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영화

우리의 삶, 우리 세계의 존재양식에 대한 질문
- 「퇴마록」 「황혼에서 새벽까지」 「해피투게더」 -

하재봉 작가·영화평론가

영화는 현실이다. 현실보다 더 뚜렷한 현실이 영화 속에는 담겨 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영화 역시 일종의 거울효과, 즉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깊이 있게 사고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관람행위는 단순히 일상현실에서 일탈하고 싶은 충동 때문만은 아니며, 비현실적 서사구조 안에서 편안하게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재충전을 하기 위한 것만은 절대 아니다. 영화의 생산과 소비양식에는 우리 사회의 존재형태가 암묵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관객들이 선택하는 영화 속에는,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어떤 기대효과가 담겨 있기 때문이며 그런 기대를 만족시켜 주는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흥행에 성공을 하면, 자본논리에 의해서 그와 비슷한 영화들이 양산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바로 이것이 장르영화의 출발이다. 특정 장르의 영화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다면, 그 사회 내부구조 안에서 그런 장르의 영화를 생산해 내야만 하는 특정한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가족」 「여고괴담」 이후 또 하나의 공포 영화인 「퇴마록」이 대중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근저에는 공포 장르를 원하는 집단적 사회심리 요인이 잠복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정치한 분석과 논의가 뒤따라야겠지만, 세기말적 혼돈과 IMF 이후 우리 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는 무기력증, 그리고 환상에 대한 관심이 작용한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 보여준 「퇴마록」

박광춘 감독의 「퇴마록」은 ’93년 7월 20일부터 PC통신 하이텔에 연재된 이우혁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 「퇴마록」은, 우선 가장 성공한 헐리우드식 상업영화라는 점이 돋보인다. 아마도 「퇴마록」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거대한 상업적 구조를 동경만 하던 사람들에게 우리 힘으로도 그런 영화들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최초의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악령과 싸우는 퇴마사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는 판타지 소설 「퇴마록」은, PC통신에 연재될 당시에도 매회 평균조회수 4천번을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다. 현재 ‘국내편’ ‘세계편’ ‘혼세편’ 등 총 13권의 책에 3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 중 일부분이 차용되어 영화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의 서사구조는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많은 생략과 비약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소설을 읽은 상당수 독자들에게 영화 「퇴마록」은 그 압축된 서사구조로 인해서 오히려 실망감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네 명의 퇴마사들, 박신부(안성기), 현암(신현준), 승희(추상미), 준후(오현철) 등이 갖고 있는 개별적인 캐릭터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아서 이러한 혼란은 가중되고 있으며, 특히 현암과 승희의 멜로적 구조가 미흡하게 처리되어 있다. 현암이 사용하고 있는 월향검의 내용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며, 준후의 역할도 모호하기만 하다. 이것은 각본작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영화 「퇴마록」은 몇 가지 장점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겨준다. 우선, 매끄러운 영상 처리가 돋보인다. 특히 특수경찰이 사교집단의 근거지를 급습하는 도입부는 역동적 편집과 뛰어난 음향효과로 박진감을 더해 준다. 대부분의 장면이 밤에 촬영되었기 때문에(세차장씬을 제외하고는 모두 밤장면이다) 인공조명의 사용이 필연적이었지만, 「퇴마록」의 영상은 상당히 세련되어 있다. 또 컴퓨터 그래픽 기술도 영화의 완성도에 한몫을 하고 있다. 우리 영화에서는 「구미호」에서 처음 시도되었던 컴퓨터 그래픽은 「은행나무 침대」를 거치면서 「퇴마록」에 이르러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장면을 만들어낼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후가 컴퓨터 게임에서 파이터를 불러내어 격투하는 장면과 퇴마사들이 하수구를 탈출하는 장면 등 총 8분 정도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졌는데, 「퇴마록」의 성공은 시각효과팀에 상당부분 돌아가야 할 것이며, 향후 우리 영화에서 활용될 컴퓨터 그래픽의 증가를 예고하고 있다.

제작진들은, 「엑소시스트」 「오멘」처럼 악령이 등장하는 오컬트 무비와 액션 스릴러를 결합하여, 「퇴마록」의 컨셉을 오컬트 스릴러로 잡았지만, 대중적 흥행을 위해 무리하게 멜로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암과 승희의 관계는 전체 서사구조의 큰 흐름 속에 정리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신인답지 않게 데뷔작을 깔끔하게 만들어낸 박광춘 감독의 역량과 제작팀의 노력, 그리고 선악의 양면연기를 효과적으로 표출해낸 추상미의 매력이 「퇴마록」의 성공을 가져오고 있다.

