어도 치유하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이렇듯 새로운 밀레니엄의 전망을 여는 점이적 공간이어야 할 이 시기에 출판계에도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외국의 영웅소설(혹은 전기)번역물의 범람이 그것이다. 모든 독서행위는 생산적 담론에 기여한다는 수사에 비춰 보면 우려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창발성 있는 담론을 만들기보다는 이미 퇴출된 패러다임을 재가공하고 있는 듯한 우려에서다. 최근 나폴레옹· 클레오파트라·징기즈칸·진시황 등 일련의 역사 영웅물이 러시를 이루고 있는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 근대사의 이승만·박정희 등 전기물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한자리 수를 넘어선다. 이 속에는 초판 편역도 있긴 하지만 불가피하게 상업주의적 시류에 영합한 재탕·3탕의 ‘덩더꿍이 소출’ 식의 반짝 출판물(그것도 너도 내니까 나도 같은 대상을 다뤄 시너지 상승효과를 얻어보려는 동반출판까지)도 끼어 있다. 물론 한 영웅의 일대기를 꼼꼼히 살펴 거대 담론과 거대 서사를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는 반면교사로 삼아 청소년층에 꿈과 야망을 심어 주는 기폭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 출판사 세 곳서 출간

우선 최근 출간된 영웅소설의 면면을 훑어본 다음, 저간의 출판현상 행간에 숨어 있는 문제점을 짚도록 하는 순서를 밟도록 하자.

가장 많은 출판사에서 출판된 인물은 나폴레옹으로 세 곳에서 나왔다. 영웅의 일대기에 가장 먼저 불을 당긴 것은 도서출판 ‘오늘’. 지난 4월 나카사키 류지가 쓴 것을 번역한 『영웅 나폴레옹』(문용수 옮김)으로 모두 4권을 냈다.

문학동네는 프랑스의 역사가 겸 소설가인 막스 갈로가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전기형식을 빌려 저작한 『나폴레옹』(임헌 옮김)을 번역, 총 다섯 권 중 유년기에서 이집트 원정에 오르는 29세까지의 성장기를 다룬 제 1권 「출발의 노래」를 출간했다. 지난해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의 돌풍과 함께 이 책이 프랑스에서만 3백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라는 점에 고무돼 손익분기점을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저자인 갈로의 명성은 스테디셀러의 축으로도 작용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갈로는 무솔리니·가리발디·로베스 피에르·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프랑스 진보적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해 왔는데, 이번 나폴레옹의 전기 소설을 쓰는 바람에 좌파로부터 지탄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을 사후의 유명세에 힘입어 판단하지 않고 나폴레옹이 당대적 역사적 상황에서 처했던 입장을 객관적이면서도 가치중립적인 관점에서, 한편으로 주인공의 내면 묘사를 정치하게 그려냈다는 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나폴레옹의 가족관계 및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나 주요 전투장면을 『황제의 앨범』이라는 이름을 붙여 올컬러 화보로 꾸민 별책 부록도 제공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나온 폴 카우프만의 『나폴레옹』(김철 옮김)은 저자가 나폴레옹이 유배당한 세인트 헬레나 섬에 9일 동안 머무르면서 주인공이 숨을 거두기까지의 말년 5년 반의 쓸쓸하게 추락한 삶의 내면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가공한 일종의 기행소설로 읽힌다.

다양한 영웅 소재 책들 출간

중국 전기 작가 장봉홍(張鳳洪)의 『징기즈칸』(정충제 옮김)을 완역 출판한 곳은 ‘중앙M&B’. 상하 두 권으로 1권에서는 천신의 후예인 테무진의 사랑과 야망을, 2권에서는 정복자 대칸의 지략과 전술을 영웅의 일대기라는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랑과 지혜 관련 소재를 적절히 차용하고 있다. 테무진과 대칸은 정복자 징기즈칸의 또다른 이름이다.

‘해냄’에서는 『소설 토정비결』의 작가 이재운이 『천년영웅 징기즈칸』을 8권으로 기획해 현재 5권까지 출간했다. 기획집필한지 10여년만의 결실이란다. 미국의 권위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지가 징기즈칸의 영토정복과 문물전파를 두고 지난 1천년간 세계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라 설정해 천년영웅이라 명명한데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이 고려를 침공한 적국의 황제라는 입장보다는 우리와 같은 몽골반점을 엉덩이에 달고 태어난 혈족이라는 전제 위에서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 이 외에 해롤드 램이 새로 쓴 징기즈칸 전기(현실과 미래)도 나와 있다.

