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프리즘

최승희의 재래(再來), 최승희의 각색
- 국립국악원 백향주 내한공연 -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1985년 가을, 남북 공연단 교환 공연에 파견된 춤꾼들의 국적은 당연히 북한이었을 게다. 그후 북한 국적의 춤꾼이 남한에서 공연한 적은 없었다가 지난 6월말 백향주가 다시 북한 국적으로 남한에서 공연을 가졌다. 격세지감이 있다. 분단이래 북한 국적의 춤꾼이 민간 차원에서 남한에서 공연을 가진 사례로는 아마 백향주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국악원 예악당에서 이틀간 있은 백향주의 무대는 애시당초 주목을 끌게 마련이었다.

북한에 거주하는 북한 국적의 춤꾼이 내한 공연하는 경우를 상상하기 곤란한 현상황에서 이번의 내한 공연에는 백향주의 재일동포 4세로서의 지위가 다분히 작용했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백향주가 무대에 올린 레퍼토리들이 대부분 최승희 작품들의 재현이었다는 사실은 근래에 진행중인 최승희 ‘복귀’물결에 힘입어 그녀의 내한 공연을 성사시키는 무시 못할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향주의 내한 공연에 있어서는 정치적으로는 북한 국적이, 예술적으로는 최승희 춤의 재현이 중요한 구실을 한 셈이다.

’90년대초까지 최승희의 춤 원본은 남한에서 종적을 감추다시피 하였다. 자진 월북한 최승희는 군사독재 냉전 체제의 살얼음판에서 함부로 꺼내지 못하는 이름이 되었으며 정사의 명부에서 최승희는 지워지고 지워지기를 거듭했고, 야사 같은 전설에서나 회자될 뿐이었다. 한국 근대 무용사에서 최승희의 비중을 조금이라도 아는 쪽이라면 그러한 전설로 이어졌던 상황이 학술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얼마만한 황폐함을 불러왔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정병호 교수가 최승희 전기집을 발간한 때가 불과 3년전의 일이고 그전인 ’89년에 분단이래 최초로 최승희 자서전이 재발간되었으며 또 김백봉 교수가 ’96년 연말에 최승희 작품 무대를 마련한 것은 모두 상황의 변수와 함께 이런저런 황폐함을 떨구어 버리려는 의지의 결과였다. 최승희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 할 만치 초보적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지금 남한에서는 최승희 재현 식의 공연이 있을라치면 우선 관심부터 모이게 되어 있다.

게다가 백향주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백홍천으로부터 체계적인 춤 수업을 받은 터에 10대에는 북한에서 최승희의 춤을 최승희의 직계로부터 정식으로 전수받았다. 최승희의 양자로 알려진 만수대예술단의 안무가 김해천은 백향주에게 최승희의 춤을 넉넉히 지도한 줄로 안다. 이런 정황을 뒷받침하듯, 백향주는 이제 약관 20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주로 미국과 동남아에서 150여회의 순회 공연을 올린 실적도 있다. 이는 특히, 일제시대에 최승희가 일본과 구미를 무시로 드나들며 순회 공연을 가졌었던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무대에 올려진 열두 작품 가운데 최승희의 원작은 여섯 점이었다. 백향주는 김해천으로부터 최승희의 춤을 얼마 만큼 전수받았는지 밝히지 않았다. 북한에서 창작한 「목동과 처녀」, 최승희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고구려 무희」를 제외한 네 작품은 1937년도의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독무이고, 섬세함과 우아함,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날렵함을 기본 특질로 한다. 어린 신랑의 설레임을 다소 코믹하게 건드린 「초립동」을 예외로 치면, 이번 서울 공연에서는 최승희의 신들린 듯한 경지와 매력적인 몸 기운이 어울리는 작품들이 주공연작으로 선정되었음을 대변한다 하겠다. 이외에 백홍천의 안무작을 비롯한 나머지 작품들도 이런 기조위에서 선정되었다고 할 만큼 서울 공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앞서의 기본 특질에 의해 채색되었다.

춤꾼으로서 몸 소재를 잘 갖춘 백향주의 재기발랄함에서 최승희를 유추할 수 있다. 최승희 춤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그 춤의 개성이 면밀하게 소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추 이상의 다른 말이 가능할까. 게다가 남한에서 회자되는 최승희는 월북 이전의 춤 세계에서 본 최승희이지 그후의 최승희는 아닌 것 같다. 월북 이전의 최승희를 둘러싼 전설 가운데 이 조선 여자가 엄청난 무대 카리스마로써 관객을 압도했다는 전설이 아주 매력적으로, 제일 자주 회자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백향주가 최승희와 완전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번 백향주의 춤에서는 아직 나이 탓도 있겠지만, 가녀린 인상을 적잖이 목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향주의 공연을 두고 주최측은 최승희의 재래(再來)라 소개했고, 백향주 자신은 최승희의 각색이라 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 됐든 최승희의 실체에 근접하려는 남한에서의 노력에 도움이 되었을 터이다. 그래서 여기의 많은 사람들은 기왕 내친 김에 최승희의 춤 세계를 샅샅이 살려내는 무대가 한건주의가 아니라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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