또 하나의 미학에의 도전,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베르토 로드리게스의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영화적 상상력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이른바 선댄스 키드들이 손잡고 만든 이 영화는,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등으로 세계 영화사의 흐름을 뒤바꾼 살아있는 전설 퀘틴 타렌티노가 각본, 주연을 맡고, 역시 23살의 어린 나이에 7,000달러의 믿기지 않는 제작비를 가지고 혼자서 각본·촬영·편집해서 만든 「엘 마리오치」로 미국 영화시장을 경악에 빠뜨린 로베르토 로드리게스가 감독한 것만으로도 관심이 간다.

이른바 ’90년대 후반부터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타렌티노 스타일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살펴볼 수 있는 이 영화는, 타렌티노의 다른 각본처럼 기승전결이 무시되고 영화의 시간적 구조가 뒤엉켜 있는 비선형 서사구조는 아니지만, 의외성과 기발한 상상력, 현대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폭력에 단 관심이 두드러진다.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크게 전반의 갱스터 장르와 후반의 흡혈귀-호러 장르로 나누어진다. 전반은 두 형제 갱들이 살인을 하고 목사 가족을 인질로 삼아 멕시코 국경으로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로드 무비이고, 후반은 폐쇄공간 - Titty Twister라는 스트립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로드 무비라는 동적인 선과, 폐쇄공간이라는 정적인 선이 결합되면서, 정 속에 동이 있고, 동 속에 정이 있는 복합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갱스터들의 움직임이 돋보이는 전반부에는 오히려 폭발할 듯한 힘을 억누르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압축되어 있고, 폐쇄공간의 스트립바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하고 있다.

누구도 상상못할 후반부의 반전은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가장 뛰어난 매력이다. 타렌티노는 거대한 피의 잔치를 부르는 스트립바에서 우리 사회의 폭력적 구조의 폭력적 드러냄이라는 또 하나의 미학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성숙한 모습 보여준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곡절 많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지난해 칸느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해피투게더」(이하 해피투게더로 표기)가 드디어 개봉되었다. 동성애가 주제로서 ‘우리 정서에 반함’ 이라는 이유를 달고 수입심의 부적격 판정을 해서 수많은 비난 여론을 뒤집어 쓴 공륜이, 공진협으로 변모해서 1년만에 수입심의를 허가해 주었다. 이번에 국내 개봉되는 「해피투게더」는 유럽이나 미주 지역에서 개봉되었던 「해피투게더」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미국판 97분, 영국판 96분에 비해 한국판은 95분이다. 한국판에서는 지난해 수입심의에 넣었던 문제의 동성애 장면이 대부분 빠져 있다. 누드씬은 없고 키스씬과 탱고씬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해피투게더」의 영화적 완성도에 동성애씬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국영과 양조위의 관계는 남자들 사이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관계로 읽힌다. 그만큼 왕가위는 인간 본성에 숨어 있는 사랑의 마력을 화면 위로 눈부시게 끌어내고 있다. 재능있는 감독으로만 여겨졌던 왕가위는 삶의 숨겨진 부분까지 깊이 있게 응시하는 한결 성숙해진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해피투게더」에는, 「중경삼림」 「타락천사」의 현란한 스텝프린팅도, 들고찍기도 대부분 사라지고, 대중적 멜로 이야기도 없다.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처연한 사랑, 그리고 그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삶의 또다른 한 측면을 화면 위로 드러내는 감독의 시선이 있을 뿐이다.

왕가위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해피투게더」 역시 상당한 점프컷으로 부드러운 기승전결식의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고 있어서 대중적인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해피투게더」의 세 남자 사이의 관계를 중국(장국영) - 홍콩(양조위) - 대만(장진)의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분명히, 감독은 그런 의도를 바닥에 깔고 영화를 찍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령 똑같이 홍콩의 중국반환에 따른 중국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웨인 왕 감독의 「차이니스 박스」에 비해서, 「해피투게더」의 서사는 은유적이고 암시적이다. 「차이니스 박스」가 실패한 것은 알레고리가 정면으로 노출되면서 영화적 탄력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해피투게더」는 정치적 독해가 가능하면서도 보편적 사랑 문제를 다룬 영화로 보이는 것은, 주제를 노출시킬 때 영화미학이 얼마나 피해를 입는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의 역량 때문이다.

「해피투게더」의 영상은 우리가 지금까지의 어떤 영화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해야할 정도로 아름답다. 현란한 색이 노출되면서도 서로 어긋나지 않고 미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칼라화면과, 또 그보다 더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모노톤의 화면은, 영화가 빛의 예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가르쳐 준다. 왕가위팀(촬영/두기봉, 미술/장숙평)의 호흡은 「아비정전」 이후 최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존재양식에 대해 질문하는 행위에 다름아니다. 그런 질문을 담고 있으면서도, 표현양식에서는 기존의 양식을 뛰어넘는 독창적 방법을 택해야 하는, 창조력 있는 정신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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