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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칼럼 위기극복과 월드컵 문화축제 대비 김영태 시인·무용평론가
1주일간 마닐라에 갔다가 돌아왔다. 세계무용연맹 세미나 및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마닐라는 처음 가본 필리핀의 수도이다. 60년대초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로변에 교통신호가 없는 것에 놀랐다. 한두 명의 교통경찰관 수신호에 의해 차들이 정지하거나 움직인다. 아무리 말을 해도 택시기사는 미터기를 꺾지 않는다. 거리는 더럽고 조경은 취약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4시 소극장 공연, 8시 메인 공연을 보면서 나는 필리핀의 발레 수준을 보고 놀랐다. 발레 마닐라, 발레 필리핀스, 필리핀 발레 시어터의 작품들이 세계 수준에 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행자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도시이지만 문화수준은 고품격이었기 때문이다. 39세에 에이즈로 사망한 이웃나라 싱가폴 안무가 추산고는 필리핀에서 우상과 같은 존재이다. 미국 워싱턴 발레단 상임 안무가를 지냈다. 워싱턴 발레단이 추산고를 영입할 정도라면 그의 안무력을 인정해야 한다. 워싱턴 발레단은 유니버설 발레단 단장으로 있는 문춘숙 씨가 한 때 단원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추산고의 안무작품은 ’84년 세종문화회관에서(「헨델 예찬」 외) 작년에도 리틀엔젤스회관에서 공연되었다. 나는 ’84년 추산고 작품을 보고, ‘추산고 안무는 추상적인 구도이지만 관객들을 전율시켰고, 매료당하게 했다. 발레 기교면에서 눈에 잘 안 띄는 동양문화권의 체질화(서양의 양식을 흡수하고 수렴한)가 그의 안무 특징인데, 이런 패턴을 계속 밀고나갈 때 세계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썼다. 필리핀 국제무용제(8월 5일) 추산고 안무 「알려지지 않은 영토」는 아마도 ’80년대에 안무된 구작인 듯한데 왕족 신부와 평민의 사랑을 그린 서사시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던 발레 수준은 압권이었다. 필리핀의 정치 경제 상황 역시 우리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우리보다 뒤지는 나라였지만 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특히 발레) 집착이랄까 성과는 추산고의 누이 동생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필리핀 발레 시어터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 ‘제물(祭物)’이란 시 한 편을 나는 공연 후에 얻는다. 요절한 안무가 추산고에게 주는….
황금천을 몸에 감은
요즈음 새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사회 각계 구조조정을 비롯해 실업자 대책, 거기다가 우리는 60여년 만에 큰 물난리를 겪고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현정부에서 추진중인 국·시립 문화기관 민간위탁 방침에 대해서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지난번 『춤』지 상반기 공연 결산 좌담 때도 이 문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이 개진되었지만.
며칠전 뉴욕 데뷔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강수진 환영 모임(국·시립 민간 발레단 대표들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 및 박용구 선생 외)에 참석했을 때 나라가 어려울 때에도 역으로 예술은 꽃핀다는 대화가 오갔다. 벤자민 브리튼의 오페라 작곡이 그 절정을 장식한 것도 평화로운 시대가 아닌 영국 사회의 격랑이 소용돌이치던 암담했던 시절의 산물임을 입증하고 있듯이 못사는 나라 필리핀 발레가 세계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발레수준도 강수진(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주역)이 출연한 「로미오와 줄리엣」과 「오네긴」을 보고, 뉴욕 타임즈 고정 필자 안나 키셀코프가 극찬했듯이 강수진의 존재는 우리의 자긍심이 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국립발레단 스무살의 주역 김지영은 미국에서 개최된 잭슨 발레 콩쿠르 시니어 부문에서(2차 선발 85명) 동상의 영예를 안았다. 소련 볼쇼이 발레단원인 배주윤은 패름 국제발레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았고, 오는 10월 「지젤」 주역으로 내정되었다. 또 강예나는 아메리카발레시어터 입단이 결정되었다. 추산고의 구작을 모던 발레로 재해석한 필리핀의 문화적 긍지, 강수진·김지영·배주윤·강예나·김창기 등의 발레리나·발레리노가 배출된 건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이 작곡되었듯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꽃핀 우리의 자긍심이라 할 만하다. 정부는 이런 캐릭터 댄서, 영재들을 위해 국회에서의 편싸움을 멈추고 우리의 보석들을 밀어 주어야 한다.
강수진 환영 모임 때, 2002년 월드컵 문화행사를 88올림픽 개회식 때처럼 우리춤으로만 장식할 것이 아니라 국·시립발레단, 민간 발레단 연대하에서 이번 월드컵 문화축전은 세계인이 공감하는 발레 무대의 한 전범을 보여주자는 의견도 나왔다. 예산 반영, 국·시립발레단과 무용원이 마음을 하나로 합치면 올림픽 개회식 수준을 능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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