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프리즘

「명성황후」 뉴욕 입성이 축적한 무형의 자산
- 세계를 겨냥한 ‘상품’으로서의 조건 확인한 계기 -

정은령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97년 광복절 한국뮤지컬 사상 처음으로 세계뮤지컬계의 심장부 뉴욕에 입성했던 「명성황후」. 단 열흘 12회에 그친 첫해 공연에서 뉴욕 문화계를 좌지우지한다는 뉴욕타임즈로부터 “진정한 장관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준 뮤지컬”이라는 호평을 얻고, 이후 4일간 전석 매진을 이끌어 냈던 쾌거.

그러나, 1년만에 뉴욕(7.31~8.23)과 LA(9.11~ 10.4) 순회공연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명성황후」팀은 ’97년의 성공에 들떠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령탑인 연출가 윤호진 씨는 출국 전 비장한 출사표를 던졌다.

“올해 우리의 목표는 「오페라의 유령」 , 「미스 사이공」 처럼 브로드웨이의 정식레퍼토리가 되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다. 뉴욕에서의 공연기간 한달이면 상품으로서 「명성황후」의 가치를 평가받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성공하든 깨지든 끝을 보고 오겠다”.

첫해가 브로드웨이에 ‘한국뮤지컬 맛보여주기’를 시도한 해였다면 ’98년에는 제대로 장사를 해서 ‘달러를 벌어오겠다’는 목표도 분명히 했다. ’97년 뉴욕공연에서 「명성황후」는 비평계와 관객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짧은 공연기간때문에 8억여원을 빚졌고, 이후 국내공연 수익으로 그 부채를 탕감했기 때문이다.

이제 뉴욕공연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 냉정하게 짚어보자. 「명성황후」가 세운 ’98년의 목표는 달성됐는가.

표면적으로는 ‘완승’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브로드웨이를 움직이는 몇몇 실세 프로듀서들이 공연을 탐색하고 돌아가기는 했지만, 아직 「명성황후」를 브로드웨이의 정규 레퍼토리로 받아들이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다.

여름 바캉스시즌이 낀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인 2천8백석 규모 뉴욕스테이트극장을 평균 점유율 60% 선으로 채웠지만, 흑자를 기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관객 8할에 육박하는 미국인들 대부분이 ‘극장발전기금’(TDF, Theater Development Fund) 등의 회원으로서 할인티켓을 구입하는 ‘알뜰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에 드리운 이런 어두운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는 ’98년에도 눈앞의 달러와 맞바꿀 수 없는 거대한 ‘무형의 자산’을 축적했다.

그 첫째는, 「명성황후」의 ‘품질’을 올해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던 뉴욕타임스는 그랜드오프닝(뉴욕에서는 준비기간인 프리오프닝기간과 그랜드오프닝을 구분) 이튿날 리뷰기사를 통해 주역가수들의 탁월한 가창력, 무대미술과 의상, 조명의 빼어남, 관객들을 전율시키는 코러스의 매력 등을 칭찬했다. 자막의 미숙함, 낯선 한국말을 2시간반 동안 들어야 하는 고역 등을 꼬집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타임지의 결론은 “라스트신의 합창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객석에 앉은 관객이 어떤 민족이건 그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동료 직업인으로서 털어놓는 현지기자들의 솔직한 평가도 뉴욕타임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메리칸 시어터 매거진’의 기자 제임스 오스란드는 “음악적 완성도와 무대의 아름다움은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어떤 작품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런 호평에도 불구하고 왜 브로드웨이는 「명성황후」에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이야말로 「명성황후」가 올해 공연에서 열어낸 가장 뼈아프고 귀중한 성과들일 것이다.

연출자 윤호진은 “한국 단독의 브로드웨이 입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현지 프로듀서와 공동제작체제를 구축해야 하고, 영어로 작품을 만드는 것은 물론, 창작지문에도 이들의 참여를 허용해야 할 것”이라고 올해 뉴욕공연에서 얻은 결론을 털어놓았다.

겉으로는 누구나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도록 개방된 것같은 브로드웨이. 그러나 실제로 브로드웨이는 철옹성이다. 「미스 사이공」이 베트남을 무대로 삼았다고 해도 무대에 서는 배우 일부가 동양인일 뿐, 제작자·작곡가·연출가는 모두 미국인이다.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브로드웨이를 이끌고 나가는 시스템에 대한 적응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철옹성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게 현지관계자들의 솔직한 충고다.

작품 내적인 문제도 지적됐다. 클래식전문 라디오 채널 WQXR의 아나운서 실장 그렉 화이트사이드는 “「명성황후」가 세계상품이 되려면 단 한명이라도 착한 일본인을 등장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익스피어 연극에서 흑과 백,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는 경우를 보았는가. 한국관객들은 신민통치를 겪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악행을 몸서리치게 공감하겠지만,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뉴욕이다. 서구관객들을 설득할 스토리의 보완이 필요하다”라는 것.

「명성황후」의 뉴욕진출은 ‘한국뮤지컬 수준 과시’의 차원이 아니다. 헐리우드가 영화 하나로 전세계 시장을 공략하듯 우리도 ‘메이드 인 코리아’의 문화상품으로 브로드웨이를 역공략해보겠다는 첫번째 시도다.

한국땅이 아닌 세계를 겨냥하는 상품이고자 했을 때, 무엇을 갖추고 어떤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하는가를 확인한 것이야말로 「명성황후」의 성과일 뿐 아니라 해외로 진출하려는 한국공연계가 참고 삼을 귀한 교훈이다. 단번에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경제력만으로는 우리를 앞지르는 일본도 아직 ‘뮤지컬 브로드웨이 입성’은 시도조차 못해보지 않았는가.

「명성황후」팀은 이제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 9월 11일부터 그들은 21일간 헐리우드의 도시, LA를 두드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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