소설 『클레오파트라』는 중앙M&B(미야오 토미코 지음·김난주 옮김)와 미래M&B(마거릿 조지 지음·현준만 옮김)에서 나왔다. 전자는 아몬라 신과 숙명의 남자 시저 - 나일의 관능과 로마의 야망 - 여왕의 애증과 영욕의 악티움 등 3권으로, 후자는 이시스의 딸 - 파라오의 사랑 - 동방의 진주 - 악티움의 노을 - 하데스의 눈물 등 순으로 5권을 냈다.

두 출판사 모두 역사적 영웅으로서의 면모보다는 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있으며, 특히 한 여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실현을 하며 여걸로 다시 태어나는가의 과정을 흥미롭게 형상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 등 굵직굵직한 역사장편으로 정평이 난 김성한이 특유의 장기인 단문과 함축적인 문체에 실은 『진시황제』(조선일보사·3권)는 주인공을 두고 쏟아진 비난이나 미화를 넘어 통일국가를 세우려던 이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며 호쾌하고 장대한 스케일을 보여준다. 한편 주체적 시각과 상상력에 의해 복원한 『시황제』(한겨레신문사 펴냄· 김현기 지음· 2권)는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의 대항 서사로 읽힌다. 사기가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술하거나 놓치고 있는 부분을 작가 특유의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충하면서 우리의 고대사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도서출판 ‘산하’에서 『계백』(이원호 지음·5권)을 우리 민족의 대영웅으로 소설화 했으며, 고도에서는 우리나라 삼국지라는 부제를 달아 을지문덕·연개소문·성충·계백·김유신·김춘추 등을 내세운 『삼국의 혼』을 내놓아 관심영역이 우리 내부로 향하고 있다. 바람직하고도 반가운 일이다.

전기에 가까운 출판물로는 ‘시공사’에서 『찰리 채플린』(로빈슨 지음), ‘솔’출판사에서 『공자』(차주환 지음), ‘푸른숲’에서 히틀러 평전(요하임 페스트 지음·안인희 옮김) 2권을 신간으로 내놓고 있다.

위에서 보여주듯이 많은 출판사들이 동서양의 영웅을 등장시켜 출판난국을 돌파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독서 행위야 별개의 문제라 하더라도 ‘잘못 출판된 영웅’이 무작위로 전면에 나타날 경우 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도 있다. 덜 익은 협(俠)·전(傳)으로 경사될 경우 무협지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독자들에게 쉽고 단선적인 정서를 알게 모르게 부추긴다는 점이다. 현시대에 맞는 영웅 찾아 읽기

경제난에 가뜩이나 시달리는 작금의 형편에서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보고 구조적이고 원천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한 절대자의 신통력에 의지해 보려는 편리하고도 얄팍한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누군가가 나서 단번에 문제를 해결해 주면 그 뿐 스스로의 자구책을 마련할 수도, 비전을 창출할 수도 없게 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문학 내적으로도 거대서사나 미학적인 담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외국물의 경우 원작소설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출판사들이 상업주의에 편승해 번역/개작 과정에 참여하여 과도하게 원작을 손상, 궁극적으로 개선이 아닌 개악을 일삼는 예가 허다하다. 21세기로 가는 정보화-멀티미디어 사회란 영웅이 필요하거나 특정 인물을 우상화하는 시대가 아니다. 작지만 소중한 개별적인 논의들이 민주와 합리라는 이름으로 생산적인 방향으로 지평을 열어가야 할 때다. 한편으로 사회 모든 부문이 내리 국제화로 치닫는 형국에서 우리 자신의 풍부한 고전 유산 속에서 아이덴티티를 찾아 새로운 세기에 걸맞은 삶의 지혜(경쟁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로 변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출판사들은 난국을 헤쳐나간 우리의 고전적 영웅이나 생활 주변에서 실사구시에 빛을 발한 생활의 영웅을 찾는 것도 불황의 출구를 여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본다.

눈밝은 독자들이여, 여름 한철 동서양의 고전적 영웅과 깊은 사색의 만남을 가졌다 하더라도 부디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단군 이래 최악의 구조적 불황의 깊고 긴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서와 감수성에 맞는 영웅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아니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시대적, 민족적 원죄를 모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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