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문학

거대한 ‘수마’를 잠재울 ‘생명주의’ 문학을 기다리며

홍용희 문학평론가

전국이 성난 비의 발자욱에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하고 있다. 견고한 문명의 첨탑이 범람하는 비의 원시적 위력에 무력하게 패배하고 있다. 연일 이어지는 맹렬한 빗발에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끊기고, 사람이 죽어간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와같은 천재지변의 재앙이 비단 우리나라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세계가 해마다 기록 갱신하는 기상 이변에 의해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는 병마에 시달리는 인체에 비유된다. 마치 몸살에 걸린 사람이 흐르는 콧물과 고열에 고통스러워 하듯이, 지구가 온통 수해, 가뭄, 돌풍, 무더위 등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100년 전만 해도 젊은 생기를 과시하던 초록별, 지구가 갑작스럽게 생체리듬을 잃고 노환의 고통 속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 더이상 아름답고 정겨운 음조로 비를 노래하는 일이 가능할까?

“저 찬란한 뭇별에서 내리는 텔의 소나기/아기야 창문을 열지 말라/보면은 그대로 비가 되느니”(유치환, 「밤비」)와 같이 인간과 비의 친연성을 노래한 맑고 정다운 정서가 더 이상 우리 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원래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겸손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은 산 꼭대기에서 부어도 가장 낮은 곳으로 몸을 낮추어 흐른다. 그러나 이토록 부드러운 물이지만 그 속에는 가장 무섭고 치명적인 원시적 야수성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물을 성나게 하여 그 숨어있는 야수성을 불러내었을까. 비와 인간의 친연성을 파괴시키고 있는 주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인간이다. 인간에 의해 인간의 수난이 야기된 것이다.

주지하듯, 16·7세기 이래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 등에 의해 확립되기 시작한 근대 패러다임의 기계적 환원주의에서 자연은 인간에 의해 관리되고 조종되는 물질적인 객체적 대상으로 규정된다. 주체중심적인 근대적 사고에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 착취, 정복은 인류 문명의 진보와 번영의 약속이라는 명분으로 쉽게 승인되고 명령화되었다. 근대 기계주의적 세계관에서 과학이란 이제 더 이상 자연질서를 이해하고 자연과 조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지혜의 터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가치의 파괴와 균형상실을 초래시키는 반생태학적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따라서 20세기들어 급속하게 행진한 기술산업의 발전이 결과적으로 전세계적인 생태파괴와 그로인한 이상기후의 병마를 초래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고 할 것이다.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개발 신화가 결국에는 인간의 온전한 생존의 토대를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연일 TV뉴스 속보 속에서 넘실거리는 거대한 수마의 기세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무서운 보복과 응징의 한 예고임에 틀림없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절박한 과제는 근대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생명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다. 다시말해 죽임의 문화에서 살림의 문화, 인간중심의 문화에서 생명공동체의 문화를 재건하는 일이 요청된다. 생명의 세계관에서 인간과 자연은 이원론적인 대립관계가 아니라 전일적인 온생명의 한 단위체로서 인식된다. 생명의 패러다임에서 세계는 분석적·합리적·기계적 사고를 통해 수량화할 수 있는 기계원리 체계가 아니라 유기적인 상호의존적인 현상들의 연결망 network , 관계의 역동성의 장(場)으로 인식한다. 인간과 자연을 한몸으로 인식하는 유기적 세계관은 오늘날 지구의 자정능력의 상실로 인한 고온화 현상, 폭우와 가뭄, 오존피해, 엘리뇨 현상 등등의 전지구적인 위기적 상황으로부터 신생의 출구 찾기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문학의 중심축을 이루며 전면에 떠오르기 시작한 ‘생명주의’문학의 위상은 궁극적으로 바로 이와같은 문명사적 가치 전환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한다. 지금까지 ‘생명주의’문학에 대한 명칭은 환경문학, 생태문학, 녹색문학 등으로 혼재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환경문학은 자연을 주변부로 인식하는 근대의 인간중심적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생태문학은 개체 생명의 상호 연관성과 관련구조를 적절히 구현하고는 있으나 개체생명의 독자성이 온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녹색문학은 용어 자체가 상징적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생명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개념어로는 부적합하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발표된 ‘생명주의’ 문학은 대체로 공장폐수, 자연파괴, 대기오염 등에 대한 극명한 고발, 비탄, 풍자의 면모로 나타난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게 분명해!

    - 최승호, 「공장지대」

위의 시편은 공장지대에서 기형아를 낳은 산모의 형상을 통해 황폐화된 죽임의 현실을 섬뜩하게 묘파하고 있다. 산모의 젖에서 허연 공장 폐수가 흘러 내린다. 우리 인체는 90%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물의 한 표현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외부세계의 수질오염은 인체의 오염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90년대 ‘생명주의’ 시편은 김지하, 고은, 정현종, 김광규, 김명수, 이문재, 고형렬, 이하석 등의 많은 시인들에 의해 다채롭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시편들에서 몇몇 주요 작품을 제외하고는 소재적인 차원에 그친 한계성을 노정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생명주의’문학의 범주는 소재적인 차원이 아니라 우주 생명의 본성과 존재원리에 대한 인식론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인간의 편리에 의해 파괴된 생태계가 다시 인간의 편리를 위해 복원되어야 한다는 논법에서 탈피하여 모든 개체생명이 우주적 연관성을 지닌다는 우주생명의 세계관에 대한 인식의 차원으로 열려있어야 할 것이다.

‘생명주의’ 소설의 경우 비교적 근자에 발표된 주요작품으로 우한용의 「불바람」, 최성각의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 한정희의 「불타는 폐선」, 박덕규의 「기러기 공화국」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경우에 비해 양적으로 미미한 이들 소설작품들은 해양·하천·식수의 오염, 산업폐기물, 방사능 유출 등의 현실적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함으로써 생명파괴의 현실을 충격적으로 각성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 역시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시의 경우처럼 소재주의적인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생명주의’문학에 대한 오늘날의 양적 풍요와 무성한 논의에 비해 정작 그 성과는 미약한 현실에서, 최근에 발표된 한승원의 장편소설 「사랑」은 이러한 지금까지의 제반 한계를 뛰어넘는 한 전범을 보여준다. 이 소설 세계의 마당에는 사마귀, 소, 뻐꾹새, 백양나무 등등이 단순한 자동인형이 아니라 내생적인 영혼과 개성을 지닌 삶의 주체로서 활동한다. 작가는 모든 우주 생명의 존재원리는 사랑이며, 그것은 서로 가학과 피학의 순환관계임을 내밀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빗방울과 풀잎, 사마귀의 암수,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사람과 짐승, 바다와 육지 등등의 모든 억조 창생의 존재원리가 사랑 주고 받기의 관계성을 통해 비선형적인 자기조직화 운동을 형성해 나가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한승원에게 우주는 하나의 활성적인 생명공동체이다. 그는 작은 생명도 우주적인 관계성, 순환성, 다양성의 깊은 그물망 속에서 호흡한다는 것을 면밀하게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이 수마의 횡포에 처참하게 붕괴되는 상황이 인간중심주의가 초래시킨 결과임을 뼈저리게 인식할수록 한승원이 펼쳐보여주고 있는 우주생명의 진경은 더욱 소중한 가치로 빛난다. 이제는 이러한 우주생명의 세계관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가치관으로 뿌리내리는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오늘날 절실하게 중요한 문제는 ‘생명주의’문학의 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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